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소유 -레이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욕실의 낡고 지저분한 거울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컸으므로. 레이첼은 가위를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낯선 색이 번지고 있었다. 길게 물결치는 금발의 끝에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검은 색의 의미를 레이첼은 너무나도 잘 안다. 이제는 숨길 수 없어. 가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리 염색으로 덧씌워도 자라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잭을 바라볼 때마다, 잭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함께 거리를 걸을 때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레이첼에게 점점 벅찬 일이 되어간다. 잭은 신경도 쓰지 않을 일들, 식사를 하다가 포크가 부딪히는 순간처럼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두고 그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가윗날을 거친 머리카락은 좀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물결치는 금빛 머리카락은 아름다웠지만, 끝이 들쑥날쑥하게 잘려 있었다. 레이첼은 거울을 보며 조금씩 가위를 움직였다. 잘려라. 잘려 나가라. 기도하듯 되뇌는 레이첼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카락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레이첼의 마음을 증명하듯 온통 검은색이다. 염색을 해도 이내 검게 물드는 머리카락을 감당할 수가 없어, 레이첼은 마침내 가위를 들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잭이 눈치 채지 않을까. 그녀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는 잭이라 해도 어쩌면, 언젠가는. 레이첼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한 마디가 다시 손을 움직이게 했다. 그 다음은? 잭이 눈치 챈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멈출 수 없는 불안함이 빠르게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맹세. 굳건한 맹세가 있지만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 맹세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도, 레이첼은 잘 알고 있었다.
- 야, 레이! 언제까지 그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건데! 문 부숴버린다!
문 너머에서 잭의 거친 목소리가 울린다. 레이첼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았다. 잠시만, 잭. 부수지마. 잔뜩 짜증이 났는지 연신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수납장 안에 가위를 숨기고, 머리카락 뭉치를 쓰레기통 안쪽 깊숙하게 넣어두고 나서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본다. 언제나처럼 잔잔한 표정의 소녀가 서 있다. 그러나 눈동자의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쿵쿵 울리는 맥박 때문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소녀도 서 있다. 레이첼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막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는지 하얀 붕대가 감긴 손이 보인다. 내려다보는 황금색과 검은 눈동자에 레이첼은 숨이 막힐 것 같다.
- 늦잖아! 뭐 하다 나오는 거야!
- …욕실에서 하는 일.
- 뭔 소리 하는 거야. 그보다 나가야 한다고.
눌러 쓴 후드 사이로 검은 머리칼이 보인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혹은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 들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레이첼의 마음을 짓눌렀다. 버려둔 염색약 통을 발견했을 때도 잭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 때 레이첼은 언제든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분전환이라거나, 지금의 머리색이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혀 끝에 물고 있었던 말들을 내려놓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때에, 잭은 무심하게 염색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결국 헛된 노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첼은 겉옷 안쪽으로 머리칼을 감추고 잭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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