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of Death2017. 9. 6. 22:50


Rondo







  무덤은 아늑했지만 시원하지 않았다. 점점 줄어드는 산소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기 위해 내쉬는 숨이 약해져갔다. 멀어지는 불규칙한 발소리와 기계의 둔중한 작동음을 들으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깨달았다. 무덤 안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문득 그가 묻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끔은 기이한 자세로 잠든 모습들이 떠올라 에드워드 메이슨은 힘겹게 몸을 웅크렸다. 상처의 고통보다도 피에 젖어 축축해진 흙의 감촉이 선명했다.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어. 다가오는 죽음을 향해 던지는 말은 과녁에 닿지 못하고 떨어지는 화살처럼 맥없이 추락했다. 육체의 죽음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었으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쓸쓸할 따름이었다. 생의 끝에 도달해서야 완전하게 가질 수 있는 죽음을 쥐고, 에드워드 메이슨은 어둠 속에서 눈꺼풀을 끌어내렸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떠오르는 마지막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밝고 환한 빛을 따라가지도 않았고, 육체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허공으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어두운 새벽녘에 문득 눈을 떠 창가를 바라보듯, 에드워드 메이슨은 무덤을 덮은 비석 위에 앉아 있었다. 새삼 의복이 깨끗해지거나 상처가 아무는 일도 없었다. 흙과 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에드워드 메이슨은 갑자기 깨어났다. 이런 걸, 깨어났다고 해도 되는 걸까. 턱을 괴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지만 딱히 대체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이 든 적도 없었는걸.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죽음은 이제 그의 앞에 길고 긴 레일처럼 펼쳐져 있었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딱히 신을 믿지도, 구원을 바라지도 않았으나 육체가 소실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석 아래로 내려가 부패가 시작되었을 생전의 몸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지만, 에드워드 메이슨은 그 자리에 붙들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와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후로도 에드워드 메이슨은 자신의 비석 위에 앉아 천천히 옅어져갔을 것이다. 사고마저도 완전히 소실되면 완벽한 죽음을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 늘 운이 없었던 그는 죽은 후에도 사색에 잠길 시간을 빼앗긴 채 불타는 건물 위로 솟구쳤다. 건물의 지하는 완전히 붕괴되어 자신의 육체는 거대한 무덤 안에 잠겨버렸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두 명의 생존자가 각기 다른 차에 실려 건물을 떠나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대로 저 둘의 결말도 정해진 것일까? 잭이 체포되는 모습은 꽤나 즐거웠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뒤집어쓴 자루 아래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도 듣지 못하는 웃음은 산소 마스크가 씌워진 채로 구급차에 실려가는 레이첼의 모습을 보자 이내 사그라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시큰한 감각이다. 육체가 없어도 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후로 오랫동안 에드워드 메이슨이 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당시의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물 사이로 보이는 초라한 새 둥지와 떠나는 새들, 그들이 인사처럼 남긴 지저귐이 에드워드 메이슨을 사로잡았으므로. 새 소리. 그는 작고 연약한 동물들이 내는 생명의 소리에 언제나 푹 빠져들곤 했다. 작은 존재들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만의 것이 된다. 죽기 직전에 내뱉는 소리는 얼마나 강렬하고 아름다운지.

 

  빈 둥지에는 몇 개의 깃털이 흩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깃털 너머로 통과되는 손끝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젠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어도 사물에는 닿을 수는 없구나. 에드워드 메이슨은 선선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운이 없는 대신 그는 타고난 영리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만히 부유하고 있기에는 십여 년 간의 생 속에서 쌓아올린 성실함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웅성대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미끄러지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저 떠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이렇게 일어나진 않았겠지. 진화되는 불길 사이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방관 한 명의 어깨에 앉아, 에드워드 메이슨은 속삭이기도 하고 건물의 구조를 손짓으로 가리키기도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마음에 들지 않아.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는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드워드 메이슨은 곧 몸을 일으켜 건물을 떠났다. 그 후로도 건물에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묘지 주변에는 자신처럼 배회하는 존재들이 많았다. 대개는 멍하니 자신의 비석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무덤 아래로 꺼지곤 했다. 멍청이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비석 위에 앉아 에드워드 메이슨은 조소를 내뱉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솟아나는 머리통을 세어 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전혀 아름답지도, 재미있지도 않아. 통통한 볼이 이내 샐쭉해졌다.

 

  막막할 정도로 긴 자유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적었다. 도서관에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사람들 옆에 앉아 독서에 함께 열중해보기도 했지만, 원하는 책을 직접 펼쳐 볼 수 없다는 답답함이 곧 그의 독서를 중단시켰다. 취향대로 책을 진열해두었던 B4층이 문득 그리워지곤 했다. 그러나 되돌아가도 꺼내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가끔 그는 자신처럼 사방을 배회하는 존재들에게 말을 걸었다. 드물게 온전한 사고를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육체를 벗어난 자유로움에 도취되어 이내 에드워드 메이슨을 남겨두고 허공으로 솟구치곤 했다.


  정말이지, 다들 배려심이 부족해. 점점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을 무렵, 에드워드 메이슨의 머릿속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건물 안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불타는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확인한 그들은 제각기 처참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처럼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디서부터 그들을 찾아야 할지, 뾰족하게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육체가 없어진 뒤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래 전에 읽었던 오컬트 책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유령들이 종종 등장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물건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누군가의 꿈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며, 육체를 점령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페이지 너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독자처럼 그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을 뿐.

 

  -그것만으로도 멋지지 않아?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창피한 일들을 줄곧 하잖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안심하겠지. 우리가 한참 전부터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드물게 제대로 된 화법을 구사하는 남자였다. 남자는 에드워드 메이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파트의 벽을 통과해 유유히 사라졌다. 이게 멋지단 말이야? 남자의 말은 잔잔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할 일이 주어지지 않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음에도 그러하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다면 생전과 무엇이 다를까. 에드워드 메이슨은 남자의 말을 조금은 수용해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는다. 언제나 그가 원하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에드워드 메이슨은 도로의 표지판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남자처럼 무턱대고 벽을 통과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엿보고 싶진 않았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자신의 기준에 걸맞는 사람들을 골라냈다. 상냥하고, 똑똑하고, 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잠들 수 없는 그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들어줄 사람들을 찾았다. 그가 찾아낸 사람들은 때로는 십대 소녀이기도 했고, 죽음이 가까워진 고령의 노인이기도 했으며, 두 손을 모아 경건하게 기도할 줄 아는 젊은 남자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그들의 침대나 소파, 사무실의 한 구석에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무덤의 디자인을 생각했다. 비석의 재질과 형태, 무덤의 크기, 적당한 습도의 흙, 잘 짜여진 아름다운 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무덤의 행진은 한동안 에드워드 메이슨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나라면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오랫동안 흙과 돌을 만져온 두 팔은 단단했고 두 다리는 점차 힘이 붙어 가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편안한 쉼터로 인도할 수 있었건만, 멍청하고 난폭한 녀석 때문에 자신의 계획은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내 죽음은 최악이었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고. 더러워진 옷을 내려다보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지금쯤 감옥 안에 있을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신체 능력을 가졌지만, 머리가 텅 비어 있는 탓에 번번이 제물을 놓치면서 짜증만 부리는 남자였다. , 결국 그 녀석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잖아? 사형 판결 뉴스를 본 순간 차오르는 기쁨에 에드워드 메이슨은 말 그대로 공중을 날았다. 아아, 역시! 멍청한 녀석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야! 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는 레이첼의 존재는 건물을 떠나던 날부터 에드워드 메이슨의 기억 한 편을 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존재가 이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레이첼에 대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또다시 새장 밖을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멀어져버렸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레이첼?

 

 

 

 



 

  시설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레이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레이첼의 행방을 알아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시간은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많았고 그가 통과하지 못하는 벽은 없었으며 듣지 못할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금까지 지켜보았던 사람들을 모두 외면할 정도로 레이첼의 존재는 에드워드 메이슨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한 눈에 반해버린 상대를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심장이 있었다면 지금 엄청 두근거렸을 거야. 마침내 열리는 문 사이로 레이첼의 하얀 얼굴이 드러나자 에드워드 메이슨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레이첼!

 

  흰 원피스를 입은 레이첼은 건물 안에서 만났던 그대로 아름답고 텅 비어 있는 얼굴로 천천히 서랍을 향해 다가갔다. 레이첼이 자신의 몸을 통과했을 때, 에드워드 메이슨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진 듯 온 몸이 시려오는 감각을 느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사고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사랑하는 레이첼. 아름답게 잠들게 해주고 싶었어. 벗을 수 없는 자루 너머에서 일그러지는 표정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만이 에드워드 메이슨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나이프를 쥐고 침대에 누운 레이첼의 머리맡에 웅크려 앉은 채,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달빛에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무덤 안에서 눈을 감을 때처럼, 온 몸을 둥글게 말고 싶은 기분이 지독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된다는 뜻이다. 비석 위에 앉아 에드워드 메이슨은 오래 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을 곱씹었다. 눈앞에서 레이첼이 또다시 잭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을 본 뒤로, 그는 늘 비웃었던 존재들처럼 멍하니 한 자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맴돌다 보면 언젠가는 점차 옅어지며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바람과는 달리 상심은 깊었고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 번도 멍하니 앉아 시간을 낭비한 적 없었던 그에게 넘쳐나는 시간은 너무나 버거운 존재였다. 자신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그저 구경만 하는 것도 괴로울 따름이었다.


  이 상태로는 어떤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어. 상상만 하는 건 이제 즐겁지 않아. 그의 생각은 흐르고 흘러 생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 쌓아왔던 지식에 도달했다. 왜 깨어났지? 어리석은 질문임을 알면서도 에드워드 메이슨은 답을 찾고자 했다. 마침내 한 구절을 떠올렸을 때 그는 자신을 세상에 붙들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참을성과 끈기, 성실함이 요구되는 시간이었지만 무덤을 팔 때보다 덜 수고로운 일에 불과했다. 한 인간, 하나의 수수께끼, 깨어 있음, 질문의 폭은 점점 좁아져 결국 레이첼이라는 대답을 향해서 나아간다. 왜 내가 아니었어, 레이첼? 나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 혼잣말을 되뇌이는 에드워드 메이슨을 묘비를 찾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갔다. 그의 맞은편 묘비 앞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은 다정한 목소리로 무덤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바보같긴. 그 무덤의 주인은 정 반대편에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구. 생각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피해 에드워드 메이슨은 묘지의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몇 번을 거듭 생각해봐도 자신이 아니라 잭인 이유를, 에드워드 메이슨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레이첼은 그 녀석 손에 엉망으로 죽겠지. 제대로 된 무덤에도 들어가지 못할 거야. 그러나 삽은커녕 깃털하나도 쥘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다가올 일을 막을 수 있을까. 에드워드 메이슨은 또다시 다가오는 상심의 기운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무한하고 자신에게는 잭이 가지지 못한 끈기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조금 더 열심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른다. 막연하게 떠오르는 희망을 위해 에드워드 메이슨은 생각의 바다를 헤엄쳐 나갔다.


  생은 유한하지만 죽음은 무한하다. 언젠가 이 검은 바다를 건너기 위해 레이첼이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겠지. 그 때 레이첼을 마주할 수 있어. 그건 잭같은 녀석은 할 수 없는 일이야. 이 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건, 나처럼 레이첼을 배려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인걸. 무서운 걸 참고 레이첼을 마중하러 갔던 것처럼, 나는 기다릴 수 있어. 나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멋진 일들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는걸. 레이첼이 ‘yes’라고 말해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분명 멋지게 이뤄줄 수 있을 거야. 왜냐면 여긴, 내 구역이니까.

 

  





 

[Rondo] 회선곡주제가 같은 상태로 여러 번 되풀이되는 형식의 음악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7. 7. 9. 16:57

<살육의 천사 온리전>에 나오는 회지 샘플본입니다.

(회지에는 샘플본의 내용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We Need to Talk About 

Issac Foster



 

 




#1. Alex’s Record

 


  ……아이작 포스터는 OOO일 시설 창문을 통해 침입, 보호 중이었던 레이첼 가드너를 납치하여 도주하였습니다. 사건 당일 밤 인근에서 키가 크고 수상한 차림의 남성과 흰 원피스를 입은 10대 소녀가 시 외곽 도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는 목격 증언에 따라, 경찰은 현재 고속 도로를 통제하고 아이작 포스터를 수배 중입니다. 확보된 아이작 포스터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으며, 목격 시에는 즉시 경찰에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피가 묻은 잿빛 후드 점퍼, 큰 키, 마른 체형, 얼굴 및 상반신에…….

 

  TV화면에 떠오른 아이작 포스터의 사진은 교도소에 이송 당시 찍은 것이었다. CCTV를 용케도 피해간 모양이군.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진 속의 아이작 포스터는 잿빛 후드 점퍼 대신 주황색 죄수복 차림으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알렉스는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서 뉴스를 시청할 기분이 아니었다. 사무실의 캐비닛을 뒤져 아이작 포스터의 서류를 꺼냈다. 아이작 포스터가 이송되어 온 날부터, 그의 눈앞에서 한껏 비웃음을 짓고 사라져버린 날까지의 모든 기록이 거기에 있었다.

 

  감옥 안의 일과란 회색으로 점철된 벽만큼이나 단조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알렉스는 매일 매일, 아이작 포스터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기록했다.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았다. 늘 같은 자리에서 꿈틀대고 있지만, 잠시만 눈을 떼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리는. 아이작 포스터는 그런 위험성을 품은 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작 포스터의 방은 텅 비어 있다.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사전에 계획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알려져 있는 탈옥수들은 늘 몰래 탈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은 탈옥수들이 사라진 이후에 발견되기 마련이다. 아이작 포스터의 방도 그런 이유로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알렉스도 조사에 참여했지만, 아이작 포스터의 방 안에서 단서를 찾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가능성까지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 알렉스는 늘 주의를 기울였다. 그럼, 우연일까? ……혼자서는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수 없다. 알렉스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모두 공범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던 아이작 포스터가 공범과 어떻게 연락을 취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범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국선 변호사나, 추가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경찰밖에 없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CCTV가 설치된 특수 면회실에서 두 팔을 결박당한 상태로 면회를 허락받았고, 면회자는 작은 구멍이 뚫린 유리창 너머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경찰이나 변호사가 아이작 포스터를 도왔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찰은 아이작 포스터의 혐의를 하나라도 더 추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변호사는 형량을 덜어주려는 일말의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경찰보다도 더 짙은 혐오감이 깔린 변호사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알렉스의 속이 불편할 정도였다. 그들과 아이작 포스터 사이에 어떤 협상의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면회 시간 내내 아이작 포스터는 하품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며 짜증을 내곤 했다.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레이첼 가드너 납치 혐의뿐이었지만……, 그 혐의를 벗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알렉스는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격통에 시달렸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가급적이면 피하라고 조언했지만, 아이작 포스터가 스스로 감옥에 걸어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증상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헤아렸다.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뉴스가 보도되기 이전에 경찰에서는 알렉스의 근무 기록을 참고 자료로 요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은 알렉스의 손에 되돌아왔다. 수사가 종결되지 않았는데 자료가 되돌아왔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알렉스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기엔 충분했다. 철저하게 관리하고, 기록했지만 쓸모가 없다. 애초에 아이작 포스터는 탈주가 아니라 도주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살인범에게서 눈을 떼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역시 그 날 억지로라도 동행을 요청했어야 했다. 알렉스는 밀려오는 후회에 얼굴을 쓸어 내렸다. 아침 점호를 위해 교도소 내부를 순회할 때마다 아이작 포스터의 빈 방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멍청한 형사들이라도 그 방에 채워 넣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았다. 알렉스는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쩌면 경찰이 놓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 아이작 포스터가 눈앞에 있는데도 놓친 자들이니, 글자로 된 아이작 포스터의 흔적은 그들의 시야에 닿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알렉스가 밀려오는 후회와 가슴을 찌르는 통증-어디까지나 물리적으로-을 떨쳐낼 길은 하나뿐이었다. 알렉스는 첫 번째 종이를 눈으로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글자의 한 획까지 놓치지 않을 작정이다. 몇 줄의 글자가 불씨가 되어, 그의 머릿속에 아이작 포스터의 기억을 피워 올렸다.

 

 

 


 

  아이작 포스터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부터, 알렉스는 자신이 그와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더불어 아주 잠시만 알고 지내게 되리라는 것도.

 

  법정에서 아이작 포스터는 어떠한 동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사형이 구형되었을 때도,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사의 증언 도중 뭐 임마? 알아듣게 말해!’ 라고 발언한 것이 전부였다.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의 그 태도가 구형에 힘을 실어주었으리라 생각했다. 이로써 누구도 아이작 포스터에게 연민이나 동정, 생명 윤리 따위의 기준을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알렉스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송되었던 날, 아이작 포스터는 카메라를 보더니 갑자기 작게 웃었다. 수감자들 중에서는 사물을 보고 연관된 범행을 기억해내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기념품을 만들어 간직하는 자들도 있으니, 아이작 포스터도 그런 부류 중 한 명일 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무심하게 셔터를 눌렀다.

 

  알렉스가 근무하는 교도소에는 대개 사형 집행이 확정된 중범죄자들이 이송되어 왔다. 아이작 포스터도 이곳에 들어온 자들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사형이라는 열려 있는 문을 향해 정해진 속도로 한 걸음씩 나아갈 따름이다. 특별 사면의 기회가 없는 이상, 그 외의 어떤 선택지도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이작 포스터의 방을 배정하고 교도소의 규칙을 설명하는 동안, 아이작 포스터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보고 있었다.

 

  “. 물이 나오잖아? ……감옥은 쓰레기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아이작 포스터는 병원과 구치소에서 사람들을 습격한 전과가 있다. 괜히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 있는 놈들이 다 그렇겠지만, 저 놈은 특히 제대로 돌아버렸으니까. 웃지도 반응해주지도 말아야 해. 알렉스는 교도소장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구치소에서 이송되어 왔을 때, 아이작 포스터의 두 팔이 구속 장치로 단단하게 결박되어 있었다는 점 또한.

 

  병원에서는 형사가 자신을 체포한 것이 기뻐서 웃었다는 이유로, 구치소에서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남자가 들뜬 상태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서, 경솔한 교도관이 자신을 비웃으며 자극해서, 혹은 쓸데없이 시끄럽게 울어대서, 알렉스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모종의 이유들이 아이작 포스터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극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었다.

 

  구치소에서 전달된 아이작 포스터의 서류를 읽고 나서, 알렉스는 행동 방침을 결정했다. 업무 외의 말은 최대한 삼갔고, 질서 유지 명목으로 그를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배제했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케이스는 이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아직 언론이 아이작 포스터를 주목하고 있었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아이작 포스터의 기사라도 보도된다면 곤란해지는 쪽은 자신이었다.

 

  프로그램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을 전달했을 때, 아이작 포스터는 독방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잘 됐네. 그런 놈들 사이에서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 듣고 있으면 짜증이 난다고.”

 

  글자를 못 읽는 것도 한 몫 했지만. 알렉스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는 수첩에 아이작 포스터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집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온순했던 수감자들도 예민해진다. 교도관들은 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자들에겐 어느 정도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평온하게 보내기 위한 배려나, 연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소장을 비롯한 교도관들은 자신의 업무에 어떤 소음도 끼어들지 않기를 원했다.

 

 

 

 


 

  알렉스의 업무 중 하나는 아이작 포스터의 일과를 그대로 작성하는 일이었다. 길게 적을 필요는 없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운동 시간에는 방범 철책으로 둘러싸인 운동장에 나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일광욕을 한다. 가끔은 자리에 앉아 졸기도 한다. 원래 그 자리는 다른 수감자의 자리였으나, ‘신고식이후에 아이작 포스터에게 넘어갔다.

 

  별다른 자극 없이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이곳에서, 뉴페이스의 등장은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 된다. 교도관들의 묵인 하에, 새 수감자는 기존의 수감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알렉스는 내심 인사를 계기로 아이작 포스터가 잠잠해지길 바랐다. 바깥에서 아무리 악명을 떨쳤다 한들, 이곳의 수감자들은 모두 신문 1면을 장식하고 들어온 이들이다. 그들이 무리를 지은 곳에서 고작 한 명의 살인범은 종잇장처럼 구겨지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제법 요란했던 신고식이 끝나고 나서, 아이작 포스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운동장의 제일 좋은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몇 명의 수감자들이 의료 차원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폭력 행위를 빌미로 아이작 포스터를 특수 감방으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알렉스는 주저했다. 형이 집행되고 나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조용한 교도소 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약간의 해프닝이 신고식이다. 아이작 포스터에게 조치를 취한다면 그건 아이작 포스터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장 또한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내 짤막한 한 마디가 소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옮겨. 뒤돌아 나가는 알렉스의 등을 향해 소장이 덧붙였다. 기자들에게는 새어나가게 하지 말고.

 

  특수 감방. 교도소의 가장 안쪽, 지문 인식과 출입 카드, 홍채 인식의 삼중 보안 장치가 달린 두꺼운 철문 뒤에 존재하는 격리된 공간. 기본적으로 수감자들에게는 독방이 주어지지만, 적어도 바깥을 볼 수 있도록 철창문이 달려 있다. 반면 특수 감방은 검게 칠한 철문에 손바닥 크기의 창이 하나 달린 것이 전부고, 그나마도 바깥에서만 개폐가 가능했다. 전기도, 식사도 공급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가 소음의 전부인 공간 안에서 식사도 물도 없이 이삼 일 지내고 나면, 수감자는 놀랍도록 얌전해진다. 알렉스는 자신의 손으로 몇 명을 특수 감방으로 인도했지만, 아이작 포스터를 호송하는 길이 가장 즐거웠다.’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해도 말이야,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할 말은 아니지. 우리는 저 인간들을 보호하는 게 아니야. 죽기 직전까지 얌전히 뉘우치게끔 감시하는 거라고.”

 

  소장의 말은 알렉스에게서 망설임을 지워주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일주일 정도는 필요하겠어. 알렉스는 감방의 문을 열어 어두운 내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이작 포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느낄 수 있었다. 주황색 죄수복으로 덮인 어깨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어떤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아이작 포스터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감방의 문이 닫혔다.

 

  일주일 동안 순회 시간마다, 알렉스는 문 앞에 서서 아이작 포스터의 반응을 기다렸다. 죄수번호를 호명하면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부르면 잠시 후에 안쪽에서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응답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침묵이 길어질 것이다. 창을 열어 아이작 포스터를 관찰할 수도 있었지만, 기를 꺾어 놓는 일은 지나치면 독을 키우기 마련이다. 적어도 알렉스는 수감자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있었으므로.

 

 


 

  감각이 예민한 인간일수록 특수 감방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통스럽다. 시간도 날짜도 알 수 없다. 공간에 대한 지각력이 사라지고, 찾아드는 허기와 갈증을 견뎌야 한다. 자신의 숨소리만 느껴지는 것, 오직 촉각에 의지해 변기를 찾아내고 배설해야 하는 불편함, 환기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고여 있는 공기가 점차 악취로 변해가는 것,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홀로존재해야 한다는 두려움, 보이지 않는 우주에 떨어져 돌아오지 않을 목소리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것……, 전부 아이작 포스터가 겪어야 할 일들이었다.

 

 


 

  근무일지에 생존이라는 글자만이 새겨진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알렉스는 특수 감방 앞에 서서 창을 열었다. 진동하는 악취에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환기 시설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알렉스는 문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아이작 포스터를 호명했다. 침묵.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면, 희미한 숨소리가 들린다. 대답할 기력도 없는 건가. 알렉스는 카드 키를 꺼내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나갈 시간이다.”

 

  “…….”

 

  아이작 포스터는 감방의 가장 안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접근했다. 자력으로 일어날 힘이 없다고 해도, 예민해진 상태에서 접근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 알렉스는 다시 한 번 아이작 포스터를 불렀다. 꺾여 있던 고개가 천천히 위를 향했다.

 

  갑작스러운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는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불꽃처럼,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빛이 아이작 포스터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인다. 알렉스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붕대 사이로 갈라진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 이 새끼……, 죽인다.”

 

  “말할 기운이 있다면, 일어설 수도 있겠군. 나갈 시간이다.”

 

  “……닥쳐! 뒈지는 줄 알았다고!”

 

  목소리에도 힘이 남아 있었지만, 아이작 포스터는 느릿하게 일어섰다. 구겨진 옷의 주름이 천천히 펴지는 것처럼 불안정하고 기이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자, 아이작 포스터는 벽을 짚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알렉스는 허리에 채워진 곤봉에 한쪽 손을 올리고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주어진 방으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철창 너머의 아이작 포스터가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알렉스는 수첩을 꺼내 이상 없음을 기록했다. 죽여 버린다. 작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아이작 포스터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말을 내뱉었다. 그 말 또한 기록할 지, 잠시 망설였지만 알렉스는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길게 늘어선 복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이작 포스터에게 물리적인 '교정'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적어도 그 사실은 파악했다.

 

 

 

 


 

  기록을 하기 위해 철창 너머를 들여다보면, 아이작 포스터는 운동장에서 주웠을 돌멩이로 벽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 적는 것도 아니고, 그림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알 수 없는 선들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갔다. 알렉스는 빠짐없이 선들을 옮겨 적고, 돌멩이는 압수했다.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었기에 그 선들의 정체가 알파벳이었다는 것을, 알렉스는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알파벳은……, 알렉스는 서류를 넘기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아이작 포스터가 그려놓은 선들은 경찰 측에서도 주목했을 것이다. 도주를 한 만큼, 감옥 안에서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 놓았다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 사실은 알렉스도 동의했지만, 자료는 빠짐없이 알렉스에게 되돌아왔다. 아무리 조사해도 알파벳 사이의 연계성을 찾을 수 없고, 마치 어린아이가 심심풀이로 한 글자 연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 낙서에 불과했다.

 

  경찰의 말을 알렉스가 받아들인 바에 따르면, 아이작 포스터는 감옥에 있는 내내 느긋하게 산책하고 낙서나 하며 빈둥거리다가 도주한 것이다. ……그 빌어먹을 붕대인간이! 그 낙서를 일일이 옮겨 적는 자신을 보며, 아이작 포스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에 덴 것처럼 뒷목이 화끈 달아오른다.

 

  알렉스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왔던 일은 교도관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쓸데없는 정보까지 넘겨서 수사팀의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아이작 포스터의 기록을 읽고 있다 보면 알렉스의 자부심에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알렉스는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좁혔다. ……기록에는 남겨두지 않았지만, 짐작이 가는 일이 있었다. 그 날,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 앞에서 처음으로 평정을 잃었다.

 

 


 

  특수 감방에 다녀온 이후로도, 아이작 포스터의 태도는 여전했다.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다면 이전까지는 본체 만 체 했던 알렉스를 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는 것일까. 그 반감은 알렉스를 부르는 호칭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어이에서 , ‘임마, ‘, 마침내 저 새끼로 불렸을 때,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를 면담실로 호출했다.

 

  붕대로 가려져 있어도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짜증을 알렉스는 침묵으로 견뎌냈다. 교도소의 생활이나, 편의에 대해 물으려 해도 입술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성실함과 진중함으로 쌓아올린 평정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었지만 아이작 포스터는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적당히 해. 소장은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짤막하게 말하는 것으로, 아이작 포스터의 처우를 모조리 넘겨버렸다. 이대로 말라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있고, 근무가 끝나는 시각 아이작 포스터와 인근 죄수들의 감방 문을 슬쩍 열어놓고 퇴근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집행일만을 기다리게끔, 하루하루 눈 뜨는 것이 고역일 만큼 교도소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그럴수록 적개심으로 타오르는 아이작 포스터를 보고 즐거워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알렉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고작 철창 하나로 분리된 공간 안에서, 저 쾌락살인범들과 같은 지대로 끌려 내려갈 수는 없었으므로.

 

  “혼자 있는 게 편한 모양이군.”

 

  “……하아? 네놈이 독방에 쳐 넣어놓고 무슨 소리냐?”

 

  쓸데없는 말을 했다. 아이작 포스터는 기가 막힌다는 투로 대꾸했고, 알렉스는 이내 후회했다. 저 태도에 대해 확실하게 못박아둘 필요가 있음에도, 알렉스는 화제를 빙 둘러 가고 있었다. 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지? 알렉스는 말을 고쳤다. 아이작 포스터는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적어도 알렉스의 시각에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난 이상한 놈들하고 말 섞는 취미는 없거든.”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알면 하지 말라고.”

 

  “…….”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좋지 않을까. 사형수 앞에서 말문을 잃은 교도관이라니, 웃음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알렉스는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졌다. 아이작 포스터가 알아들을 수준에서 적당히 경각심을 일깨워줄 만한 단어를 천천히 골라내려 했다. 마침내 알렉스가 경고를 하려는 순간, 아이작 포스터의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이런 건 왜 하는 거냐?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쁘다고.”

 

  “……이 곳이 감옥이고, 아이작 포스터 네가 수감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교도관이고, 네가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게 일이니까.”

 

  “……그러니까, 간수 같은 거라고?”

 

  “간수……, 오래 전의 표현이지.”

 

  “결국 같은 말이라는 거잖냐! 어렵게 말하기는.”

 

  알렉스의 눈에 비치는 아이작 포스터는 단선적인 인간이었다. 단순한 것을 좋아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짜증을 참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거침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중심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적당히 맞춰주면 제일 다루기 쉬운 타입이다. 알렉스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집행 날짜까지 내버려두면 알아서 사형장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렉스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알렉스는 최대한 단조롭게, 아이작 포스터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짐작되는 범위 내에서 용건을 전했다. 적어도 그가 아이작 포스터의 태도를 인내심만으로 버티지 않았다는 점을 슬쩍 내비치기까지 했다. 집행일까지 매일 편안하게 잠들고 싶다면. 알렉스는 그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내뱉었다.

 

  그 때, 아이작 포스터가 어떻게 앉아 있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좀처럼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의자에 기대듯이, 마르고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던가? 쏟아지는 말들이 불가해한 이국의 언어인 것처럼 의아한 얼굴을 했던가?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 속의 장면은 아이작 포스터가 던진 말로 까맣게 물들어버린다.

 

  ……기분 나쁜 것도 모자라서 재미도 없구만. 사람을 이렇게 묶어놓고 협박하는 게 네놈 취미냐? 간수란 놈들, 하나같이 취향 한 번 음침하네.”

 

 


 

  그 날 알렉스의 근무일지는 평소와 달리 문맥이 잘 맞지 않았고, 휘갈긴 글씨체로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 한 마디에 그렇게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더 무례한 수감자들도 있었고, 얼굴에 침을 뱉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날에도 알렉스의 근무일지에는 ‘45342번이 본관에게 타액을 분사함.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로, 교도소 내의 기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사료됨. 특수 독방 이동 요망.’과 같은 문장들이 기록될 뿐, 알렉스는 수감자에게 동요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아이작 포스터가, 붕대로 동여매어 표정을 알 수 없는 그 범죄자가 알렉스의 내부 어딘가를 건드린 것은 확실했다. 두 개의 눈동자가 각각 다른 빛으로 그를 비웃고 있었다. 빛의 반사에 의한 착각이거나, 계속되는 교대 근무와 면담으로 조금 지쳤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교도관으로 근무하며 세밀하게 조정해온 신경을 발로 걷어차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사형을 앞둔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대면해야 하는 것, 그들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발견하게 되는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스물스물 일어나는 연민을 억누르는 것, 사형 집행일마다 찾아오던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은 날에 소실되어버린 모종의 감각,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고압적으로 수감자를 내려다볼 때의 이상한 쾌감, 생의 끝자락에 도달해서도 회생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 알렉스의 손발을 저릿하게 하고 차마 앞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무감해지는 방향을 선택했기에, 그만큼 생각하지 않으려고 덮어두었던 것들을 아이작 포스터가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고 사라졌다.

 

 

 


  알렉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이건 내 업무다. 그리고 교도관님이라고 제대로 불러.”

 

  “무슨 상관이야, 그게. 네놈 이름도 모르는데.”

 

  알렉스는 수감자 제압용 곤봉도, 스턴건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권총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물리적인 폭력도 아이작 포스터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비웃음만 살 것이다.

 

  다만 알렉스 또한 아이작 포스터를 자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정말,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한 교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알렉스는 잠시 망설였다. 위험할 지도 모른다. 다만 눈앞에 앉아 있는 아이작 포스터는 범죄자다. 연쇄 살인범이자, 부부를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한…….

 

  “……자네가 내 이름을 외울 수나 있겠나? 교도관이라는 단어도 줄곧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

 

  아이작 포스터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어떤 말도 흥미가 없다는 듯이. 알렉스가 고심해서 내뱉는 말도,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유지해오던 평정심도 아이작 포스터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사뭇 턱이 아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알렉스는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붕대 아래에 감춰진 맨얼굴을 보기 좋게 뭉개버리는 상상은 알렉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고양시켰다.

 

  그러나 폭력을 쓰지 않아도 자신과 아이작 포스터가 놓인 위치를 감안한다면 얼마든지 아이작 포스터의 기를 꺾어놓을 수 있다는 일말의 확신이, 교도관으로서 누려왔던 알 수 없는 쾌감의 기억이 결국 알렉스의 입에서 한 이름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레이첼 가드너.”

 

  붕대로 가려진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의 눈에 잠시 떠오른 빛을 보았다.

 

  처지를 깨닫게 만들고 싶었다. 아이작 포스터에게 있어 레이첼 가드너는 단순히 놓쳐버린 타겟인지, 모종의 어떤 관계인지 알렉스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레이첼 가드너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아이작 포스터를 자극할 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연행된 이후로 철저하게 외부의 정보와 격리되어 지내고 있다. 병원에서도, 구치소에서도 레이첼 가드너에 대해 함구했고, 이송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모범수에 한해 신문 구독이 허락되어 있지만, 아이작 포스터가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어이.”

 

  “시간이 됐군. 면담 종료다.”

 

  “내 말 안 끝났어! 갑자기 그 녀석 이름은 왜 말하는데?”

 

  미끼를 잘 무는군. 알렉스는 면담일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에 경고를 한 번 주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작 포스터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알고 싶다면, 얌전하게 지내도록.”

 

  이후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의 독방을 들여다볼 때마다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했다. 온종일 알렉스의 순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독방에 가까워지는 소리에 아이작 포스터가 철창을 향해 덤벼들었으므로. 말해. 짐승이 위협을 가하듯 낮고 으르렁대는 목소리였지만, 그럴수록 알렉스는 말을 아꼈다. 뭘 말하라는 건가. 그가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가면, 철창을 부술 듯이 내려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갈수록 통제가 안 되는군. 소장이 건넨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교정의 일환입니다. 소장은 알렉스를 비난하지도, 만류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전과 같은 태도로 알렉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아이작 포스터가 무사히 사형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일이었다. 알렉스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연락을 받고 알렉스가 급하게 도착했을 때, 아내는 병실 침대에 누운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경미한 타박상에 그쳤지만, 의사는 교통 사고의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 며칠간 입원을 권했다. 가벼운 접촉 사고였다. 신호 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뒤에서 차가 갑작스럽게 들이받았고, 차의 범퍼는 찌그러졌지만 에어백이 완충 역할을 제대로 했다며 잠에서 깬 아내가 웃어 보였다.

 

  간호를 위해 자리를 비운 며칠간, 아이작 포스터의 임시 담당은 레이첼 가드너에 대한 정보를 흘린 모양이었다. 네놈과는 관련 없는 곳에서 잘 지내는 모양이더군. 알렉스는 하마터면 그 자식을 사형대로 끌고 갈 뻔 했다. 레이첼 가드너에 대한 정보를 아주 조금 흘리는 것만으로도 아이작 포스터를 통제할 수 있었건만, 쓸데없이 너무 많은 정보를 주는 바람에 아이작 포스터를 통제하기는커녕 목줄을 풀어 준 셈이다.

 

  업무로 복귀한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동안의 밀린 업무와, 수감자들 사이의 폭행 사건이었다.

 

  신고식 때보다도 참혹했다. 아이작 포스터를 비롯한 다섯 명의 수감자와 두 명의 교도관이 큰 부상을 입었고, 제각기 수술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알렉스가 제대로 된 정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아이작 포스터를 제외한 수감자들이 호송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다만 아이작 포스터만이 응급 조치를 끝내고 감방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 소장은 알렉스에게 이대로 교도소 내에서 치료를 마칠 것인지, 다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근 병원으로 호송할 것인지 판단을 요구했다. 아내의 사고에 맞물린 교도소 내의 사고가 알렉스의 이성을 마비시켰지만, 알렉스는 침착하게 정황을 파악해나갔다.

 

  한밤중에 누군가 아이작 포스터와 인근 수감자들의 철창 잠금 장치를 해제했다. 당직 교도관들 중 누군가가 수감자들과 결탁한 모양이었지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임시 담당의 실수 이후로 아이작 포스터는 더욱 날뛰었고, 직접 나서기 싫었던 교도관들이 수감자들로 하여금 아이작 포스터를 잠잠하게 만들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이야. 알렉스는 병원까지의 호송을 요청했고, 동행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상하리만치 일의 진행 속도가 빨랐다.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가 병원으로 호송되던 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서류에는 단 한 줄, 관할 서와 협력하여 병원으로 이송이라는 문장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기억은 좀더 세세했다. 타이밍 나쁘게 일어난 아내의 사고, 놀라울 만치 경솔한 임시 담당 교도관의 발언, 효과가 없음을 알면서도 아이작 포스터를 통제하려던 방식, 동행 요청의 거절……. 어쩌면, 어쩌면 어딘가부터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알렉스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동행을 거절한 것은 관할 서 측이었다. 인원이 많아질수록 이목이 집중된다며 아이작 포스터의 인적 서류만을 챙겨 갔다.

 

  소장은 왜 받아들인 거지? 알렉스의 의문에 소장은 변명하기 급급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으면 골치 아파져. 설마 도망갈 줄 알았겠나? 알렉스 자네도 포스터 그놈이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 않나. 젠장, 임시 담당 그놈은 해고했어.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놈을 목 졸라 버리고 싶다네.”

 

  책임을 묻고 싶어도 명확하게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관련된 수감자들을 차례로 면담했지만 모두 아이작 포스터가 입힌 부상에 대해 말하며 치를 떨 뿐,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 날 억지로라도 동행했어야 한다. 내심 아이작 포스터의 처참한 몰골에 자신도 방심했다고, 알렉스는 수없이 자신을 자책했다.

 

  그 날, 호송차에 타던 아이작 포스터는 분명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가와, 한 쪽만 올라가 있는 입매. 돌이켜보면 그건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아이작 포스터는 이미 그 때,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상을 입고도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당시의 알렉스는 불편한 속을 다스리며 넘어갔었다. 아내의 차 사고로 보험 사와 마찰을 빚고 있었던 것도 알렉스의 정신을 분산시키기에 충분했다.

 

  놓쳐버린 먹잇감을 두고두고 곱씹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찾아서 끌고 와야 한다. 언론에 보도되며 당한 수모를 되갚아주리라고, 알렉스는 이를 갈았지만 되갚아줄 당사자가 지금 눈 앞에 없다.

 

  설령 마주한다고 해도, 아이작 포스터에게서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 무례한 태도, 교도소의 질서 따윈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좋을 대로 행동하다가 마침내 빠져나갔다. 벌을 줘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타오르듯 번쩍이는 눈동자를 자신에게 향할 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지막 장에도, 답은 없었다. 알렉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남은 것은 아이작 포스터가 다녀간 흔적, 흔적뿐이었다. 흔적을 좇아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알렉스는 까칠해진 얼굴을 매만졌다. 돌아와, 돌아와라. 얼굴을 마주하고, 이번에야말로 그 기분 나쁜 태도를 고쳐 줄 테니. 그리하여 자신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

 

 

 

 

 

 

-#1. End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7. 3. 15. 00:46

색의 소유

 

 


 

 

 

 

 

  깨닫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욕실의 거울은 낡고 지저분했을 뿐더러, 잭은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보는 섬세한 일들에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으므로. 잭은 후드 사이로 번지는 낯선 색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아무렇게나 자란 검은 머리카락의 끝에 햇빛처럼 스며든 황금빛의 의미를 잭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 뭐야, 이건?

 

  까맣고 푸석한 머리칼들 사이에서 숨길 수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한 가닥을 손에 쥐어 본다. 고요한 새벽의 정경에 번지는 햇빛처럼 눈 안으로 스며들 것만 같다. 잭은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혹은 아주 잠깐 스쳐갔던-사람들을 헤아려 본다. 이제는 이목구비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 그들 중 누구도 이런 머리카락을, (잠시 간수 복장의 여성이 떠올랐지만 잭은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지워버렸다.) 염색하지 않고 가진 사람이 없었다. , 어쩌면, 그건가. 잭은 처음으로 언어를 습득한 사람처럼 혀끝으로 되뇌었다.

 

  - , 씨발, , 새새끼 말고 새, …ㅊ…새츼? 새채?새치! 그래, 새치! 뭐야, 그거구만.

 

  스스로 정답을 찾아냈다는 즐거움도 잠시, 잭은 또다시 생각의 미로에 갇힌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새치가 왜 나는 거지? 그보다 이렇게 잔뜩 나는 건가? 밀려오는 의문들에 잭의 사고는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모르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리가 없다. 그럼 보다 똑똑한 녀석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생각에 잠긴 레이첼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발끝을 향하는 시선이나, 작은 코와 입, 창백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희미한 숨소리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이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뭐라도 알겠지.

 

  어느 순간부터 레이첼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는 것쯤은, 잭도 눈치 채고 있었다. 함께 거리를 걸을 때에도,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에도 레이첼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하는 것처럼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포크가 부딪히기만 해도 서둘러 시선을 돌리는 레이첼의 사소한 변화에, 잭은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이렇게 레이첼의 행동들이 떠오를 때마다, 짜증이 날 정도로 옆구리가 뜨끔거린다.

 

  한밤중에 깨어나 물을 마시다가도,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도 불쑥 엄습하는 통증. 잠들어 있는 레이첼을 내려다보거나, 단정한 옆모습을 바라보면 이내 잠잠해지곤 하는 따뜻하고 예민한 감각. 이제껏 염두에 두지 않았던 작고 가느다란 기억들이 잭의 신경을 갉아먹을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잭은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내던졌다.

 

  - 그 녀석, 바느질이 특기라더니 제대로 꿰맨 것 맞냐고. 아직도 쑤시잖아.

 

  욕실을 나서자 작고 낡은 패브릭 소파 위로 솟아오른 조그만 뒤통수가 보인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는 레이첼의 얼굴 위로 길고 가느다란 금발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푸르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가, 아주 조금 방향을 바꾼다. , 또다. 뭔가가 울컥하고 뱃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어느 날 발견한 이 머리카락처럼 반짝이고야 말 것 같다. 잭은 다시금 병인지 새치인지 모를 머리카락으로 관심을 옮긴다. 이것의 정체라도 알아야 불편한 속이 조금은 잠잠해질 것만 같았으므로.

 

  - , 레이.

 

  - ?

 

  - 이거, 새치냐?

 

  - …….

 

  레이첼의 푸른 눈동자에 금빛이 물결치는 것도, 조그만 입술이 서로를 껴안듯 맞물리는 것도,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는 잭에게 보일 리 없었다. 평소처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는 거겠지. 어쨌든 모르는 건 이 녀석이 대답해줄 테니까. 잭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 새치 아냐, .

 

  - ? 그럼 뭔데? 병이냐?

 

  - 그냥, 머리카락이야.

 

  - 그건 나도 알아! 색깔이 다르잖냐!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 …….

 

  - 너도 모르는 거냐?

 

  다시, 침묵. 잭은 후드를 뒤집어썼다. 곤란하다는 듯이 움츠러든 눈썹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해답을 얻지 못하고 넘쳐흐르는 의문들이나, 솟구치는 짜증 때문에 빨라진 심장 박동보다도, 저런 표정이 더욱 속을 뒤집어 놓는다. , 옆으로 좀 가라. 레이첼이 만든 공간 위로 잭은 늘어지듯이 주저앉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자리가 따뜻하게 잭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뱃속이 여전히 뜨겁다. 옆구리가 따끔거린다. 시야에 금색이 끼어들어서 눈이 부셨다. 그 사이로 조용히 앉아 있는 레이첼의 옆모습이 보인다.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지 잔잔한 얼굴로 조그마한 입술을 가만히 들썩이고 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으면 뜨끔거리는 옆구리도 뱃속도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잭의 머릿속에 단어들이 떠올랐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어쩐지 혀 끝에 물고 오랫동안 굴려보고 싶은, 희미한 단어들을 붙잡으려 애쓰는 동안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왔다. 레이첼의 작은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할 무렵, 잭은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 모르겠다. 저 녀석은 알면서 왜 말을 못 하냐고. 이쪽은 몰라서 짜증나 죽겠구만. 됐다, 됐어. 나중에 생각나겠지. 나중에…….

 

 

 




  …레이첼의 시선이 잭의 발끝에서 거실 바닥에 스며든 얼룩을 향한다. 몇 번을 힘주어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 내버려둔 채였다. 가끔 눈에 들어올 때마다 닦아내고 싶어지지만, 이제는 풍경의 일부로 남아버린 얼룩 같은 것이 레이첼에게도 존재했다. 점점 커지다 못해 부정은커녕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감정이. 그러나 잭에게는 존재할 리 없고, 있다고 해도 인지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진득하고 찬란한 감정들이 레이첼의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까. 때로 어떤 색깔은 누군가의 온기로 빚어져 이토록 따뜻하게 녹아내릴 수 있다고, 단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6. 10. 27. 23:20

 색의 소유 -레이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욕실의 낡고 지저분한 거울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컸으므로. 레이첼은 가위를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낯선 색이 번지고 있었다. 길게 물결치는 금발의 끝에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검은 색의 의미를 레이첼은 너무나도 잘 안다. 이제는 숨길 수 없어. 가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리 염색으로 덧씌워도 자라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잭을 바라볼 때마다, 잭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함께 거리를 걸을 때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레이첼에게 점점 벅찬 일이 되어간다. 잭은 신경도 쓰지 않을 일들, 식사를 하다가 포크가 부딪히는 순간처럼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두고 그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가윗날을 거친 머리카락은 좀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물결치는 금빛 머리카락은 아름다웠지만, 끝이 들쑥날쑥하게 잘려 있었다. 레이첼은 거울을 보며 조금씩 가위를 움직였다. 잘려라. 잘려 나가라. 기도하듯 되뇌는 레이첼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카락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레이첼의 마음을 증명하듯 온통 검은색이다. 염색을 해도 이내 검게 물드는 머리카락을 감당할 수가 없어, 레이첼은 마침내 가위를 들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잭이 눈치 채지 않을까. 그녀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는 잭이라 해도 어쩌면, 언젠가는. 레이첼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한 마디가 다시 손을 움직이게 했다. 그 다음은? 잭이 눈치 챈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멈출 수 없는 불안함이 빠르게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맹세. 굳건한 맹세가 있지만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 맹세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도, 레이첼은 잘 알고 있었다.

 

  - , 레이! 언제까지 그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건데! 문 부숴버린다!

 

  문 너머에서 잭의 거친 목소리가 울린다. 레이첼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았다. 잠시만, . 부수지마. 잔뜩 짜증이 났는지 연신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수납장 안에 가위를 숨기고, 머리카락 뭉치를 쓰레기통 안쪽 깊숙하게 넣어두고 나서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본다. 언제나처럼 잔잔한 표정의 소녀가 서 있다. 그러나 눈동자의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쿵쿵 울리는 맥박 때문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소녀도 서 있다. 레이첼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막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는지 하얀 붕대가 감긴 손이 보인다. 내려다보는 황금색과 검은 눈동자에 레이첼은 숨이 막힐 것 같다.

 

  - 늦잖아! 뭐 하다 나오는 거야!

 

  - 욕실에서 하는 일.

 

  - 뭔 소리 하는 거야. 그보다 나가야 한다고.

 

  눌러 쓴 후드 사이로 검은 머리칼이 보인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혹은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 들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레이첼의 마음을 짓눌렀다. 버려둔 염색약 통을 발견했을 때도 잭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 때 레이첼은 언제든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분전환이라거나, 지금의 머리색이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혀 끝에 물고 있었던 말들을 내려놓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때에, 잭은 무심하게 염색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결국 헛된 노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첼은 겉옷 안쪽으로 머리칼을 감추고 잭을 따라 나섰다



Posted by S.m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