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하게, 반짝이는
꿈을 꾸고 있는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잭은 무심결에 길게 뻗은 속눈썹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잭이 먼저 일어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잭은 아침에 일어나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고, 레이첼은 굳이 잭을 자극하거나 아침 식사를 독촉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기다릴 뿐이다. 다만 잭이 먼저 일어났을 때에는, 오랫동안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든 레이첼을 지켜보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다 문득 이 녀석 죽은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잭은 레이첼의 가느다란 팔을 쥐고 흔들었다. 안개가 낀 하늘처럼 몽롱한 푸른 눈이 자신을 향할 때까지, 마침내 작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가 돌아올 때까지.
다만 오늘은 레이첼을 깨우기보다는, 흰 얼굴이나 긴 속눈썹, 가볍게 다물린 작은 입술을 지켜보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펼쳐진 금발을 쓰다듬으면 따뜻한 봄날의 햇볕을 쥔 듯이 부드럽게 손 안에서 흩어진다. 잭은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아직 솜털이 보송한 부드러운 뺨을, 금색의 옅은 눈썹을 만져보다가 마침내 속눈썹에 닿은 시선을 거두었다. 이렇게 평온한 얼굴이었던가. 이렇게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 같았던가. 고요한 수면이 있다면, 손을 넣어 휘젓거나 돌을 던져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잭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평온, 오랫동안 그들 사이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살의. 끝을 알 수 없는 저편에서 천천히 차오르는 이상한 앙금. 잭은 언제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순간을, 생에 대한 집착과 애원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마침내 죽음이 드리우는 순간을 잭은 사랑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들이다. 이 녀석은 어떤 얼굴을 할까. 잭은 피로 얼룩진 금발과 불이 꺼진 가로등처럼 빛을 잃은 푸른 눈동자를 상상한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라이터를 점화하듯, 잭이 시트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상상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하지 않은가. 조그마한 불꽃이 고개를 쳐들었다.
근사한 얼굴로 죽어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혼잣말이 새어나온다. 잭으로서는 생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을 발휘해서 기다려 왔다. 레이첼은 가끔 웃기도 하고, 죽여 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잭이 손을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분명 그럴듯한 얼굴이지만 살의가 치솟을 때마다 잭의 안에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최고의 순간을 볼 수 있잖아, 아이작.
그러나 오늘은 그 목소리가 잭의 손끝까지 울려퍼지고 있다. 오늘이야, 오늘이 아니면 레이첼 가드너를 죽이지 못 할 거야. 오늘이 바로 그 최고의 순간을 볼 수 있는 날이야. 잭은 눈을 감았다. 연료를 얻은 불꽃처럼 살의가 점점 번지고 있다. 그래서, 무엇으로 죽이지. 낫은 오래 전에 버렸고, 레이첼에게 준 나이프는 보호 시설에 두고 왔다. 밧줄? 잭은 그런 시시한 물건을 염두에 둔 적도 없다. 잭의 생각이 부엌 찬장의 무딘 식칼에 닿는다. 깔끔하게 죽이지는 못할 터였다. 새 나이프를 구해오더라도, 미처 손에 익기도 전에 쓰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은 건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도구, 두 손뿐이었다.
마음먹으면 벽을 부술 수도 있고, 레이첼의 가느다란 목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꺾어버릴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다.
*
- 오늘은 곤란해, 잭.
- …하아?
접시를 눈앞에 두고, 레이첼은 정말로 곤란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죽일 거다, 라는 말을 듣고 레이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슬슬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조바심으로 잭이 식탁의 다리를 걷어차자, 마침내 돌아온 대답이 그러했다. 잭은 쥐고 있던 포크를 내동댕이쳤다. 빈 접시와 포크가 부딪쳐 요란하게 쨍그랑거리는 소리까지 잭의 짜증을 키우고 있었다.
- 어제까지만 해도 죽여 달라고 귀찮게 하더니, 무슨 소리냐.
이제 와서 레이첼의 마음이 변했다면, 죽이고 나서 과연 상상만큼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불안함이 엄습했다. 레이첼은 또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의 끝에는 접시 위에서 점점 말라가는 스파게티 면발이 있다. 잭 또한 포크를 기다리는 하나의 면발처럼 말라가는 인내심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곤란해. 레이첼의 대답은 여전히 의문스러웠고, 잭은 지금 당장이라도 식탁 너머로 손을 뻗고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잭의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아무런 걸림돌도 없이,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인내심, 자제력, 배려, 그런 미지근한 감정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잭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쥐어 짜내 되물었다.
- 죽고 싶다면서, 오늘은 곤란한 건 뭔데.
- 그건, 그러니까….
- …빨리 말하라고. 기다리기 짜증나니까.
레이첼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와도, 돌아올 결과는 같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고, 대답은 느리고, 길을 걸어가면 언제나 뒤에서 종종거리면서 쫓아오는 녀석이지만 처음부터 잭과 레이첼이 바라보는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을 테지만, 잭은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첼의 작은 입술이 주저하는 것을, 고르고 고른 끝에 결심한 것처럼 침잠하는 푸른 눈동자를.
- 오늘은 잭의 생일이니까.
- 그게 어쨌는데?
- 적어도 축하해주고 싶어서.
- …그럼 지금 하면 되는 거 아니냐.
- 선물을 아직 못 찾아왔어.
달력에 무수하게 인쇄된 까만 글씨들 중 하나가, 레이첼의 결심을 흐트러트리는 것이 잭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기 전에 신변을 정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유품 같은 거 받고 싶지 않다고. 잭이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첼은 이제 잭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첼이 그렇게 바라볼 때면, 마음 속에 들끓는 살의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서늘하게 죽어 버린다. 죽이고 또 죽이고 죽여 왔던 입장이었지, 죽는 입장은 아니었기에 잭은 그 시선을 어쩐지 똑바로 바라보기가 불편했다. 죽이고 싶은 걸 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지만, 레이첼이 그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풀 꺾여버린 살의는 시시하다.
잭은 몸을 일으켰다. 아, 네 녀석 마음대로 하라고. 의자를 밀어 넣는 잭을 향해 레이첼이 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까지만, 참아 줘. 레이첼의 말은 잭의 발목을 붙들고 뱀처럼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고 있다.
- 내 알바 아냐.
- 잭의 생일에 내가 죽으면…, 잭은 기뻐?
- …….
누군가의 생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의 생일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을. 다만 레이첼의 말에 실려 있는 약간의 기대를, 잭은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엄청 기분 좋겠지. 무슨 날이 되었든 간에. 그러나 잭은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
문을 닫자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잭은 이렇게 더운 날에 태어난 거구나. 레이첼은 소파에 드러누워 미동도 하지 않는 잭을 바라보았다. 선물을 가져오기 위해 은신처의 문을 열고 나섰을 때, 잭은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는 잭에게 더없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레이첼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겠다며 눈을 빛내던 아침과는 달리, 오후가 되자 잭은 죽기 직전의 식물처럼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 다녀왔어, 잭.
소파 위로 붕대가 감긴 손이 솟아나와 흔들거렸다. 잭의 상의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고, 몇 개의 잔과 빈 물병들이 그 옆에 뒹굴고 있었다. 레이첼은 가방에서 표면에 물기가 맺힌 물병을 꺼내 잭의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잭이 몸을 일으켜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붕대로 감싼 목울대가 쉴 틈 없이 출렁거렸다.
- 잭, 괜찮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침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잭이 손을 내저었다. 시시해진 살의의 온도가 더없이 잭의 짜증을 불러오고 있었다. 아침에 저 목을 졸라버렸더라면, 지금쯤 더워서 미칠 것 같아도 기분은 좋았을지 모른다.
- 더워서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지금은 말 걸지 마라.
- 그럼, 시원해지면 괜찮아?
- …그래.
레이첼이 방으로 돌아가자, 잭은 다시 소파에 누웠다. 종일 흘린 땀으로 축축해진 가죽 소파는 더없이 불쾌했다. 온 몸이 끈적거리고 숨이 막힌다. 태양을 집어삼킨 것처럼 뜨거운 오후에 살의가 들끓을 리 만무했다. 잭은 이런 날에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가 진 이후에도 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잭은 저녁 식사를 마다하고 계속 누워 있었고, 마침내 밤이 되었을 무렵에야 몸을 일으켰다. 땀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짓물렀던 부분이 쓰라렸지만 적어도 오후의 지글거리는 기온을 견디는 것보다는 나았다. 새 붕대를 챙기고 욕실로 들어가며 잭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곗바늘은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샤워를 하고 제법 견딜 수 있게 되니 레이첼의 말이 다시 마음에 걸린다. 오늘만 아니라면, 열두 시가 되는 즉시 죽여 버려도 괜찮다는 건가. 잭은 새 붕대를 감은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레이첼은 잭의 말 이후로 말을 걸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잭은 방문 앞에 서서 레이첼을 불렀다.
- 야, 레이. 나와 봐.
레이첼이 몸을 내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푸른 눈을 마주한 채 잭은 남은 시간을 말해주었다. 이제 시간은 11시 30분.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잭, 줄 게 있어.
직사각형의 상자에는 낡은 끈이 리본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받아줘. 레이첼의 말은 어딘가 맥이 빠졌지만, 잭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 안에서 뭔가 묵직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 뭐냐, 이건.
- 생일 선물. 잭이 좋아할 것 같았어.
-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남은 시간만이, 잭에게는 최대의 관심사였다. 끈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서늘하게 빛나는 나이프가잭의 눈에 들어왔다. 잭이 레이첼에게 건넸던 나이프와 흡사했지만, 녹슨 곳 없이 날이 예리하다. 이걸로,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잭은 말없이 상자 속의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 손으로 직접 죽일 텐데, 무슨 생각으로 이것을 가져왔을까. 나이프는 이제 시시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생일 축하해, 잭.
- …….
잭은 상자 속의 나이프를 꺼내 손에 쥐었다. 역시나, 손에 익지 않은 새 것이라 전해오는 감촉이 그리 좋지 못했다. 레이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잭은 손 안에 쥔 나이프의 날이 그녀를 파고들어가는 상상을, 마침내 다 끝났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어쩐지…, 잭의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얼굴을 찌푸린 잭을 향해 레이첼의 말이 이어졌다.
- 이제 곧 열두 시야. 오늘은, 잭에게 특별한 날이 되었어?
잭은 하루를 되짚었다. 아침에 눈을 뜬 그를 사로잡은 강렬한 살의와, 시시해져버린 감정들과, 온 몸을 태워버릴 듯이 엄습하던 더위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으로 다시 들떴던 밤과, 눈앞에 반짝이는 나이프와 푸른 눈을 보면서 어쩐지 속이 끓어오르는 하루를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레이첼에게 나이프를 맡겼을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이제 잭은 떠올릴 수 없다. 어쨌거나 반은 혼수 상태였으니까. 그 나이프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레이첼이었다. 그리고 이제, 레이첼이 건넨 나이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그 때처럼 강렬하게 잭을 사로잡을 수는 없을 거라는 예감이 뱃속에서부터 끓어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여도 되는 건가. 주저하게 되면 모든 것이 시시해진다. 잭은 지금 자신이 더없이 시시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 그런 거, 모른다고.
- …….
- 덥지, 짜증나지. 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 그 얼굴은 또 뭐냐. 웃어 보기라도 하란 말이다.
- 웃으면 지금, 죽여 줄 거야?
그 때 왜 곧바로 그래, 라고 대답하지 못했는지 잭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시간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생일 선물과 축하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살의가 이내 레이첼의 웃는 얼굴로 덮여 버리는 그 순간에 대해 잭은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가 지나 있었음에도, 새 나이프는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은 채 잭의 손에서 반짝거렸다.
- 시시하니까, 오늘은 넘어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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