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야님 리퀘스트-잭X레이 AU
(주의-시대극, 잭과 레이첼의 나이 반전, 캐릭터 재해석)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마을에는 자주 안개가 서렸다. 오늘도 산신님이 연초를 태우는 모양이야. 사람들은 으레 그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소년은 고리타분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른 새벽 마당을 청소하다 보면 뺨에 와 닿는 거대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안개는 머리칼을 타고 내려와 얼굴을 감은 천을 간질이고, 종래에는 온 몸으로 퍼져 소년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이 빌어먹을 안개. 싸리비를 내동댕이치는 소년의 목소리에도 안개가 묻어났다.
투덜거리면서도 소년은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레이첼이 먼지를 마시지 않도록 마당을 쓸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소젖과 함께 약초를 달인다. 보다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레이첼은 아침에 일어나면 거르지 않고 그 물을 마셨다. 마침내 놋그릇을 다 비우고 나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마당으로 나와 노래하듯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목을 울리다가 천천히 뱃속의 힘을 끌어 모아 내보내는 소리는 조그마한 오두막을 뒤흔들고, 안개를 타고 뻗어나가 온 마을을 뒤흔들곤 했다. 한참을 그러다보면 마을을 품은 산이 아득한 목소리로 화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부뚜막에 걸터앉아 소년은 레이첼의 가냘픈 몸 안에 있을 공동을 상상한다. 소리는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움푹 꺼진 배를 매만진다. 아-아. 잔뜩 힘을 주어도 입에서 나오는 건 그저 목을 울리는 소리뿐. 인상을 찌푸리는 소년을 보고 레이첼이 작게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소년의 몸 구석구석을 짚어주며 소리가 나오는 요령을 설명해주지만, 이내 소년이 손을 뿌리치고 밥이나 먹어, 짧은 말을 내뱉고 돌아섰다.
조촐한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한창 자랄 시기인 소년의 손이 바쁜 데에 비해, 레이첼은 느긋하게 손을 놀린다. 먼저 젓가락을 놓은 소년이 멀거니 그 광경을 지켜본다. 해 다 넘어가겠네. 시선을 느꼈는지 레이첼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 잭, 더 먹을래?
- ···아니.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턱을 괴고 앉아 울타리 바깥을 내다보며 소년은 할 일을 헤아린다. 산에 가서 땔감도 주워야 하고, 레이첼이 먹을 약초며 나물도 캐야 한다. 찾아오는 이가 없으면 그저께 딴 열매를 다듬는 일도 할 요량이었으나, 소년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레이첼도 그것을 보았는지 천천히 손을 놓고 옷매를 가다듬었다.
- 레이 아기씨, 계신가요?
레이첼의 손님이다. 상을 물리며 소년은 찾아온 이의 행색을 살폈다. 나물이 든 바구니를 이고 온 아낙이었다. 그럼 그렇지. 마을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워서 돈 대신 나물이며 땔감 따위를 손에 들고 온다. 잭과 내가 굶는 일이 없으니, 괜찮아. 레이첼은 웃었지만, 소년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온전히 레이첼의 몫이기에, 소년은 군말 없이 오두막에 향을 피우고 레이첼의 목에 의료용 천을 감싸 준다. 아낙이 내심 불안한 얼굴을 하자 레이첼은 차를 권하며 차분하게 토닥였다. 곧 나을 거예요. 마을의 유일한 치료사가 하는 말에 아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약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방 한 편으로 물러선 소년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레이첼이 목을 가다듬었다. 맑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목을 울리고, 이내 폐에 모인 숨을 뱉으며 다시금 소리를 끌어올린다. 소년은 머릿속으로 레이첼의 몸속에 있을 작은 공동이 헐떡이는 광경이 그린다. 그 안에 있는 소리를 목의 힘만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낡고 어두운 오두막 안에 울려 펴지는 소리를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쩐지 뱃속이 뜨거워진다. 아낙도 그 기운을 느꼈는지 배를 움켜쥐었다. 에그머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하는 아낙의 귀로 점점 커져가는 레이첼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괜찮으니 소리를 내 보세요. 아낙이 떠듬떠듬 입을 놀린다. 어, 어, 아이고. 아, 아아-, 아-. 낮게 울리는 소리에 소년은 눈을 떴다.
기이하다. 몇 번을 보면서도 소년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레이첼의 목소리는 먹물 한 방울이 고인 물에 퍼지듯, 낮고 탁한 아낙의 목소리에 스며들었다. 두 소리는 한참을 뒤엉키며 씨름을 한다. 힘에 겨워 얼굴이 벌게진 아낙을 레이첼의 목소리가 어루만졌다. 병의 근원까지 다독여 가라앉힐 것처럼, 레이첼은 평온한 얼굴로 제 몸의 생명력을 담은 소리를 낸다. 뱃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에 소년은 귀를 곤두세웠다.
목소리는 생명의 근원을 담은 힘이다. 그 말에 깊이 매료된 레이첼의 조부는 연구 끝에 중국의 음공을 변형하여 소리로 사람들을 돕는 의술의 한 종류를 만들어냈다. 소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가며 이루어지는 의술. 대를 이어, 레이첼은 걸음마를 할 무렵부터 그것을 전수받았다. 서역인이었던 조부가 물려준 풍부한 성량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경외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소년이 그 치료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낫는 사람들을 보고 나니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 잭, 좋은 산나물을 받았어.
아낙이 돌아간 후,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레이첼이 웃어 보였다. 제 목숨 깎아먹고 받는 값이 고작 말린 나물이라니. 소년은 미간을 좁혔다.
- 왜 그래, 잭? 어디 아파?
- ······.
차라리 수도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산골에서 배앓이나 두통 따위를 고치고 있기엔 레이첼의 힘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수도의 온갖 부자들이 그녀를 본다면 금괴라도 내놓으며 애원을 할 텐데. 그럼 고작해야 나물이나 땔감 따위에 만족하며 사는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수도에 늘어선 화려한 저택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몸 여기저기를 짚는 레이첼의 손을 걷어냈다.
- 의원 놀이 할 시간에 목이나 간수하라고.
바구니를 낚아채는 소년에게 레이첼이 되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남 걱정할 시간에 몸이나 챙기면 좋을 것을. 이대로라면 레이첼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이 작은 산골에서 평생 돈도 안 되는 일만 하다가 일찍 죽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서 말을 할까,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다듬으며 소년은 한참동안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뒤로 소년이 몇 번이고 말을 꺼냈지만, 그때마다 레이첼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곳이 편해. 한결같은 대답에 소년은 울컥 올라오는 뒷말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그렇게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느냐고, 너도 네 아버지처럼 이 산골에서 썩어버릴 거냐고. 애꿎은 울타리를 걷어차는 날들만 늘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레이첼을 볼 때마다 아기씨, 아기씨 하면서 따르지만 그녀의 뒤에서 걸어가는 소년에게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곤 했다. 소년은 몇 년 전에 이 마을로 흘러 들어온 외지인이니까.
소년이 태어난 곳은 아주 작은 어촌으로,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새벽마다 물질을 하고 그물을 던져 하루를 버티는 곳이었다. 사람들에게서는 모두 짜고 매운 바다 냄새가 났다. 신발 하나도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오두막에서, 소년은 여섯 명의 형제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부모와 함께 살았다. 서로를 이불과 베개 삼아 몸을 웅크리고 지냈던 날들, 소년은 걸핏하면 손위형제들과 주먹다툼을 했다. 배를 띄우지 못하는 날에는 아홉 명이 단칸방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었다. 소년의 입담이 거친 것도, 매일 조각배에 의지해 바다로 향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 날의 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소년도 지금쯤 아버지를 따라 조각배에서 거친 그물을 맨손으로 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채기가 나도 눈물을 보일 겨를도 없이 그물을 끌어올려야 하는 날들, 퍼덕이는 물고기보다 생기 없는 얼굴로 손을 움직여야 하는 그런 삶 속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아버지는 더 나을 것도 없이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당연한 것처럼 아이들을 낳아 고함과 주먹질로 길러냈다. 가장 마지막에 태어난 소년의 기이한 눈동자 색을 확인했을 때부터, 그들의 삶은 더욱 척박한 길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 안에서 소년의 외모는 피할 수 없는 소외를 불러왔다. 소년의 한쪽 눈은 찬란한 황금색이었고, 사람들은 소년을 멀리했다. 유년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내야 했던 것도, 자신을 피하는 형제들과 주먹다툼을 벌였던 것도, 아버지가 집어던진 화로에 맞아 몸에 불이 붙었던 것도 모두 소년이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에서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버텨야 했다. 어디서든 불어오는 습기 어린 바람이 때때로 상처를 파고들어 진물로 흘러내렸다. 깨끗한 천이나 제대로 된 간호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방치되고, 걷어차이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약을 집어삼키고 온종일 구역질을 했다. 저 놈은 이제 쓸모가 없어. 겨우 살이 아물어갈 때 즈음, 벼락처럼 내리꽂힌 그 말이 죽은 듯이 누워만 있던 소년을 일으켰다.
어떻게 했더라. 소년은 치솟아 오르는 기억에 속이 뒤틀릴 것만 같다. 레이첼과 함께 지내며 점차 안정되었던 기억들은 불쑥,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소년을 덮치곤 했다. 그 때, 그 날에, 소년은 형제들이 작은 칼로 건조할 생선들을 다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비린내와 내장이 양철통 안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 그 속에서 간신히 숨을 쉬던 소년에게 상처에 소금을 비비듯이 그 말이 흩뿌려졌다.
분노이거나, 슬픔이거나, 겹겹이 쌓인 증오, 파랗게 빛나는 슬픔과 절망,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막막한 감정들이 소년의 안에서 거대한 덩어리로 자라났다. 그리고 소년의 옆에는 생선 내장 찌꺼기가 달라붙은 작은 칼이…있었다.
…정확하게, 찔렀을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기억의 비가 내린다. 비명 소리, 고함 소리, 누군가가 소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아팠…던가. 소년은 몸을 붙드는 수많은 손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뿌리치고 내달렸다. 낡은 문을 때려 부수고, 소금기로 가득해 숨이 턱턱 막히는 길을 달려 정박되어 있는 조각배를 탔다. 그 배는 소년의 아버지가 몇 십년간 바다를 누비던 배였다. 줄의 매듭을 푸는 법도, 묶는 법도 소년은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배웠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바다 한복판에서 구토하고 쓰러지고 비명을 지르기를 수차례, 소년은 마침내 깨달았다.
아무도 소년을 쫓아오지 않았다.
대신 견딜 수 없는 허기가 소년의 내장을 찔러왔다. 그 때 소년은 자유란 구역질이 나도록 배가 고프고, 온 몸이 쓰라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혼자서 떠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 배를 대었던 마을에서부터, 소년은 바다를 떠돌 때처럼 정처 없이 흘러 다녔다. 아무데서나 잘 수 있었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면 달려들었고, 쫓기기 전에 달아났다. 소년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자유를 만끽했다.
레이첼이 살고 있는 마을에 닿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소년이 누리던 자유가 점점 커져 칼날이 되었고, 내키는 대로 움직이던 소년의 발목을 찔렀다. 운이 나빴어. 과일 몇 가지를 집었을 뿐인데, 소년은 쫓기는 몸이 되었다. 피하려다가 또 누군가를 찔렀고, 한 때의 소동으로 끝날 일이 점점 커져 소년은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산 속의 작고 외딴 마을, 그곳은 소년이 한동안 머무를 곳으로 충분해 보였다.
산 속에 숨어 일주일 정도 지냈을까. 다시 우연이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술술 풀려나가 소년을 휘감았다. 레이첼은 필요한 약재를 구하러 산에 올랐고, 소년은 나무 위에서 중심을 잃었다. 커다란 새가 떨어진 줄 알았어. 정신을 잃은 소년이 깨어났을 때, 레이첼은 소년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소년은 자신이 깨끗한 이불과 푹신한 베개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달았다.
- 발목은 치료했지만…, 미안해. 피부는 아직 내 힘으로는…….
- …봤냐?
난생 처음 감아보는 깨끗한 천이었다. 낡았지만 향기로운 약초 냄새가 났다. 그러나 정갈하게 손질되어 빈틈없이 몸을 감싸고 있는 천의 감촉이 도리어 소년의 신경을 바늘처럼 뾰족하게 만들었다. 봤냐고!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목을 졸라버릴 생각이었는데, 고요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와 찬란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소년을 제지했다.
색목인. 소년은 수도에서 몇 번인가 색목인을 본 적이 있었지만, 안개에 꽁꽁 감춰져 있는 마을에서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소년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레이첼의 눈동자는 소년에게 푸른 바닷물의 기억을 불러왔다. 이런 촌구석에 색목인이라니, 자신보다 더 수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레이첼은 어떤 동요도 없이 소년의 말에 대답했다.
- 나는 레이첼. 이 마을의…치료사 같은 거야.
- …….
- 왜 나무 위에 있었어?
- …네 녀석이 알 바 아니잖아.
품을 더듬었지만 항상 가지고 다니던 칼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찾아? 레이첼이 바느질함 속에서 소년의 칼을 들어 보였다. 경계하던 소년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레이첼은 칼날을 쥐고 소년에게 칼을 돌려주었다. 무슨 속셈이야, 너. 소년의 물음에 레이첼은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물건이니까.
네 것. 그 말은 소년에게서 살기를 앗아갔다. 레이첼은 소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항상 깨끗한 천을 주고, 낡았지만 정갈한 옷을 주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가끔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밤에는 다시 잠들 수 있는 온기를 주었다. 소년의 마음에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안개처럼 흩어버렸다. 소년에게 이름을 준 사람도 레이첼이었다. 조부의 이름이지만, 그 울림이 좋아서 레이첼은 몇 번이고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때로는 아이작, 때로는 잭. 소년은 점차 그 이름에 익숙해졌다. 외진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이름은 매일 서로를 부르고 알아가고, 기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 사실, 아버지는 수도의 관리였어.
- 그럼 넌 왜 이 촌구석에 있는 건데.
- 높은 분…을 치료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었나봐.
- …….
- 그래서 여기로 왔어.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에서 함께 살았어.
각자의 이불에 누워 어색한 침묵을 맞이할 때면, 레이첼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양을 탐험하던 조부가 마침내 정착하게 된 경위나, 조부와 아버지가 수도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좌천된 이후로 이곳에 정착하면서 ‘치료사 어르신’으로 불리게 된 이야기까지, 짤막하지만 언제나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소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모든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언젠가 레이첼을 수도로 데려간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
남자는 두 명의 수행인과 함께 찾아왔다. 수도의 귀족 자제 중 한 명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더없이 정중하게 레이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년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적어도 귀족이라면 레이첼이 앞으로 지내는 데에 부족함 없이 사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때 레이첼을 말렸어야 했다. 소년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후회는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처럼 소년의 안에서 기억을 불태우고 마음을 지져놓았다. 그 남자의 병은 레이첼이 고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 어느 때보다 버거운 상대였다. 치료는 일주일에 걸쳐 계속되었고, 남자는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혼사를 앞둔 그는 미래의 부인에게 폐가 될 수 없다며 레이첼을 몰아붙였다. 그 정중한 말투가 점점 레이첼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 그 새끼 살리다가 네가 죽을 거야? 그만 둬, 내가 말하면 되잖아.
- …이제는 멈출 수가 없어, 잭.
- 왜 못 멈추는데?!
그 때 레이첼이 어떻게 웃었더라. 소년이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도 레이첼의 미소를 그려낼 수가 없다. 다만 레이첼의 말만이 소년의 머릿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 꽃을 피우고 후회와 슬픔의 열매를 맺었을 뿐. 화를 내는 소년에게 레이첼은 미안해, 미안해, 잭. 그 말만을 거듭했다. 무엇이 미안한 것일까. 왜 하필 자신에게 미안한 것일까. 소년은 차라리 화로를 뒤집어쓰고 싶었다. 하얗게 달아오른 숯이 피부를 지지며 타올랐던 것처럼, 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마음도 모두 불타 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개가 호흡에 스미듯, 오랫동안 그 마음은 소년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한 계절이 지나서야 남자의 병이 나았다. 남자는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네며 소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물을 건네고 돌아갔다. 남자의 보답 중에는 레이첼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씻지 못했던 오명을 회복해내겠다는 약조도 있었지만, 그 약조가 지켜졌는지 레이첼은 알지 못할 것이다. 쇠약해진 레이첼에게 겨울의 서릿발과 건조한 공기는 치명적이었고, 소년이 아무리 노력해도 꺼져가는 생명은 되살릴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그 새끼를 내쫓아버릴 걸 그랬어. 소년의 말에 레이첼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젠가는 올 일이었다. 대를 이어 레이첼이 했던 일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남들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건강해진 사람들의 몸속에 깃들어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치료사의 일이었으니까.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삶, 소년이 겪고 싶지 않은 일을 레이첼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왔다. 마지막으로 잭을 낫게 했다면 좋을 텐데. 레이첼의 말은 소년의 마음에 박힌 가시가 되어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언저리를 찔러왔다.
겨울임에도 드물게 눈이 내리지 않았던 날에, 소년은 레이첼을 산에 묻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소년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얼어붙은 땅을 팠다. 나무 관 위로 흙을 뿌릴 때 마침내 소년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관이 썩고 레이첼의 하얀 피부는 흙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 위에 자라날 꽃과 풀과 나무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를 입에 넣을 사람을 상상하면, 소년은 속이 뒤집어져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을 때처럼, 속이 쓰리고 구역질이 나고 아무도 없는 날들의 무게를 버텨야 하는 날들이 찾아왔다. 배에 손을 올리면 그대로 몸을 통과해버릴 것 같은 공동이 소년의 몸 안에서 자라난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것을. 소년은 레이첼이 살았던 날들처럼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불을 지피고 자잘한 일들을 하며 매일 눈을 뜨고 감았다. 소년을 살피러 찾아온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년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다 이내 돌아갔다. 그러는 중에도 공동이 점점 커져 소년은 그 안으로 자꾸만, 자꾸만 삼켜질 것 같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리 매일을 채워 넣어도 메워지지 않는 공동과, 문득 고개를 들면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소년은 그저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직 그 방법만이, 소년을 견디게 했다.
숟가락을 한 벌 더 놓는 일이 줄어들었을 때, 소년은 다시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이 소년의 키는 한 뼘도 넘게 자랐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넣어두면서, 소년은 비로소 한 해가 지났음을 실감했다. 이제는 잠을 자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는 일은 없지만, 문득 한밤중에 눈이 떠졌을 때 떠오르는 그 이름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날들이 늘었다. 불러버리면, 소년을 지탱해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소년을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방으로 끌어들일 것만 같았다. 그 방 한 편에서 조그맣게,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를 기대할 것만 같아서 소년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자라나는 키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소년이 그 이름을 내뱉어버린 밤이 찾아왔다. 레이첼. 레이첼. 부를수록 흩어져버리는 이름. 소년의 일상을 부수고 마음을 지지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게 만드는 이름. 그 이름이 소년을 산으로 이끌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
산 중턱에서 소년은 걸음을 멈췄다. 꼭대기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세져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눈보라 사이로 희뿌연 입김이 섞여들었다. 지팡이를 짚은 손이 덜덜 떨린다. 얼굴과 상반신에 두른 몇 겹의 천만이 겨울의 산에서 소년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인 양 나부꼈다. 소년은 얇은 무명옷을 단단히 여미고 다시 발을 내딛었다.
정상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오두막에 두고 온 겨울용 신발이며 옷이 생각이 난다. 챙겨오면 좋았을 것을, 후회가 스치지만 소년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도 춥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산은 한 번도 너그러운 적이 없었다. 마을을 품고 솟아오른 산은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는 언제나 안개를 흩뿌리곤 했다. 소년은 그 마을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 동안 신발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되돌아갈 여유는 없다.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소년은 맨발로 걸었다. 레이첼이 보았더라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괜히 코끝이 아려서,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정상의 공기가 온 몸으로 파고든다. 아아, 한결 낫다. 서리가 맺힌 천을 풀어내는 동안 소년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다.
- 이것도 가져가라고. 빌어먹을!
낡은 천이 굽이치며 날아간다. 소년의 음성이 그 뒤를 따라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떨렸다가, 이름 없는 곡조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굶주린 갓난아이의 울음처럼 애절하게 겹을 쌓아가며 산을 울렸다. 소년은 목이 터져라 외친다. 멀리서 그에게 응답하는 메아리가 돌아온다. 에에에에이이이-. 소년은 다시금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쥐어짠다. 겨울잠을 청하던 새가 날아오르고 그 기세에 나무가 파르르 떨다 못해 온 산이 진동할 때까지. 레에에이이이-레에에이이체에-레에이이체에엘-.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듯이 무너진다. 쓰러지면서도 소년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레이첼, 레이첼. 맨발로 겨울의 산을 오르게 한 그 이름. 산이 가져간 이름이니, 산꼭대기에서 애타게 부르면 들려올 것만 같았다. …잭, 소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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