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소유 – 잭
깨닫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욕실의 거울은 낡고 지저분했을 뿐더러, 잭은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보는 섬세한 일들에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으므로. 잭은 후드 사이로 번지는 낯선 색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아무렇게나 자란 검은 머리카락의 끝에 햇빛처럼 스며든 황금빛의 의미를 잭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 뭐야, 이건?
까맣고 푸석한 머리칼들 사이에서 숨길 수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한 가닥을 손에 쥐어 본다. 고요한 새벽의 정경에 번지는 햇빛처럼 눈 안으로 스며들 것만 같다. 잭은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혹은 아주 잠깐 스쳐갔던-사람들을 헤아려 본다. 이제는 이목구비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 그들 중 누구도 이런 머리카락을…, (잠시 간수 복장의 여성이 떠올랐지만 잭은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지워버렸다.) 염색하지 않고 가진 사람이 없었다. 아, 어쩌면, 그건가. 잭은 처음으로 언어를 습득한 사람처럼 혀끝으로 되뇌었다.
- 새, 새…씨발, 새, 새새끼 말고 새, 새…ㅊ…새츼? 새채?…새치! 그래, 새치! 뭐야, 그거구만.
스스로 정답을 찾아냈다는 즐거움도 잠시, 잭은 또다시 생각의 미로에 갇힌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새치가 왜 나는 거지? 그보다 이렇게 잔뜩 나는 건가? 밀려오는 의문들에 잭의 사고는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모르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리가 없다. 그럼 보다 똑똑한 녀석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생각에 잠긴 레이첼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발끝을 향하는 시선이나, 작은 코와 입, 창백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희미한 숨소리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이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뭐라도 알겠지.
어느 순간부터 레이첼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는 것쯤은, 잭도 눈치 채고 있었다. 함께 거리를 걸을 때에도,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에도 레이첼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하는 것처럼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포크가 부딪히기만 해도 서둘러 시선을 돌리는 레이첼의 사소한 변화에, 잭은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이렇게 레이첼의 행동들이 떠오를 때마다, 짜증이 날 정도로 옆구리가 뜨끔거린다.
한밤중에 깨어나 물을 마시다가도,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도 불쑥 엄습하는 통증. 잠들어 있는 레이첼을 내려다보거나, 단정한 옆모습을 바라보면 이내 잠잠해지곤 하는 따뜻하고 예민한 감각. 이제껏 염두에 두지 않았던 작고 가느다란 기억들이 잭의 신경을 갉아먹을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잭은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내던졌다.
- 그 녀석, 바느질이 특기라더니 제대로 꿰맨 것 맞냐고. 아직도 쑤시잖아.
욕실을 나서자 작고 낡은 패브릭 소파 위로 솟아오른 조그만 뒤통수가 보인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는 레이첼의 얼굴 위로 길고 가느다란 금발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푸르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가, 아주 조금 방향을 바꾼다. 아, 또다. 뭔가가 울컥하고 뱃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어느 날 발견한 이 머리카락처럼 반짝이고야 말 것 같다. 잭은 다시금 병인지 새치인지 모를 머리카락으로 관심을 옮긴다. 이것의 정체라도 알아야 불편한 속이 조금은 잠잠해질 것만 같았으므로.
- 야, 레이.
- …응?
- 이거, 새치냐?
- …….
레이첼의 푸른 눈동자에 금빛이 물결치는 것도, 조그만 입술이 서로를 껴안듯 맞물리는 것도,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는 잭에게 보일 리 없었다. 평소처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는 거겠지. 어쨌든 모르는 건 이 녀석이 대답해줄 테니까. 잭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 새치 아냐, 잭.
- 아? 그럼 뭔데? 병이냐?
- …그냥, 머리카락이야.
- 그건 나도 알아! 색깔이 다르잖냐!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 …….
- …너도 모르는 거냐?
다시, 침묵. 잭은 후드를 뒤집어썼다. 곤란하다는 듯이 움츠러든 눈썹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해답을 얻지 못하고 넘쳐흐르는 의문들이나, 솟구치는 짜증 때문에 빨라진 심장 박동보다도, 저런 표정이 더욱 속을 뒤집어 놓는다. …야, 옆으로 좀 가라. 레이첼이 만든 공간 위로 잭은 늘어지듯이 주저앉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자리가 따뜻하게 잭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뱃속이 여전히 뜨겁다. 옆구리가 따끔거린다. 시야에 금색이 끼어들어서 눈이 부셨다. 그 사이로 조용히 앉아 있는 레이첼의 옆모습이 보인다.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지 잔잔한 얼굴로 조그마한 입술을 가만히 들썩이고 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으면 뜨끔거리는 옆구리도 뱃속도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잭의 머릿속에 단어들이 떠올랐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어쩐지 혀 끝에 물고 오랫동안 굴려보고 싶은, 희미한 단어들을 붙잡으려 애쓰는 동안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왔다. 레이첼의 작은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할 무렵, 잭은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아, 모르겠다. 저 녀석은 알면서 왜 말을 못 하냐고. 이쪽은 몰라서 짜증나 죽겠구만. …됐다, 됐어. 나중에 생각나겠지. 나중에…….
…레이첼의 시선이 잭의 발끝에서 거실 바닥에 스며든 얼룩을 향한다. 몇 번을 힘주어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 내버려둔 채였다. 가끔 눈에 들어올 때마다 닦아내고 싶어지지만, 이제는 풍경의 일부로 남아버린 얼룩 같은 것이 레이첼에게도 존재했다. 점점 커지다 못해 부정은커녕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감정이. 그러나 잭에게는 존재할 리 없고, 있다고 해도 인지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진득하고 찬란한 감정들이 레이첼의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까. 때로 어떤 색깔은 누군가의 온기로 빚어져 이토록 따뜻하게 녹아내릴 수 있다고, 단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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