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of Death2016. 7. 5. 02:21

 개인의 온도

 

 


 

  비 때문이었다. 잭을 감싼 모든 천들이 흠뻑 젖어 온 몸을 짓눌렀다.

 

 

 

 




  이틀 전 은신처로 돌아온 잭이 후드를 벗어 던질 때부터, 레이첼은 오늘의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우산을 쓴 일이 없는 잭, 이슬비가 내려도 소나기가 내려도 거침없이 거리를 누비는 잭, 한 번도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기에 그저 축축한 붕대를 기분나빠하는 잭. 하지만 잭이 은신처를 뛰쳐나가 돌아올 때까지 폭우가 쏟아졌고, 행선지를 모르는 레이첼은 섣불리 우산을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비를 피하는 잭의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기에, 레이첼은 온종일 현관 근처에서 서성였다.

 

  레이첼의 예상대로 잭은 비를 잔뜩 맞고 돌아왔다. 마치 그가 비구름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온 몸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면서. 그리고 후드를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 감기 걸릴 거야. 잭은 그럴 리가 있겠냐, 라며 일축했지만 레이첼의 예상은 적중했다.

 

  제일 먼저 열이 끓어올랐다. 레이첼은 잭이 벗어둔 붕대를 잘라 깨끗하게 소독하고 물에 적셔 잭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 뭐야 이거. 축축하잖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조였지만, 잭은 이마에 손을 올릴 기운도 없는 듯 했다. 레이첼은 침대 아래로 흘러내리는 이불을 끌어당겨 잭에게 덮어주었다. 열에 시달린 탓에, 잭의 입술은 갈라지고 찢어져 작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사막의 바람처럼, 내쉬는 숨결이 뜨겁고 건조했다.

 

  - , 열이 심해.

 

  느릿하게 잭이 고개를 돌렸다. 레이첼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흐려진 두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렇게까지 번질 수 있는 황금빛이었을까. 이렇게까지 순해질 수 있는 검정이었던가. 잭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다물었다. 잭의 눈은 언제나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했기에, 레이첼은 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비켜, 라거나 신경 꺼, 정도겠지만.

 

  그러나 잭이 전에 없이 약해진 것은 사실. 은신처에 약이 있을 리가 만무했기에, 레이첼은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 , 나 약국에 다녀올게.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빗소리가 제일 먼저 들이닥쳤다. 잭이 비를 맞고 돌아왔던 날만큼이나 온 세상이 빗물에 젖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레이첼은 낡은 우산을 집어들었다. 이 빗속에서, 잭은 얼마나 오랫동안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돌아다녔을까. 바람이 불면서 빗줄기는 사선으로 바닥에 내리 꽂혔다. 기다려, . 다녀올게. 레이첼이 뒤를 돌아보았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잭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의 소리만큼이나, 두 팔이 위태롭게 떨렸다.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흐린 두 눈동자가 레이첼을 향했다.

 

  - , 기다려.

 

  - ,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레이첼은 우산을 펼쳤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우산에 가려진 레이첼의 뒷모습이 번지고, 문이 닫힌다. 조명이 깜박이는 은신처 안에 잭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불꽃이 넘실거린다. 잭은 방 한 켠에 서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주홍과 오렌지빛으로 타오르는 불꽃 한가운데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사그라드는 것을 본다. 처음에는 팔이었던가. 잭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그 날 피부를 타고 번지는 불꽃의 온도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왜 불이 났던 거지. 불이 난 이유만큼은 떠오르지 않아서, 잭은 붕대로 감은 팔을 재차 확인한다. 후드 안쪽에서 쓰린 통증이 그를 갉아먹는 것 같다.

 

  그래, 미치도록 아팠어. 잭은 불길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지켜본다.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가 타들어가고, 수분이 증발하면서 흉하게 일그러진다. 잭은 조금 뒤로 물러섰다. 이건 지겹도록 반복되는 꿈이다. 어렸던 잭이 불길 속에서 구출되었던 날부터, B6층을 혼자 지켰을 때에도 잠이 들 때마다 찾아오는 재수 없는 꿈. 도무지 이 꿈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잭은 등이 벽에 닿는 감촉을 느끼고 표정을 구겼다.

 

  왜 하필 지금일까. 잭의 생각은 비로소 거기까지 확장된다. 레이첼이 그의 눈앞에서 맨 손으로 불을 들어 올렸을 때, 무너지는 벽의 잔해들을 낫으로 치울 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잭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몸이 약해진 지금, 정신력도 영향을 받는 것을 잭은 모르고 있었다.

 

  잭은 꿈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불만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이런 꿈은 깨고 일어날 수 있을 터였다. 혹은 이쪽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닥치라고 소리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불을 꺼주지 않으니 스스로 기어서 나와야 한다고, 그렇게 도움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얼굴까지 타버린 것이 아니냐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 앞에서, 그가 해낼 수 있다고 다독이는 목소리도 없는 이 상황에서 잭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이 꿈은 언제나 같은 장면에서 끝이 난다. 어린 자신이 비로소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이미 흉하게 타버린 얼굴은 더 이상 울부짖지 않지만, 그 눈과 달싹거리는 입모양과 마주하고 있으면 잭은 자꾸만, 무언가 끓어오르다 못해 넘쳐버릴 것 같다. 혹은 이미 넘쳐서 얼굴을 감싼 붕대를 적시고 있거나.

 

  잭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뜨겁다. 그가 갇힌 꿈도, 흘러내리는 눈물도 모두 불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작은 발이, 타박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

 

 

 

 

 

 

  우산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참으로 지독하게, 비가 쏟아졌다. 레이첼은 흠뻑 젖은 옷의 물기를 쥐어짰다. 비에 젖다 못해 물이 들어찬 신발이 찌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은신처의 문을 열면서, 레이첼은 어쩌면 잭 다음에 앓아눕는 것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잭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간호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내 레이첼은 B1에서 시체가 누워 있던 소파에 자신을 눕혔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 것도 일종의 배려겠지만, 잠을 자면 낫는다고 주장하는 잭으로서는 자신처럼 약을 구해오진 않을 터였다.

 

  - 다녀왔어, .

 

  평범한 인사. 잭과 함께 지낸 이후로 레이첼은 은신처에 돌아오면 언제나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심하게 그래, 하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잭은 잠들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고, 제법 부산스럽게 레이첼이 움직이는 소리에도 잭은 조용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레이첼은 황급히 잭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마에 올려주었던 붕대는 침대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손끝으로 퍼지는 체온이 몹시 뜨겁다.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게도, 지하에서 잭이 쓰러졌던 때가 떠오른다. , 일어나. 약 먹어야 해. 레이첼은 조심스럽게 잭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붕대에 눅진하게 땀이 배어 있다.

 

  따뜻한 물이나 차를 많이 마시게 하세요. 레이첼은 약국에서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적어도 레이첼의 눈앞에서, 잭이 콜라 외에 물을 마신 기억은 없다. 물을 대체 무슨 맛으로 마셔? 잭은 진저리를 쳤었다. 레이첼은 포트에 물을 끓이고 은신처의 모든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는 게 기적인 이곳에서, 타이밍 좋게 차 티백을 발견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다시 비 오는 거리로 나가는 것에, 레이첼은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남은 돈으로도 싸구려 차 티백 정도는 살 수 있었으니까. 가게의 주인은 비에 젖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첼을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별 말 없이 진저레몬티를 계산해주었다. 포트의 물이 다 끓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어쩌면 정말로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몰라. 빗속을 달리면서 레이첼은 티백 상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빗길은 미끄럽고 질척거리는데다, 부츠 안으로 자꾸만 물이 들어왔다.

 

  포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레이첼은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컵에 티백을 담고 물을 부었다. 눅눅한 공기 사이로 알싸하고 달콤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 , 일어나.

 

  팔을 흔드는 기척 때문인지, 차의 향기 때문인지, 혹은 꿈의 마지막 장면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작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트가 축축하다. 잭은 억지로 몸을 뒤척였다. 온 몸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했다. 눈앞이 아찔하게 일그러졌다. 그 안에는 잭을 들여다보는 푸른 눈동자도 담겨 있었다. 끝났다. 이젠 더 이상 뜨겁지 않아. 잭은 천천히 시야가 뚜렷해지길 기다렸다.

 

  - 약 사왔어, . 차도 있어.

 

  - 기어이 나갔다 온 거냐.

 

  - , 괜찮아.

 

  진저레몬티는 별 말 없이 마셨지만, 한동안 잭과 레이첼은 약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잭이 말을 꺼낼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백기를 든 쪽은 기침을 시작한 잭 쪽이었고, 레이첼은 잭이 제대로 약을 삼키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냥 감기일 뿐이라고.

 

  - 하지만 잭이 아픈 건 싫어.

 

  - 이까짓 거, 아픈 것도 아니야. 레이 네녀석이야말로 빗물이나 닦으라고.

 

  오기를 부리면서도 잭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언제까지고 레이첼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눕지 않으면 레이첼은 계속해서 침대 가를 서성이며 그를 지켜볼 것이다. 잭은 손을 내저었다.

 

  - 그만 쳐다보고 가.

 

  잠시 동안, 푸른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시선에 담긴 걱정이 끈질기게 잭에게 달라붙어 있다. 이토록 질척하게 들러붙는 감정이라니, 잭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것을. 오직 그것만이 20여 년 간을 혼자서 지내왔던 잭이 아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반해 레이첼의 평범한 걱정과 배려는 어떤가. 새 붕대가 감긴 것처럼 잭의 마음을 까끌까끌하게 문지른다. 언젠가는 다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단하게 죄여 다시는 풀리지 않을 것처럼.

 

 

 

 

*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레이첼은 침대 가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비를 피할 천장이 있는 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뒤에서 잭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 자는 거야? 레이첼의 작은 목소리가 흩어진다.

 

  - 안 자.

 

  입을 열 때마다 쇳조각이 목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잭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낮고 비틀려 있었다. 레이첼은 다시 물에 적실 붕대를 찾았다. 됐어, 그런 거. 두리번거리는 레이첼의 시선에 찡그린 잭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말로, 괜찮다고.

 

  이상한 일이지. 어둡고 적막한 은신처에 레이첼과 함께 있으면, 잭은 더 이상 B6층의 시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보다 더 어둡고 불편한 장소임에도 이 정도면 괜찮아, 라는 생각이 불쑥 솟구친다. 레이첼. 레이첼의 생각은 알 길이 없다. 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레이첼이 손을 뻗는지, 감은 눈앞에 작고 까만 움직임이 느껴진다.

 

  - , 아직 뜨겁네.

 

  - 네녀석이 너무 차가운 거야.

 

  레이첼은 가만히 손을 내리고 자신의 이마를 잭의 이마에 대어 본다. 서늘하고 뜨거운 두 피부가 맞닿는다. 레이첼의 이마로 잭의 온도가, 잭의 이마로 레이첼의 온도가 옮겨 가는 이상한 순간. 개인의 온도가 뒤섞이는 아주 잠깐의 순간.

 

  감긴 눈을 천천히 뜨고, 잭이 중얼거렸다.

 

  - 시원하네.

 

  - 잭은 따뜻한걸.

 

  희미하게, 레이첼이 미소지었다. 잭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순간에 웃는 건 반칙이잖냐.

 

  근 이틀간 여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잠이 밀려온다. 이번에는 그 꿈을 꾸더라도, 어디선가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괜찮아, .

 

  천천히, 부드러운 천에 감싸인 듯 잭은 잠에 빠져들었다.

Posted by S.m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