Angels of Death2016. 8. 6. 17:59

 사로야님 리퀘스트-잭X레이 AU

(주의-시대극, 잭과 레이첼의 나이 반전, 캐릭터 재해석)




그 이름을 르는 목소리










 

 

   마을에는 자주 안개가 서렸다. 오늘도 산신님이 연초를 태우는 모양이야. 사람들은 으레 그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소년은 고리타분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른 새벽 마당을 청소하다 보면 뺨에 와 닿는 거대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안개는 머리칼을 타고 내려와 얼굴을 감은 천을 간질이고, 종래에는 온 몸으로 퍼져 소년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이 빌어먹을 안개. 싸리비를 내동댕이치는 소년의 목소리에도 안개가 묻어났다.

 

  투덜거리면서도 소년은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레이첼이 먼지를 마시지 않도록 마당을 쓸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소젖과 함께 약초를 달인다. 보다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레이첼은 아침에 일어나면 거르지 않고 그 물을 마셨다. 마침내 놋그릇을 다 비우고 나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마당으로 나와 노래하듯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목을 울리다가 천천히 뱃속의 힘을 끌어 모아 내보내는 소리는 조그마한 오두막을 뒤흔들고, 안개를 타고 뻗어나가 온 마을을 뒤흔들곤 했다. 한참을 그러다보면 마을을 품은 산이 아득한 목소리로 화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부뚜막에 걸터앉아 소년은 레이첼의 가냘픈 몸 안에 있을 공동을 상상한다. 소리는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움푹 꺼진 배를 매만진다. -. 잔뜩 힘을 주어도 입에서 나오는 건 그저 목을 울리는 소리뿐. 인상을 찌푸리는 소년을 보고 레이첼이 작게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소년의 몸 구석구석을 짚어주며 소리가 나오는 요령을 설명해주지만, 이내 소년이 손을 뿌리치고 밥이나 먹어, 짧은 말을 내뱉고 돌아섰다.

 

  조촐한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한창 자랄 시기인 소년의 손이 바쁜 데에 비해, 레이첼은 느긋하게 손을 놀린다. 먼저 젓가락을 놓은 소년이 멀거니 그 광경을 지켜본다. 해 다 넘어가겠네. 시선을 느꼈는지 레이첼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 , 더 먹을래?

 

  - ···아니.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턱을 괴고 앉아 울타리 바깥을 내다보며 소년은 할 일을 헤아린다. 산에 가서 땔감도 주워야 하고, 레이첼이 먹을 약초며 나물도 캐야 한다. 찾아오는 이가 없으면 그저께 딴 열매를 다듬는 일도 할 요량이었으나, 소년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레이첼도 그것을 보았는지 천천히 손을 놓고 옷매를 가다듬었다.

 

  - 레이 아기씨, 계신가요?

 

  레이첼의 손님이다. 상을 물리며 소년은 찾아온 이의 행색을 살폈다. 나물이 든 바구니를 이고 온 아낙이었다. 그럼 그렇지. 마을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워서 돈 대신 나물이며 땔감 따위를 손에 들고 온다. 잭과 내가 굶는 일이 없으니, 괜찮아. 레이첼은 웃었지만, 소년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온전히 레이첼의 몫이기에, 소년은 군말 없이 오두막에 향을 피우고 레이첼의 목에 의료용 천을 감싸 준다. 아낙이 내심 불안한 얼굴을 하자 레이첼은 차를 권하며 차분하게 토닥였다. 곧 나을 거예요. 마을의 유일한 치료사가 하는 말에 아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약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방 한 편으로 물러선 소년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레이첼이 목을 가다듬었다. 맑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목을 울리고, 이내 폐에 모인 숨을 뱉으며 다시금 소리를 끌어올린다. 소년은 머릿속으로 레이첼의 몸속에 있을 작은 공동이 헐떡이는 광경이 그린다. 그 안에 있는 소리를 목의 힘만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낡고 어두운 오두막 안에 울려 펴지는 소리를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쩐지 뱃속이 뜨거워진다. 아낙도 그 기운을 느꼈는지 배를 움켜쥐었다. 에그머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하는 아낙의 귀로 점점 커져가는 레이첼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괜찮으니 소리를 내 보세요. 아낙이 떠듬떠듬 입을 놀린다. , , 아이고. , 아아-, -. 낮게 울리는 소리에 소년은 눈을 떴다.

 

  기이하다. 몇 번을 보면서도 소년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레이첼의 목소리는 먹물 한 방울이 고인 물에 퍼지듯, 낮고 탁한 아낙의 목소리에 스며들었다. 두 소리는 한참을 뒤엉키며 씨름을 한다. 힘에 겨워 얼굴이 벌게진 아낙을 레이첼의 목소리가 어루만졌다. 병의 근원까지 다독여 가라앉힐 것처럼, 레이첼은 평온한 얼굴로 제 몸의 생명력을 담은 소리를 낸다. 뱃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에 소년은 귀를 곤두세웠다.

 

  목소리는 생명의 근원을 담은 힘이다. 그 말에 깊이 매료된 레이첼의 조부는 연구 끝에 중국의 음공을 변형하여 소리로 사람들을 돕는 의술의 한 종류를 만들어냈다. 소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가며 이루어지는 의술. 대를 이어, 레이첼은 걸음마를 할 무렵부터 그것을 전수받았다. 서역인이었던 조부가 물려준 풍부한 성량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경외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소년이 그 치료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낫는 사람들을 보고 나니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 , 좋은 산나물을 받았어.

 

  아낙이 돌아간 후,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레이첼이 웃어 보였다. 제 목숨 깎아먹고 받는 값이 고작 말린 나물이라니. 소년은 미간을 좁혔다.

 

  - 왜 그래, ? 어디 아파?

 

  - ······.

 

  차라리 수도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산골에서 배앓이나 두통 따위를 고치고 있기엔 레이첼의 힘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수도의 온갖 부자들이 그녀를 본다면 금괴라도 내놓으며 애원을 할 텐데. 그럼 고작해야 나물이나 땔감 따위에 만족하며 사는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수도에 늘어선 화려한 저택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몸 여기저기를 짚는 레이첼의 손을 걷어냈다.

 

  - 의원 놀이 할 시간에 목이나 간수하라고.

 

  바구니를 낚아채는 소년에게 레이첼이 되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남 걱정할 시간에 몸이나 챙기면 좋을 것을. 이대로라면 레이첼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이 작은 산골에서 평생 돈도 안 되는 일만 하다가 일찍 죽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서 말을 할까,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다듬으며 소년은 한참동안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뒤로 소년이 몇 번이고 말을 꺼냈지만, 그때마다 레이첼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곳이 편해. 한결같은 대답에 소년은 울컥 올라오는 뒷말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그렇게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느냐고, 너도 네 아버지처럼 이 산골에서 썩어버릴 거냐고. 애꿎은 울타리를 걷어차는 날들만 늘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레이첼을 볼 때마다 아기씨, 아기씨 하면서 따르지만 그녀의 뒤에서 걸어가는 소년에게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곤 했다. 소년은 몇 년 전에 이 마을로 흘러 들어온 외지인이니까.


 소년이 태어난 곳은 아주 작은 어촌으로,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새벽마다 물질을 하고 그물을 던져 하루를 버티는 곳이었다. 사람들에게서는 모두 짜고 매운 바다 냄새가 났다. 신발 하나도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오두막에서, 소년은 여섯 명의 형제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부모와 함께 살았다. 서로를 이불과 베개 삼아 몸을 웅크리고 지냈던 날들, 소년은 걸핏하면 손위형제들과 주먹다툼을 했다. 배를 띄우지 못하는 날에는 아홉 명이 단칸방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었다. 소년의 입담이 거친 것도, 매일 조각배에 의지해 바다로 향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 날의 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소년도 지금쯤 아버지를 따라 조각배에서 거친 그물을 맨손으로 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채기가 나도 눈물을 보일 겨를도 없이 그물을 끌어올려야 하는 날들, 퍼덕이는 물고기보다 생기 없는 얼굴로 손을 움직여야 하는 그런 삶 속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아버지는 더 나을 것도 없이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당연한 것처럼 아이들을 낳아 고함과 주먹질로 길러냈다. 가장 마지막에 태어난 소년의 기이한 눈동자 색을 확인했을 때부터, 그들의 삶은 더욱 척박한 길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 안에서 소년의 외모는 피할 수 없는 소외를 불러왔다. 소년의 한쪽 눈은 찬란한 황금색이었고, 사람들은 소년을 멀리했다. 유년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내야 했던 것도, 자신을 피하는 형제들과 주먹다툼을 벌였던 것도, 아버지가 집어던진 화로에 맞아 몸에 불이 붙었던 것도 모두 소년이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에서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버텨야 했다. 어디서든 불어오는 습기 어린 바람이 때때로 상처를 파고들어 진물로 흘러내렸다. 깨끗한 천이나 제대로 된 간호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방치되고, 걷어차이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약을 집어삼키고 온종일 구역질을 했다. 저 놈은 이제 쓸모가 없어. 겨우 살이 아물어갈 때 즈음, 벼락처럼 내리꽂힌 그 말이 죽은 듯이 누워만 있던 소년을 일으켰다.

 

  어떻게 했더라. 소년은 치솟아 오르는 기억에 속이 뒤틀릴 것만 같다. 레이첼과 함께 지내며 점차 안정되었던 기억들은 불쑥,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소년을 덮치곤 했다. 그 때, 그 날에, 소년은 형제들이 작은 칼로 건조할 생선들을 다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비린내와 내장이 양철통 안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 그 속에서 간신히 숨을 쉬던 소년에게 상처에 소금을 비비듯이 그 말이 흩뿌려졌다.

 

  분노이거나, 슬픔이거나, 겹겹이 쌓인 증오, 파랗게 빛나는 슬픔과 절망,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막막한 감정들이 소년의 안에서 거대한 덩어리로 자라났다. 그리고 소년의 옆에는 생선 내장 찌꺼기가 달라붙은 작은 칼이있었다.

 

  …정확하게, 찔렀을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기억의 비가 내린다. 비명 소리, 고함 소리, 누군가가 소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아팠던가. 소년은 몸을 붙드는 수많은 손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뿌리치고 내달렸다. 낡은 문을 때려 부수고, 소금기로 가득해 숨이 턱턱 막히는 길을 달려 정박되어 있는 조각배를 탔다. 그 배는 소년의 아버지가 몇 십년간 바다를 누비던 배였다. 줄의 매듭을 푸는 법도, 묶는 법도 소년은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배웠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바다 한복판에서 구토하고 쓰러지고 비명을 지르기를 수차례, 소년은 마침내 깨달았다.

 

  아무도 소년을 쫓아오지 않았다.

 

  대신 견딜 수 없는 허기가 소년의 내장을 찔러왔다. 그 때 소년은 자유란 구역질이 나도록 배가 고프고, 온 몸이 쓰라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혼자서 떠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 배를 대었던 마을에서부터, 소년은 바다를 떠돌 때처럼 정처 없이 흘러 다녔다. 아무데서나 잘 수 있었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면 달려들었고, 쫓기기 전에 달아났다. 소년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자유를 만끽했다.

 

  레이첼이 살고 있는 마을에 닿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소년이 누리던 자유가 점점 커져 칼날이 되었고, 내키는 대로 움직이던 소년의 발목을 찔렀다. 운이 나빴어. 과일 몇 가지를 집었을 뿐인데, 소년은 쫓기는 몸이 되었다. 피하려다가 또 누군가를 찔렀고, 한 때의 소동으로 끝날 일이 점점 커져 소년은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산 속의 작고 외딴 마을, 그곳은 소년이 한동안 머무를 곳으로 충분해 보였다.

 

  산 속에 숨어 일주일 정도 지냈을까. 다시 우연이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술술 풀려나가 소년을 휘감았다. 레이첼은 필요한 약재를 구하러 산에 올랐고, 소년은 나무 위에서 중심을 잃었다. 커다란 새가 떨어진 줄 알았어. 정신을 잃은 소년이 깨어났을 때, 레이첼은 소년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소년은 자신이 깨끗한 이불과 푹신한 베개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달았다.

 

  - 발목은 치료했지만, 미안해. 피부는 아직 내 힘으로는…….

 

  - 봤냐?

 

  난생 처음 감아보는 깨끗한 천이었다. 낡았지만 향기로운 약초 냄새가 났다. 그러나 정갈하게 손질되어 빈틈없이 몸을 감싸고 있는 천의 감촉이 도리어 소년의 신경을 바늘처럼 뾰족하게 만들었다. 봤냐고!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목을 졸라버릴 생각이었는데, 고요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와 찬란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소년을 제지했다.

 

  색목인. 소년은 수도에서 몇 번인가 색목인을 본 적이 있었지만, 안개에 꽁꽁 감춰져 있는 마을에서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소년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레이첼의 눈동자는 소년에게 푸른 바닷물의 기억을 불러왔다. 이런 촌구석에 색목인이라니, 자신보다 더 수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레이첼은 어떤 동요도 없이 소년의 말에 대답했다.

 

  - 나는 레이첼. 이 마을의치료사 같은 거야.

 

  - …….

 

  - 왜 나무 위에 있었어?

 

  - 네 녀석이 알 바 아니잖아.

 

  품을 더듬었지만 항상 가지고 다니던 칼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찾아? 레이첼이 바느질함 속에서 소년의 칼을 들어 보였다. 경계하던 소년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레이첼은 칼날을 쥐고 소년에게 칼을 돌려주었다. 무슨 속셈이야, . 소년의 물음에 레이첼은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물건이니까.

 

  네 것. 그 말은 소년에게서 살기를 앗아갔다. 레이첼은 소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항상 깨끗한 천을 주고, 낡았지만 정갈한 옷을 주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가끔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밤에는 다시 잠들 수 있는 온기를 주었다. 소년의 마음에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안개처럼 흩어버렸다. 소년에게 이름을 준 사람도 레이첼이었다. 조부의 이름이지만, 그 울림이 좋아서 레이첼은 몇 번이고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때로는 아이작, 때로는 잭. 소년은 점차 그 이름에 익숙해졌다. 외진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이름은 매일 서로를 부르고 알아가고, 기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 사실, 아버지는 수도의 관리였어.

 

  - 그럼 넌 왜 이 촌구석에 있는 건데.

 

  - 높은 분을 치료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었나봐.

 

  - …….

 

  - 그래서 여기로 왔어.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에서 함께 살았어.

 

  각자의 이불에 누워 어색한 침묵을 맞이할 때면, 레이첼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양을 탐험하던 조부가 마침내 정착하게 된 경위나, 조부와 아버지가 수도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좌천된 이후로 이곳에 정착하면서 치료사 어르신으로 불리게 된 이야기까지, 짤막하지만 언제나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소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모든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언젠가 레이첼을 수도로 데려간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

 

 








  남자는 두 명의 수행인과 함께 찾아왔다. 수도의 귀족 자제 중 한 명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더없이 정중하게 레이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년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적어도 귀족이라면 레이첼이 앞으로 지내는 데에 부족함 없이 사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때 레이첼을 말렸어야 했다. 소년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후회는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처럼 소년의 안에서 기억을 불태우고 마음을 지져놓았다. 그 남자의 병은 레이첼이 고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 어느 때보다 버거운 상대였다. 치료는 일주일에 걸쳐 계속되었고, 남자는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혼사를 앞둔 그는 미래의 부인에게 폐가 될 수 없다며 레이첼을 몰아붙였다. 그 정중한 말투가 점점 레이첼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 그 새끼 살리다가 네가 죽을 거야? 그만 둬, 내가 말하면 되잖아.

 

  - 이제는 멈출 수가 없어, .

 

  - 왜 못 멈추는데?!

 

  그 때 레이첼이 어떻게 웃었더라. 소년이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도 레이첼의 미소를 그려낼 수가 없다. 다만 레이첼의 말만이 소년의 머릿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 꽃을 피우고 후회와 슬픔의 열매를 맺었을 뿐. 화를 내는 소년에게 레이첼은 미안해, 미안해, . 그 말만을 거듭했다. 무엇이 미안한 것일까. 왜 하필 자신에게 미안한 것일까. 소년은 차라리 화로를 뒤집어쓰고 싶었다. 하얗게 달아오른 숯이 피부를 지지며 타올랐던 것처럼, 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마음도 모두 불타 재가 되기를 바랐다그러나 안개가 호흡에 스미듯, 오랫동안 그 마음은 소년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한 계절이 지나서야 남자의 병이 나았다. 남자는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네며 소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물을 건네고 돌아갔다. 남자의 보답 중에는 레이첼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씻지 못했던 오명을 회복해내겠다는 약조도 있었지만, 그 약조가 지켜졌는지 레이첼은 알지 못할 것이다. 쇠약해진 레이첼에게 겨울의 서릿발과 건조한 공기는 치명적이었고, 소년이 아무리 노력해도 꺼져가는 생명은 되살릴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그 새끼를 내쫓아버릴 걸 그랬어. 소년의 말에 레이첼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젠가는 올 일이었다. 대를 이어 레이첼이 했던 일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남들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건강해진 사람들의 몸속에 깃들어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치료사의 일이었으니까.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삶, 소년이 겪고 싶지 않은 일을 레이첼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왔다. 마지막으로 잭을 낫게 했다면 좋을 텐데. 레이첼의 말은 소년의 마음에 박힌 가시가 되어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언저리를 찔러왔다.

 

  겨울임에도 드물게 눈이 내리지 않았던 날에, 소년은 레이첼을 산에 묻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소년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얼어붙은 땅을 팠다. 나무 관 위로 흙을 뿌릴 때 마침내 소년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관이 썩고 레이첼의 하얀 피부는 흙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 위에 자라날 꽃과 풀과 나무를 생각하면그들에게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를 입에 넣을 사람을 상상하면,  소년은 속이 뒤집어져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을 때처럼, 속이 쓰리고 구역질이 나고 아무도 없는 날들의 무게를 버텨야 하는 날들이 찾아왔다. 배에 손을 올리면 그대로 몸을 통과해버릴 것 같은 공동이 소년의 몸 안에서 자라난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것을. 소년은 레이첼이 살았던 날들처럼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불을 지피고 자잘한 일들을 하며 매일 눈을 뜨고 감았다소년을 살피러 찾아온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년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다 이내 돌아갔다. 그러는 중에도 공동이 점점 커져 소년은 그 안으로 자꾸만, 자꾸만 삼켜질 것 같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리 매일을 채워 넣어도 메워지지 않는 공동과, 문득 고개를 들면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소년은 그저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직 그 방법만이, 소년을 견디게 했다.

 

  숟가락을 한 벌 더 놓는 일이 줄어들었을 때, 소년은 다시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이 소년의 키는 한 뼘도 넘게 자랐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넣어두면서, 소년은 비로소 한 해가 지났음을 실감했다. 이제는 잠을 자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는 일은 없지만, 문득 한밤중에 눈이 떠졌을 때 떠오르는 그 이름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날들이 늘었다. 불러버리면, 소년을 지탱해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소년을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방으로 끌어들일 것만 같았다. 그 방 한 편에서 조그맣게,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를 기대할 것만 같아서 소년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자라나는 키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소년이 그 이름을 내뱉어버린 밤이 찾아왔다. 레이첼. 레이첼. 부를수록 흩어져버리는 이름. 소년의 일상을 부수고 마음을 지지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게 만드는 이름. 그 이름이 소년을 산으로 이끌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

 








 

 산 중턱에서 소년은 걸음을 멈췄다. 꼭대기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세져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눈보라 사이로 희뿌연 입김이 섞여들었다. 지팡이를 짚은 손이 덜덜 떨린다. 얼굴과 상반신에 두른 몇 겹의 천만이 겨울의 산에서 소년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인 양 나부꼈다. 소년은 얇은 무명옷을 단단히 여미고 다시 발을 내딛었다. 


  정상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오두막에 두고 온 겨울용 신발이며 옷이 생각이 난다. 챙겨오면 좋았을 것을, 후회가 스치지만 소년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도 춥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산은 한 번도 너그러운 적이 없었다. 마을을 품고 솟아오른 산은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는 언제나 안개를 흩뿌리곤 했다. 소년은 그 마을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 동안 신발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되돌아갈 여유는 없다.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소년은 맨발로 걸었다. 레이첼이 보았더라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괜히 코끝이 아려서,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정상의 공기가 온 몸으로 파고든다. 아아, 한결 낫다. 서리가 맺힌 천을 풀어내는 동안 소년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다.

 

  - 이것도 가져가라고. 빌어먹을!

 

  낡은 천이 굽이치며 날아간다. 소년의 음성이 그 뒤를 따라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떨렸다가, 이름 없는 곡조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굶주린 갓난아이의 울음처럼 애절하게 겹을 쌓아가며 산을 울렸다. 소년은 목이 터져라 외친다. 멀리서 그에게 응답하는 메아리가 돌아온다. 에에에에이이이-. 소년은 다시금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쥐어짠다. 겨울잠을 청하던 새가 날아오르고 그 기세에 나무가 파르르 떨다 못해 온 산이 진동할 때까지. 레에에이이이-레에에이이체에-레에이이체에엘-.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듯이 무너진다. 쓰러지면서도 소년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레이첼, 레이첼. 맨발로 겨울의 산을 오르게 한 그 이름. 산이 가져간 이름이니, 산꼭대기에서 애타게 부르면 들려올 것만 같았다. , 소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6. 7. 27. 22:42




  단죄하는 천사. 내 이름은 캐서린 워드.

 


 


 

  남자는 죽어가고 있다. 방 모서리 천장에 달린 감시카메라의 렌즈가 남자의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반짝였다. 이제는 손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색한, 형체도 알 수 없는 덩어리를 내밀며 남자가 불분명한 발음을 내뱉었다. 살려줘. 모니터로 출력되는 그의 입모양을 보고 캐시는 웃었다. 아아, 아까워라.

 

  철창만이 유일한 출입구인 방 안에서 남자는 꽤나 오랫동안 버텼다. 캐시는 남자가 B3층에 도달했을 때부터, 그가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해왔다. 오래된 살점이 진득하게 눌러 붙은 의자에도 앉았고, 극약이 든 주사기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팔에 찔러 넣은 남자였다. 그 결과가 이렇게 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몸이라니. 방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저 남자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을까. 캐시는 웃음을 거두고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B3층에서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즐겁게 할 죄인은 남아 있지 않았다.

 

  드물게 B3층까지 올라오는 이들이 있었다. 다만 잭과 대니, 에디를 피해 올라올 만큼 어느 정도 신체적인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정신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여, 가스실에서 죽거나 캐시의 감옥 안에서 머무르는 쪽을 선택했다. 모니터 속의 남자는 꽤나 심지가 굳은 편이었지만, 함께 올라온 여자가 먼저 죽자 이틀을 견디지 못하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시한 결말이야. 캐시는 B4층으로 통하는 무전을 연결하고, 에디에게 남자의 이력서를 전송했다. 무덤이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캐시의 무료함도 그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 정말 참회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 거야?

 

  텅 빈 함정만이 가득한 B3층에 캐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상한 일이지만, 전면에 설치된 어떤 모니터에서도 반응이 없다. 손에 쥔 승마 채찍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B2층으로 무전을 연결한다. 웅장한 오르간 연주 소리. 이윽고 그레이 신부의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무슨 일인가, 캐시.

 

  - 신부님, 나 오늘 나가야겠어요.

 

  - 그 남자, 죽은 건가.

 

  - 그래요. 어차피 이 층에 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 거 아시잖아요.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순 없으니까, 나갔다 와야겠어요.

 

  - 고려해보도록 하지.

 

  캐시에게 있어, 언제가 될지 모르는 즐거움을 위해 언제까지나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레이 신부는 캐시의 방식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지만, 직접적으로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어딘가 소름이 돋는 것을 캐시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나는 단죄의 천사니까, 직접 움직일 수도 있는 거야. 그 말은 캐시 스스로에게 명분을 주고, 활력을 주었다. 그레이 신부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기에, 캐시는 겉옷을 챙기고 B3층의 엘리베이터 조작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바닥을 긁는 구두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그레이 신부는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별 말 없이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의 문을 열어주었다. 길게 펼쳐진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가는 동안, 캐시는 신부가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저 시선은 정말 끈질겨.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레이 신부는 캐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옅은 홍채 때문에 언뜻 보기에 백안으로 보이는 그 눈을 캐시는 똑바로 마주 보았고, 한참 후에 그레이 신부가 입을 열면서 그녀는 천사가 되는 길로 첫 발을 내딛었다.

 

  처음에는 호기심, 그 후에는 즐거우니까. 언젠가부터 일상이 되어버린 천사의 나날들. 비명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삶에 대한 집착으로 몸부림치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서 그레이 신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지금은? 미동도 하지 않는 모니터 속의 덩어리들과 부패하는 냄새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별다른 즐거움도 없이 온종일 모니터만을 바라보는 일은 캐시를 무료함의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었다.

 

  죄인들을 데려오는 건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을 접하는 대니가 주도했지만, 대부분은 캐시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처벌을 받았다. 대니가 선별한 죄인들은 약하고, 쉽게 괴로워하고, 얼마 못 가 죽었다. 좀 더 건강하고 튼튼한 죄인을 데려와. 언젠가 캐시가 던진 말에 대니는 실소하며 대답했다.

 

  - 그런 사람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네가 직접 데려오지 그래, 캐시?

 

  그 말은 캐시가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녀는 밤거리를 배회하며 적당한 장소에서 죄인을 물색한다. 적어도 자신의 층까지 도달할 만한, B6층에서 시작되는 건물의 규칙 안에서 살아남아 자신을 즐겁게 해줄 만한 인간을.

 

  웃옷 안쪽 주머니를 더듬어 주사기와 권총을 확인한 후, 캐시는 인적이 드문 거리를 향해 나아갔다. 목표를 정하면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장소까지 유인하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꼬리와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에 이끌려 그녀를 뒤따른 이들에게 망설임 없이 마취제를 투여하고 나면,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곤 했다. 대니를 부르거나, 취객을 부축하는 척 차를 타고 이동하여 건물 안으로 옮겼다.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를 하고 목표를 정하는 대니와는 달리, 그녀의 방식은 분명 즉흥적이고 위험이 따랐지만 죄인을 알아보는 눈만큼은 지금까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방식으로는 제대로 심판할 수 없어, 캐시.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지만 대니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러나 각 층의 관리자들은 서로의 방식에 간섭하지 않는다, 라는 절대적인 룰 앞에서 대니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설령 캐시의 예상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런 밤거리에서 마주하는 인간들이 백지처럼 새하얀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 때 그레이 신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캐시는 신부의 태도를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였다.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듯 허름한 술집 앞에서 캐시는 걸음을 멈췄다. 네온사인 간판의 일부는 등이 나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적당한 인간을 찾을 수 있을까. 그저 객기를 부릴 줄만 알고, 허약하기 짝이 없어 권총을 겨누는 순간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는 인간들을 적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캐시의 손은 닳아서 번들거리는 손잡이를 향했다.

 

  어차피 대부분의 죄인들은 B6층에서 잭에게 살해당하고, 그대로 B4층으로 옮겨진다. 아아, 살인마와 무덤지기만 좋은 세상이야. 캐시는 잭의 괴물 같은 회복력을 비롯한 신체 능력은 좋아하지만, 즉결심판과 같은 그 방식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끔 이런 귀여운 일탈을 저지를 수 있는 거지. 캐시는 가볍게 술집의 문을 밀었다.

 

  룰 위반. 그레이의 침묵 하에 자신처럼 성실한 간수에게 가끔씩 허락되는 일들. 오늘 그녀는 직접 B3층으로 인간을 데려가, 대니가 새로운 죄인을 데려오기 전까지 가능하면 오랫동안 천사로서의 일을 즐길 생각이었다. 한 층 한 층 번거롭게 올려 보내며 지켜볼 가치가 없는 인간들은, 천천히 깨닫게 해야 해. 쌓이고 쌓인 죄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는 그 순간을 마주해야 해. 하지만 캐시는 아직까지 진정으로 참회하는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

 

  술집 내부는 어둡고 지저분했다. 가게 안의 사람들의 검은 코트를 휘감은 캐시를 힐끗 바라보고, 이내 자신들의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느끼는 듯 음울한 음악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술에 잠겨 웅얼거리는 소리로 뭉개지고 있었다. 모니터로 지켜본 감옥 안의 이들과 무엇이 다를까. 술을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캐시는 흐물거리는 사람들을 살폈다.

 

  탈락. 가치 없음. 탈락.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음. 탈락, 바쁘게 움직이던 캐시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이는 세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보통 체격에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다. 그러나 일정한 속도로 술을 마시고,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품 한 번 하지 않는 그를 캐시는 숨을 죽이고 사냥감이 방심하기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바라보았다. 남자는 손을 들어 술을 더 시켰고, 짙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흐물거리는 덩어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남자. 캐시는 잠시 자리를 비우는 척, 남자가 앉은 테이블을 지나치며 그의 눈동자에 아직 초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

 

 



 

 

  그레이 신부는 캐시가 부축해온 남자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B3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장치를 조작했다. 캐시 또한 말을 아꼈다. 대니나 에디였다면 조금은 심각하게 따졌을 지도 모르지만, 그레이 신부는 관심을 가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무심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캐시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순간, 그레이 신부는 입을 열었다.

 

  - 너의 선택인 것을 알고 있겠지, 캐시.

 

  - 신부님, 무슨.

 

  문이 닫혔다. 캐시는 그레이 신부가 처음으로 무언의 동조를 깨트렸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너무 멀리 왔어. 낡은 기계들이 삐걱거리며 그녀와 남자를 B3층으로 데려다 주는 동안, 캐시는 신부의 말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래,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지. 천사가 된 것도, 내 안에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약기운이 가신 남자가 B3층의 입구에서 눈을 떴을 때, 캐시는 전원실의 의자에 앉아 승마 채찍을 쓰다듬고 있었다. 수면제의 농도를 조절하긴 했지만 남자는 예상보다 일찍 깨어났다. 건강하다는 건, 이럴 때 편리하구나. 캐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지 당황하던 남자가 마침내 굳게 잠긴 철창을 마구 흔들었다.

 

  - 뭐야, 여긴 어디야! 아무도 없어요?!

 

  붉은 입술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캐시는 마이크에 대고 아낌없이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고문의 길을 택하든, 사육되는 쪽을 택하든 남자는 캐시를 더욱 즐겁게 해줄 것이다. 기계를 조작해 철창을 열어주고, 남자가 선택의 기로에 서도록 이끈다. 간수의 인도에 따르는 죄수의 모습은 얼마나 어린 양처럼 처량한가. 캐시, 캐서린 워드는 언제나 사람들을 리드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녀의 가족들,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들도 어느새 자신의 목소리에 복종하듯 움직이곤 했다.

 

  평범한 가정 속에서 일원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무난한 부모와 가끔 그녀에게 대드는 친척들 사이에서, 캐시는 인간 사이의 우위를 체험했다.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둘러앉아 그 날의 이야기를 하거나 TV를 보다 잠드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캐시는 일찍 그들의 곁을 떠났다. 기숙학교에서 또래의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편이 훨씬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승마 채찍을 보기만 해도 바들바들 떨던 여자애-이름이 뭐였을까, 상관없지만-의 눈에 비친 자신은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웠던가.

 

  - 자아, 선택해. 나에게 보살핌을 받으면 오랫동안 귀여워해줄 수 있다구?

 

  모니터 너머에서 남자가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나 캐시는 남자가 곧 사육실로 들어올 것을 안다. 어쩌다 고문실에 들어가더라도, 전기의자와 관중들을 보는 순간 깨달을 것이다. 이 곳은 혼자서 버티기엔 너무 많은 장애물로 가득하다는 것을. 소리 없는 관중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공포를. 캐시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는 사육실의 철문을 열었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방 안에서 남자는 화를 내고, 흐느끼고, 애원하고, 저주를 퍼부었다가, 캐시의 자비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캐시는 모니터 너머에서 남자의 육체와 정신이 푸딩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스스로에게 약물을 주사할 무렵이 되었을 때, 캐시는 전원실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캐시는 늘 사육실은 새 구두가 더러워지니까 출입하고 싶지 않아, 라고 말했지만 이번만큼은 더러운 복도를 걸어볼 가치가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죄인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하품하고 있는 것보다는, 이제 곧 생명의 불빛이 꺼지는 죄인의 모습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과연, 어두운 방 안에서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캐시는 손전등으로 남자를 비췄다. 마치 젤리 같은걸. 시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빛의 온기를 느꼈는지 남자-혹은 형체가-캐시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 .

 

  - 후후, 아직 목소리를 낼 수 있나봐? 건강해서 좋은걸.

 

  하얗게 백탁이 온 눈동자가 천천히 캐시를 훑어 내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남자는 조금씩 몸을 흔든다. 벌어진 입에서 완성되지 못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캐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남자의 목소리는 끝을 알 수 없는 동굴 저편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기괴하게 흩어졌다. 자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캐시는 철문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남자의 몸은 이제 경련하듯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다.

 

  - 죽여.

 

  - 시시한걸. 그 말밖에 못하게 된 거야?

 

  - .

 

  완전히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캐시는 손전등을 껐다. 기왕이면 마지막 힘까지 짜내서 제대로 발악해주면 보기라도 좋을 텐데. 남자는 곧 죽을 것이다. 캐시는 구두에 묻은 살점들을 철창에 문질러 떼어냈다. 어두운 방 너머에서는 더 이상의 움직임이나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 또 끝이 나 버렸네. 캐시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녀는 무료함의 바다에 잠겨버린 듯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

 

 

 

 

 

 

  엘리베이터 개폐 장치의 경보가 작동했다. 캐시는 손을 뻗어 복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의 모니터 화면을 켰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화면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금발의 소녀와, 낫을 들고 있는 키 큰 남자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B3층에서 절대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아닌가. 잭이 담당 층을 이탈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기까지 올 줄이야. 무려 레이첼 가드너와 함께.

 


  캐시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해 줄 거야? 그녀의 시선은 맹렬한 기세로 낫을 휘둘러 문을 내리찍는 잭에게 고정되어 있다. 자아, 그럼 죄인을 맞이해 볼까. 초록색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한 기대감으로 일렁이고 있다. 부디,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해줘.

 


  어서 와, 참회의 시간이야. 나는 죄인들을 단죄하는 천사. 캐서린 워.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6. 7. 23. 23:21

시시하게, 반짝이는

 

 

 

 

  꿈을 꾸고 있는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잭은 무심결에 길게 뻗은 속눈썹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잭이 먼저 일어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잭은 아침에 일어나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고, 레이첼은 굳이 잭을 자극하거나 아침 식사를 독촉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기다릴 뿐이다. 다만 잭이 먼저 일어났을 때에는, 오랫동안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든 레이첼을 지켜보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다 문득 이 녀석 죽은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잭은 레이첼의 가느다란 팔을 쥐고 흔들었다. 안개가 낀 하늘처럼 몽롱한 푸른 눈이 자신을 향할 때까지, 마침내 작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가 돌아올 때까지.

 

  다만 오늘은 레이첼을 깨우기보다는, 흰 얼굴이나 긴 속눈썹, 가볍게 다물린 작은 입술을 지켜보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펼쳐진 금발을 쓰다듬으면 따뜻한 봄날의 햇볕을 쥔 듯이 부드럽게 손 안에서 흩어진다. 잭은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아직 솜털이 보송한 부드러운 뺨을, 금색의 옅은 눈썹을 만져보다가 마침내 속눈썹에 닿은 시선을 거두었다. 이렇게 평온한 얼굴이었던가. 이렇게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 같았던가. 고요한 수면이 있다면, 손을 넣어 휘젓거나 돌을 던져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잭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평온, 오랫동안 그들 사이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살의. 끝을 알 수 없는 저편에서 천천히 차오르는 이상한 앙금. 잭은 언제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순간을, 생에 대한 집착과 애원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마침내 죽음이 드리우는 순간을 잭은 사랑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들이다. 이 녀석은 어떤 얼굴을 할까. 잭은 피로 얼룩진 금발과 불이 꺼진 가로등처럼 빛을 잃은 푸른 눈동자를 상상한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라이터를 점화하듯, 잭이 시트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상상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하지 않은가. 조그마한 불꽃이 고개를 쳐들었다.

 

  근사한 얼굴로 죽어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혼잣말이 새어나온다. 잭으로서는 생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을 발휘해서 기다려 왔다. 레이첼은 가끔 웃기도 하고, 죽여 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잭이 손을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분명 그럴듯한 얼굴이지만 살의가 치솟을 때마다 잭의 안에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최고의 순간을 볼 수 있잖아, 아이작.

 

  그러나 오늘은 그 목소리가 잭의 손끝까지 울려퍼지고 있다. 오늘이야, 오늘이 아니면 레이첼 가드너를 죽이지 못 할 거야. 오늘이 바로 그 최고의 순간을 볼 수 있는 날이야. 잭은 눈을 감았다. 연료를 얻은 불꽃처럼 살의가 점점 번지고 있다. 그래서, 무엇으로 죽이지. 낫은 오래 전에 버렸고, 레이첼에게 준 나이프는 보호 시설에 두고 왔다. 밧줄? 잭은 그런 시시한 물건을 염두에 둔 적도 없다. 잭의 생각이 부엌 찬장의 무딘 식칼에 닿는다. 깔끔하게 죽이지는 못할 터였다. 새 나이프를 구해오더라도, 미처 손에 익기도 전에 쓰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은 건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도구, 두 손뿐이었다.

 

  마음먹으면 벽을 부술 수도 있고, 레이첼의 가느다란 목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꺾어버릴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다.

 

 

 

 

 

*

 

 

 

 

 

 

  - 오늘은 곤란해, .

 

  - 하아?

 

  접시를 눈앞에 두고, 레이첼은 정말로 곤란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죽일 거다, 라는 말을 듣고 레이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슬슬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조바심으로 잭이 식탁의 다리를 걷어차자, 마침내 돌아온 대답이 그러했다. 잭은 쥐고 있던 포크를 내동댕이쳤다. 빈 접시와 포크가 부딪쳐 요란하게 쨍그랑거리는 소리까지 잭의 짜증을 키우고 있었다.

 

  - 어제까지만 해도 죽여 달라고 귀찮게 하더니, 무슨 소리냐.

 

  이제 와서 레이첼의 마음이 변했다면, 죽이고 나서 과연 상상만큼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불안함이 엄습했다. 레이첼은 또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의 끝에는 접시 위에서 점점 말라가는 스파게티 면발이 있다. 잭 또한 포크를 기다리는 하나의 면발처럼 말라가는 인내심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곤란해. 레이첼의 대답은 여전히 의문스러웠고, 잭은 지금 당장이라도 식탁 너머로 손을 뻗고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잭의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아무런 걸림돌도 없이,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인내심, 자제력, 배려, 그런 미지근한 감정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잭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쥐어 짜내 되물었다.

 

  - 죽고 싶다면서, 오늘은 곤란한 건 뭔데.

 

  - 그건, 그러니까.

 

  - 빨리 말하라고. 기다리기 짜증나니까.

 

  레이첼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와도, 돌아올 결과는 같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고, 대답은 느리고, 길을 걸어가면 언제나 뒤에서 종종거리면서 쫓아오는 녀석이지만 처음부터 잭과 레이첼이 바라보는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을 테지만, 잭은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첼의 작은 입술이 주저하는 것을, 고르고 고른 끝에 결심한 것처럼 침잠하는 푸른 눈동자를.

 

  - 오늘은 잭의 생일이니까.

 

  - 그게 어쨌는데?

 

  - 적어도 축하해주고 싶어서.

 

  - 그럼 지금 하면 되는 거 아니냐.

 

  - 선물을 아직 못 찾아왔어.

 

  달력에 무수하게 인쇄된 까만 글씨들 중 하나가, 레이첼의 결심을 흐트러트리는 것이 잭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기 전에 신변을 정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유품 같은 거 받고 싶지 않다고. 잭이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첼은 이제 잭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첼이 그렇게 바라볼 때면, 마음 속에 들끓는 살의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서늘하게 죽어 버린다. 죽이고 또 죽이고 죽여 왔던 입장이었지, 죽는 입장은 아니었기에 잭은 그 시선을 어쩐지 똑바로 바라보기가 불편했다. 죽이고 싶은 걸 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지만, 레이첼이 그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풀 꺾여버린 살의는 시시하다.

 

  잭은 몸을 일으켰다. , 네 녀석 마음대로 하라고. 의자를 밀어 넣는 잭을 향해 레이첼이 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까지만, 참아 줘. 레이첼의 말은 잭의 발목을 붙들고 뱀처럼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고 있다.

 

  - 내 알바 아냐.

 

  - 잭의 생일에 내가 죽으면, 잭은 기뻐?

 

  - …….

 

  누군가의 생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의 생일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을. 다만 레이첼의 말에 실려 있는 약간의 기대를, 잭은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엄청 기분 좋겠지. 무슨 날이 되었든 간에. 그러나 잭은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

 


 

 

 

  문을 닫자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잭은 이렇게 더운 날에 태어난 거구나. 레이첼은 소파에 드러누워 미동도 하지 않는 잭을 바라보았다. 선물을 가져오기 위해 은신처의 문을 열고 나섰을 때, 잭은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는 잭에게 더없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레이첼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겠다며 눈을 빛내던 아침과는 달리, 오후가 되자 잭은 죽기 직전의 식물처럼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 다녀왔어, .

 

  소파 위로 붕대가 감긴 손이 솟아나와 흔들거렸다. 잭의 상의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고, 몇 개의 잔과 빈 물병들이 그 옆에 뒹굴고 있었다. 레이첼은 가방에서 표면에 물기가 맺힌 물병을 꺼내 잭의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잭이 몸을 일으켜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붕대로 감싼 목울대가 쉴 틈 없이 출렁거렸다.

 

  - , 괜찮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침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잭이 손을 내저었다. 시시해진 살의의 온도가 더없이 잭의 짜증을 불러오고 있었다. 아침에 저 목을 졸라버렸더라면, 지금쯤 더워서 미칠 것 같아도 기분은 좋았을지 모른다.

 

  - 더워서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지금은 말 걸지 마라.

 

  - 그럼, 시원해지면 괜찮아?

 

  - 그래.

 

  레이첼이 방으로 돌아가자, 잭은 다시 소파에 누웠다. 종일 흘린 땀으로 축축해진 가죽 소파는 더없이 불쾌했다. 온 몸이 끈적거리고 숨이 막힌다. 태양을 집어삼킨 것처럼 뜨거운 오후에 살의가 들끓을 리 만무했다. 잭은 이런 날에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가 진 이후에도 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잭은 저녁 식사를 마다하고 계속 누워 있었고, 마침내 밤이 되었을 무렵에야 몸을 일으켰다. 땀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짓물렀던 부분이 쓰라렸지만 적어도 오후의 지글거리는 기온을 견디는 것보다는 나았다. 새 붕대를 챙기고 욕실로 들어가며 잭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곗바늘은 10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샤워를 하고 제법 견딜 수 있게 되니 레이첼의 말이 다시 마음에 걸린다. 오늘만 아니라면, 열두 시가 되는 즉시 죽여 버려도 괜찮다는 건가. 잭은 새 붕대를 감은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레이첼은 잭의 말 이후로 말을 걸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잭은 방문 앞에 서서 레이첼을 불렀다.

 

  - , 레이. 나와 봐.

 

  레이첼이 몸을 내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푸른 눈을 마주한 채 잭은 남은 시간을 말해주었다. 이제 시간은 1130.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 줄 게 있어.

 

  직사각형의 상자에는 낡은 끈이 리본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받아줘. 레이첼의 말은 어딘가 맥이 빠졌지만, 잭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 안에서 뭔가 묵직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 뭐냐, 이건.

 

  - 생일 선물. 잭이 좋아할 것 같았어.

 

  -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남은 시간만이, 잭에게는 최대의 관심사였다. 끈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서늘하게 빛나는 나이프가잭의 눈에 들어왔다. 잭이 레이첼에게 건넸던 나이프와 흡사했지만, 녹슨 곳 없이 날이 예리하다. 이걸로,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잭은 말없이 상자 속의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 손으로 직접 죽일 텐데, 무슨 생각으로 이것을 가져왔을까. 나이프는 이제 시시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생일 축하해, .

 

  - …….

 

  잭은 상자 속의 나이프를 꺼내 손에 쥐었다. 역시나, 손에 익지 않은 새 것이라 전해오는 감촉이 그리 좋지 못했다. 레이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잭은 손 안에 쥔 나이프의 날이 그녀를 파고들어가는 상상을, 마침내 다 끝났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어쩐지, 잭의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얼굴을 찌푸린 잭을 향해 레이첼의 말이 이어졌다.

 

  - 이제 곧 열두 시야. 오늘은, 잭에게 특별한 날이 되었어?

 

  잭은 하루를 되짚었다. 아침에 눈을 뜬 그를 사로잡은 강렬한 살의와, 시시해져버린 감정들과, 온 몸을 태워버릴 듯이 엄습하던 더위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으로 다시 들떴던 밤과, 눈앞에 반짝이는 나이프와 푸른 눈을 보면서 어쩐지 속이 끓어오르는 하루를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레이첼에게 나이프를 맡겼을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이제 잭은 떠올릴 수 없다. 어쨌거나 반은 혼수 상태였으니까. 그 나이프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레이첼이었다. 그리고 이제, 레이첼이 건넨 나이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그 때처럼 강렬하게 잭을 사로잡을 수는 없을 거라는 예감이 뱃속에서부터 끓어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여도 되는 건가. 주저하게 되면 모든 것이 시시해진다. 잭은 지금 자신이 더없이 시시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 그런 거, 모른다고.

 

  - …….

 

  - 덥지, 짜증나지. 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 그 얼굴은 또 뭐냐. 웃어 보기라도 하란 말이다.

 

  - 웃으면 지금, 죽여 줄 거야?

 

  그 때 왜 곧바로 그래, 라고 대답하지 못했는지 잭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시간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생일 선물과 축하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살의가 이내 레이첼의 웃는 얼굴로 덮여 버리는 그 순간에 대해 잭은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가 지나 있었음에도, 새 나이프는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은 채 잭의 손에서 반짝거렸다.

 

- 시시하니까, 오늘은 넘어가자고.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6. 7. 5. 02:21

 개인의 온도

 

 


 

  비 때문이었다. 잭을 감싼 모든 천들이 흠뻑 젖어 온 몸을 짓눌렀다.

 

 

 

 




  이틀 전 은신처로 돌아온 잭이 후드를 벗어 던질 때부터, 레이첼은 오늘의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우산을 쓴 일이 없는 잭, 이슬비가 내려도 소나기가 내려도 거침없이 거리를 누비는 잭, 한 번도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기에 그저 축축한 붕대를 기분나빠하는 잭. 하지만 잭이 은신처를 뛰쳐나가 돌아올 때까지 폭우가 쏟아졌고, 행선지를 모르는 레이첼은 섣불리 우산을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비를 피하는 잭의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기에, 레이첼은 온종일 현관 근처에서 서성였다.

 

  레이첼의 예상대로 잭은 비를 잔뜩 맞고 돌아왔다. 마치 그가 비구름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온 몸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면서. 그리고 후드를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 감기 걸릴 거야. 잭은 그럴 리가 있겠냐, 라며 일축했지만 레이첼의 예상은 적중했다.

 

  제일 먼저 열이 끓어올랐다. 레이첼은 잭이 벗어둔 붕대를 잘라 깨끗하게 소독하고 물에 적셔 잭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 뭐야 이거. 축축하잖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조였지만, 잭은 이마에 손을 올릴 기운도 없는 듯 했다. 레이첼은 침대 아래로 흘러내리는 이불을 끌어당겨 잭에게 덮어주었다. 열에 시달린 탓에, 잭의 입술은 갈라지고 찢어져 작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사막의 바람처럼, 내쉬는 숨결이 뜨겁고 건조했다.

 

  - , 열이 심해.

 

  느릿하게 잭이 고개를 돌렸다. 레이첼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흐려진 두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렇게까지 번질 수 있는 황금빛이었을까. 이렇게까지 순해질 수 있는 검정이었던가. 잭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다물었다. 잭의 눈은 언제나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했기에, 레이첼은 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비켜, 라거나 신경 꺼, 정도겠지만.

 

  그러나 잭이 전에 없이 약해진 것은 사실. 은신처에 약이 있을 리가 만무했기에, 레이첼은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 , 나 약국에 다녀올게.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빗소리가 제일 먼저 들이닥쳤다. 잭이 비를 맞고 돌아왔던 날만큼이나 온 세상이 빗물에 젖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레이첼은 낡은 우산을 집어들었다. 이 빗속에서, 잭은 얼마나 오랫동안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돌아다녔을까. 바람이 불면서 빗줄기는 사선으로 바닥에 내리 꽂혔다. 기다려, . 다녀올게. 레이첼이 뒤를 돌아보았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잭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의 소리만큼이나, 두 팔이 위태롭게 떨렸다.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흐린 두 눈동자가 레이첼을 향했다.

 

  - , 기다려.

 

  - ,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레이첼은 우산을 펼쳤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우산에 가려진 레이첼의 뒷모습이 번지고, 문이 닫힌다. 조명이 깜박이는 은신처 안에 잭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불꽃이 넘실거린다. 잭은 방 한 켠에 서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주홍과 오렌지빛으로 타오르는 불꽃 한가운데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사그라드는 것을 본다. 처음에는 팔이었던가. 잭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그 날 피부를 타고 번지는 불꽃의 온도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왜 불이 났던 거지. 불이 난 이유만큼은 떠오르지 않아서, 잭은 붕대로 감은 팔을 재차 확인한다. 후드 안쪽에서 쓰린 통증이 그를 갉아먹는 것 같다.

 

  그래, 미치도록 아팠어. 잭은 불길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지켜본다.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가 타들어가고, 수분이 증발하면서 흉하게 일그러진다. 잭은 조금 뒤로 물러섰다. 이건 지겹도록 반복되는 꿈이다. 어렸던 잭이 불길 속에서 구출되었던 날부터, B6층을 혼자 지켰을 때에도 잠이 들 때마다 찾아오는 재수 없는 꿈. 도무지 이 꿈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잭은 등이 벽에 닿는 감촉을 느끼고 표정을 구겼다.

 

  왜 하필 지금일까. 잭의 생각은 비로소 거기까지 확장된다. 레이첼이 그의 눈앞에서 맨 손으로 불을 들어 올렸을 때, 무너지는 벽의 잔해들을 낫으로 치울 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잭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몸이 약해진 지금, 정신력도 영향을 받는 것을 잭은 모르고 있었다.

 

  잭은 꿈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불만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이런 꿈은 깨고 일어날 수 있을 터였다. 혹은 이쪽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닥치라고 소리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불을 꺼주지 않으니 스스로 기어서 나와야 한다고, 그렇게 도움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얼굴까지 타버린 것이 아니냐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 앞에서, 그가 해낼 수 있다고 다독이는 목소리도 없는 이 상황에서 잭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이 꿈은 언제나 같은 장면에서 끝이 난다. 어린 자신이 비로소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이미 흉하게 타버린 얼굴은 더 이상 울부짖지 않지만, 그 눈과 달싹거리는 입모양과 마주하고 있으면 잭은 자꾸만, 무언가 끓어오르다 못해 넘쳐버릴 것 같다. 혹은 이미 넘쳐서 얼굴을 감싼 붕대를 적시고 있거나.

 

  잭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뜨겁다. 그가 갇힌 꿈도, 흘러내리는 눈물도 모두 불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작은 발이, 타박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

 

 

 

 

 

 

  우산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참으로 지독하게, 비가 쏟아졌다. 레이첼은 흠뻑 젖은 옷의 물기를 쥐어짰다. 비에 젖다 못해 물이 들어찬 신발이 찌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은신처의 문을 열면서, 레이첼은 어쩌면 잭 다음에 앓아눕는 것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잭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간호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내 레이첼은 B1에서 시체가 누워 있던 소파에 자신을 눕혔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 것도 일종의 배려겠지만, 잠을 자면 낫는다고 주장하는 잭으로서는 자신처럼 약을 구해오진 않을 터였다.

 

  - 다녀왔어, .

 

  평범한 인사. 잭과 함께 지낸 이후로 레이첼은 은신처에 돌아오면 언제나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심하게 그래, 하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잭은 잠들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고, 제법 부산스럽게 레이첼이 움직이는 소리에도 잭은 조용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레이첼은 황급히 잭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마에 올려주었던 붕대는 침대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손끝으로 퍼지는 체온이 몹시 뜨겁다.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게도, 지하에서 잭이 쓰러졌던 때가 떠오른다. , 일어나. 약 먹어야 해. 레이첼은 조심스럽게 잭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붕대에 눅진하게 땀이 배어 있다.

 

  따뜻한 물이나 차를 많이 마시게 하세요. 레이첼은 약국에서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적어도 레이첼의 눈앞에서, 잭이 콜라 외에 물을 마신 기억은 없다. 물을 대체 무슨 맛으로 마셔? 잭은 진저리를 쳤었다. 레이첼은 포트에 물을 끓이고 은신처의 모든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는 게 기적인 이곳에서, 타이밍 좋게 차 티백을 발견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다시 비 오는 거리로 나가는 것에, 레이첼은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남은 돈으로도 싸구려 차 티백 정도는 살 수 있었으니까. 가게의 주인은 비에 젖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첼을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별 말 없이 진저레몬티를 계산해주었다. 포트의 물이 다 끓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어쩌면 정말로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몰라. 빗속을 달리면서 레이첼은 티백 상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빗길은 미끄럽고 질척거리는데다, 부츠 안으로 자꾸만 물이 들어왔다.

 

  포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레이첼은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컵에 티백을 담고 물을 부었다. 눅눅한 공기 사이로 알싸하고 달콤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 , 일어나.

 

  팔을 흔드는 기척 때문인지, 차의 향기 때문인지, 혹은 꿈의 마지막 장면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작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트가 축축하다. 잭은 억지로 몸을 뒤척였다. 온 몸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했다. 눈앞이 아찔하게 일그러졌다. 그 안에는 잭을 들여다보는 푸른 눈동자도 담겨 있었다. 끝났다. 이젠 더 이상 뜨겁지 않아. 잭은 천천히 시야가 뚜렷해지길 기다렸다.

 

  - 약 사왔어, . 차도 있어.

 

  - 기어이 나갔다 온 거냐.

 

  - , 괜찮아.

 

  진저레몬티는 별 말 없이 마셨지만, 한동안 잭과 레이첼은 약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잭이 말을 꺼낼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백기를 든 쪽은 기침을 시작한 잭 쪽이었고, 레이첼은 잭이 제대로 약을 삼키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냥 감기일 뿐이라고.

 

  - 하지만 잭이 아픈 건 싫어.

 

  - 이까짓 거, 아픈 것도 아니야. 레이 네녀석이야말로 빗물이나 닦으라고.

 

  오기를 부리면서도 잭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언제까지고 레이첼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눕지 않으면 레이첼은 계속해서 침대 가를 서성이며 그를 지켜볼 것이다. 잭은 손을 내저었다.

 

  - 그만 쳐다보고 가.

 

  잠시 동안, 푸른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시선에 담긴 걱정이 끈질기게 잭에게 달라붙어 있다. 이토록 질척하게 들러붙는 감정이라니, 잭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것을. 오직 그것만이 20여 년 간을 혼자서 지내왔던 잭이 아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반해 레이첼의 평범한 걱정과 배려는 어떤가. 새 붕대가 감긴 것처럼 잭의 마음을 까끌까끌하게 문지른다. 언젠가는 다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단하게 죄여 다시는 풀리지 않을 것처럼.

 

 

 

 

*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레이첼은 침대 가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비를 피할 천장이 있는 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뒤에서 잭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 자는 거야? 레이첼의 작은 목소리가 흩어진다.

 

  - 안 자.

 

  입을 열 때마다 쇳조각이 목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잭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낮고 비틀려 있었다. 레이첼은 다시 물에 적실 붕대를 찾았다. 됐어, 그런 거. 두리번거리는 레이첼의 시선에 찡그린 잭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말로, 괜찮다고.

 

  이상한 일이지. 어둡고 적막한 은신처에 레이첼과 함께 있으면, 잭은 더 이상 B6층의 시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보다 더 어둡고 불편한 장소임에도 이 정도면 괜찮아, 라는 생각이 불쑥 솟구친다. 레이첼. 레이첼의 생각은 알 길이 없다. 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레이첼이 손을 뻗는지, 감은 눈앞에 작고 까만 움직임이 느껴진다.

 

  - , 아직 뜨겁네.

 

  - 네녀석이 너무 차가운 거야.

 

  레이첼은 가만히 손을 내리고 자신의 이마를 잭의 이마에 대어 본다. 서늘하고 뜨거운 두 피부가 맞닿는다. 레이첼의 이마로 잭의 온도가, 잭의 이마로 레이첼의 온도가 옮겨 가는 이상한 순간. 개인의 온도가 뒤섞이는 아주 잠깐의 순간.

 

  감긴 눈을 천천히 뜨고, 잭이 중얼거렸다.

 

  - 시원하네.

 

  - 잭은 따뜻한걸.

 

  희미하게, 레이첼이 미소지었다. 잭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순간에 웃는 건 반칙이잖냐.

 

  근 이틀간 여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잠이 밀려온다. 이번에는 그 꿈을 꾸더라도, 어디선가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괜찮아, .

 

  천천히, 부드러운 천에 감싸인 듯 잭은 잠에 빠져들었다.

Posted by S.m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