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of Death2018. 2. 1. 07:27

프리게임 온리전 SAVE & LOAD~저장은 습관화~』  에 나오는 회지

『Point at Infinity』  샘플본입니다. 

(회지에는 샘플의 내용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Point 

at 

Infinity





1. 백야





  남자는 한 손으로 잭이 내민 종이 끄트머리를 잡았다. 어두운 밤색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안, 잭은 묵묵히 서 있었다. 남자가 종이를 구겨 휴지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꽤 자주 오는 것 같은데? 네 주인도 상당히 심각한가 봐, ? 남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잭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카운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운터 뒤편의 문으로 사라졌다.


  블랙마켓의 인간들과 필요 이상으로 말을 섞지 마.


  잭에게 처음으로 일을 맡기던 날, 대니는 단 한 가지의 충고를 남겼다. 음성만으로도 신원 정보의 대부분을 도출해낼 수 있는 곳에서, 굳이 말을 꺼낸다면 침묵보다 가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이곳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그 대신, 무엇이든 빼앗길 수 있다.


  저딴 놈이랑 시시덕거릴까 보냐. 잭은 후드 점퍼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돌아다니는 로봇은 심부름 로봇이 전부인 이 거리에서 인간형인 잭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가게까지 오는 내내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주인이 있는 안드로이드를 함부로 팔아넘길 수는 없지만, 부품을 몇 개 빼돌리는 정도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 가게의 주인도 그런 패거리들과 한 패가 아니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잭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 가게 주인은 쓸 만 했는데. 결코 친절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거래를 제외한 푼돈벌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잭은 전 주인의 데이터를 삭제했다. 그는 삼 개월 전에 테러에 휘말려 죽었다.


  쓸 만한 사람은 언제나 일찍 죽고, 성능이 좋은 안드로이드는 빨리 망가진다. 잭은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가게 벽에 설치된 스크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드로이드를 외치는 무장 집단의 테러 확산을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건을 들고 나온 가게 주인이 잭의 시선을 따라 스크린으로 고개를 향했다. 화면 속의 안드로이드가 순식간에 파편이 되어 흩날리자, 남자가 혀를 찼다. 멍청한 놈들. 아깝게 무슨 짓이야. 어이,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야? 돈은?


  잭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폐 다발을 꺼내자, 남자는 약품 더미를 카운터 위에 쏟아 놓았다. 그가 지폐를 세는 동안 잭은 카운터 위의 약품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오기 전에 확인했던 목록과 일치했다, 약품 하나를 제외하고. 잭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이거.”


  잭은 약품 더미에서 낡은 종이 박스를 잡았다. 눈으로는 스캔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남자의 신체 온도를 주시했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손을 멈추고 지나치게 과장된 태도로 웃어 보였다. 고르지 못한 치열 사이로 군데군데 까맣게 썩어 들어간 치아들이 번들거렸다.


  “그거? 효과 끝내주지. , 실례. 소화 기관은 없는 건가?”


  “…….”


  “농담이야. 얼굴을 가려놔서 표정을 모르겠네. 이봐, 이래봬도 내 할아버지 때부터 해 온 일이야. 아닌가, 아버지 때부터였나?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고말고. 난 제대로 줬어.”


  잭은 서서히 상승하는 남자의 신체 온도와, 지폐를 꼭 붙들고 있는 굵은 손가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있었지, 이런 인간. 잭이 두 번째로 블랙마켓을 방문했을 때, 당시의 거래처 주인은 싸구려 약품 몇 개를 슬쩍 끼워 팔았다. 잭은 그 사실을 대니를 통해 확인했고, 분노한 잭이 다시 블랙마켓을 찾았을 때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종종 거짓말을 하지. 그걸 간파하는 것도 능력 아닐까? 대니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던 순간이 선명해진다. 남자가 잭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괜히 트집 잡지 말고, 어이, 어딜 스캔하고 있는 거야? 그 빌어먹을 거 당장 끄지 못 해?!”


  남자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할까. 팔목 째로 잘려나가도 저 손은 돈을 쥐고 있을 것이다. 깊게 생각하는 건 잭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남자를 달래서 좋은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건 대니에게나 적합한 일이었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잭은 한 손으로 후드 주머니를 뒤적였다.


  낡고 더러운 잿빛 천 사이로 두꺼운 나이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 멋진 칼이네. 남자는 적갈색으로 얼룩진 칼날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애써 웃었다. 잭은 손잡이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 이봐, 너무 심각하게 굴지 마. 나 이래봬도 평등주의자거든? 소리친 건 사과할게. 이건 거래를 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사소한, 아주 사소한 해프닝인 거지. 그러니까 진정하고, 워오! 가까이 오지 마!”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남자는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었다. 잭은 들고 있던 종이 박스를 카운터 한 쪽에 내려놓았다. 잭은 남자에게서 몇 장의 지폐를 되돌려 받았다.


  요즘 약값이 비싸져서 말이야, 오해하지 말라고. 창백하게 질렸던 남자의 뺨은 잭이 나이프를 집어넣자 서서히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말이 많은 남자다. 자신이 이 일을 맡기 전에는 대니나 레이첼이 이런 인간들을 마주했을 것이다. 전자는 알 바가 아니지만, 후자는 어떤 식으로든 불쾌한 결론을 도출했다. 잭은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물건을 포장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내민 꾸러미는 제법 묵직했다. 잭은 여전히 할 말을 찾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를 뒤로 하고 몸을 돌렸다.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남자가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니였다면, 남자의 말을 듣지 못하고 가게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잭의 프로그램은 인간의 발음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좋든 싫든 잭의 청력 기관에는 남자의 혼잣말이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여자애가 편했는데.

 

 




  레이첼은 눈으로 물고기의 움직임을 좇았다. 유선형의 몸통을 따라 길게 펼쳐진 홀로그램 지느러미가 섬세하게 물결쳤다. 수조의 끝과 끝을 오가는 그들은 깊은 바다 속을 누비듯, 부드럽게 유영하며 서로의 몸을 통과하고 있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레이첼 또래의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이 쪽 본다. 더 세게 두드려 봐. 몇 마리의 물고기가 방향을 바꿔 레이첼이 있는 구석으로 몰려들었다. 붉은 산호 가지 사이로 몇 개의 영상이 겹쳐지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뭐야, 신종도 똑같잖아. 가자. 아이들이 떠난 뒤에도 레이첼은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었다. 가게 안에서 작은 케이스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그녀를 스쳐갔다. 레이첼은 지갑 속 지폐의 수를 천천히 헤아렸다. 생활에 필요한 금액을 제외하고 나면 한참 부족한 액수였다.


  가지고 싶은 건 뭐든지 나에게 말해주렴. 대니는 습관처럼 레이첼에게 말했지만, 그가 가져오는 물건들은 언제나 너무 많았다. 레이첼이 소형 강아지 로봇에 관심을 보였을 때, 대니는 그녀의 방 안 가득 요크셔테리어 종 강아지들을 풀어 놓았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레이첼 또한 습관처럼 말했지만, 대니가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대니 선생님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레이첼은 가지런한 금빛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의 방은 오래 전부터 포화 상태였고, 잭의 방에 옮겨 두는 것도 슬슬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던 잭도-종종 그의 베개 근처에서 작은 장난감들이 돌아다녔으므로-최근 들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충전하는 내내 그놈들이  내 얼굴을 밟고 다닌다고!


  레이첼은 이제 산호 가지를 빠져나와 천천히 이동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달에도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에 잠긴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여기서 뭐 하냐.”


  무심한 목소리가 먼지를 털어내듯 레이첼의 신경을 흐트러뜨렸다.


  양 손 가득 짐을 든 남자가 유리창에 비쳤다. . 레이첼이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잭은 몸을 숙여 유리창에 바짝 얼굴을 댔다. 관자놀이 부근의 붕대 틈으로 회로의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 상품을 허락 없이 스캔하면 안 돼.”


  레이첼의 손을 피해 잭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쩌라고. 닳는 것도 아닌데.”


  “불법이야.”


  “! 알 바냐?”


  노랗게 빛나는 잭의 한 쪽 눈동자에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레이첼은 체념하듯 몸을 돌려 그가 들고 있는 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들어, . 붕대 사이로 선처럼 그어진 얇은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됐거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봉투의 손잡이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볼일 다 봤냐? 그럼 가자고. 잭이 몸을 돌렸다. 잭의 걸음은 레이첼이 뛰다시피 걸어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빨랐고, 그가 새삼스럽게 속도를 늦춰주지 않는 것을 알기에 레이첼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껑충하게 키 큰 그의 머리 위로, 공중 도로를 이탈한 차가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이윽고 잭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썩을! 머리통 깨질 뻔 했네! 네놈 차도 부숴줄까! 몇 개의 시선이 잭에게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 틈에 레이첼은 잭의 옆에 설 수 있었다. 흰 손이 잭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부수지 마, .”


  “?”


  “잭이 부수면, 대니 선생님이 보상해줘야 하니까?”


  “그럼 부숴도 되는 거 아니냐?”


  “아니라고 생각해.”


  짧은 욕설이 이어졌지만, 잭의 시선은 곧 앞을 향했다. 무거워, 임마. 레이첼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앞서 가는 잭의 발걸음이 아주 약간, 느려졌다. 둘은 묵묵히 혼잡한 중앙 구역을 가로질렀다. 옅은 인공 구름이 그들을 따라 느리게 이동하고 있었다.


  구역 외곽으로 통하는 지하도로를 걷는 동안 벽면에 설치된 입체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드로이드 광고가 나왔을 때 레이첼은 잭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잭은 집에서든 거리에서든 마음에 드는 방송을 발견하면 한참 동안 멈춰 서서 스크린을 바라보곤 했다. 잭의 시선은 매력적으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남성 어린이형 안드로이드 모델에 머물러 있었다. 뭘 웃고 앉았어.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봉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잭은 자신에게 향한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 녀석. 인공 안구에 탑재된 센서가 재빨리 레이첼의 표정을 읽고 관련 정보를 송출했다. 잭은 시야를 가리는 온갖 메시지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저거, 재수 없게 웃잖냐.”


  말을 내뱉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잭을 쫓으며 레이첼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붉은 머리카락의 안드로이드 모델은 미소를 지으며 외국어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레이첼은 잠시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잭과 함께 지하도로를 빠져나갔다.


  점차 지저분해지는 도로의 끝에는 돔 형태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비허가 구역이 있다. 대니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비허가 구역에 발을 내딛었던 날처럼, 구역의 문을 통과하며 레이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돔의 천정에서부터 인공조명이 구역 전체를 관통하며 작열하고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진 내부 곳곳에서 간이음식점의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개미굴이 따로 없구만. 레이첼은 잭이 내뱉은 표현이 이곳에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헤아릴 수 없이 뻗어나간 골목길이 구역 전체를 연결했고, 사람들과 안드로이드는 끊임없이 그 길을 오가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둘은 비허가 구역 중심부에 높이 솟아오른 건물로 향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전송기를 설치하면 되는 걸 가지고.”


  어깨로 문을 밀어 건물 안에 들어선 잭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텅 빈 복도에 그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그럼, 다음부턴 나 혼자 갈까?”


  레이첼이 잭을 올려다보았다. 빈 벽을 울리던 발소리가 멎었다. 잭은 이제 양 손에 쥔 짐을 번갈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놈, 뭐라고 지껄였더라. 코피를 흘리며 뒷문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던 남자를 떠올리자 신경 회로에서 기분 좋은 불꽃이 튀는 것만 같다. 잭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네가 이걸 전부 들고 올 수 있냐?”


  “나눠서 조금씩 들고 오면.”


  “집어 쳐. 네 걸음으로는 하루도 모자라다고.”


  승강기 앞에서 레이첼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버튼을 짧게 두 번 누르고, 검지 손가락을 버튼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건물에 등록된 생체 정보에 안드로이드는 없었다. 건물이 지어질 때는 아무도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함께 승강기를 탈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잭은 혼자 올 때면 늘 더러운 계단을 직접 오르곤 했다. 육중한 소음과 함께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대니의 병원은 오 층에 있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안드로이드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니의 진료실을 노크하려던 레이첼을 저지하고, 잭은 대기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 자식하고 할 말 있으니까 이따 들어와라. 데스크의 안드로이드가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대니가 주문하는 약의 수가 늘었다. 단체로 싸움질이라도 하고 다니냐? 잭이 진료실 바닥에 짐을 내려놓았다. 의료 패널을 들여다보던 대니가 안경을 벗고 얼굴을 문질렀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 레이첼은 어디 있지?”


  “네놈이 알 바 아니야.”


  “태도는 여전하군. 대체 누가 널 만들었을까, ?”


  말투는 상냥했지만 대니의 시선은 바닥에 놓인 짐을 향하고 있었다. 잭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짐을 다시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잭이 블랙마켓에 다녀오게 된 후로 대니는 항상 잭의 눈앞에서 물건을 확인했다. 대니가 신중하게 약의 케이스를 확인하는 동안 잭은 팔짱을 끼고 진료실을 서성였다. 또 한참 걸리겠군. 윤이 나도록 닦인 바닥 위에 옅은 회색 발자국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약품을 분류하던 대니가 고개를 들었다.


  “하나가 없잖아, .”


  “그 자식이 시답잖은 수작을 부리길래 뺐다. 그런 걸 들고 와 봤자 네놈이 받을 리가 없잖냐.”


  대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쓸모 있어져도 곤란한데 말이지. 애초에 잭에게 기대를 하고 맡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입이 무겁고, 써먹기 좋으며 많은 짐을 나를 수 있다면 충분했다. 있으면 편리하지만, 없어져도 아쉽지 않을 정도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을. 대니는 약을 한 쪽으로 밀어 두고 잭에게 약속한 금액을 건넸다.


  여느 때라면 돈을 받아들고 곧장 몸을 돌렸을 테지만, 잭은 돈을 쥔 채 서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대니가 짧게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잭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대니는 눈을 감고 잭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욕설과 잡다한 이야기를 걷어내고 나면, 핵심은 결국 전송기를 설치하라는 것뿐이다. 대니는 천천히 눈을 떴다.


  “, 몇 번이나 말해야 할까? 여긴 비허가 구역이라고. 전송기 부품 하나라도 들이는 순간 병원은 끝이야. 이제는 그 낡아빠진 코어에 새길 법 하지 않아?”


  “! 이딴 약이나 쓰는 주제에 할 말이냐, 그게? 애초에 면허도 없이 남의 배 가르는 놈이 이제 와서 겁나는 거냐?”


  대니의 흰 손이 진료실 벽에 투영된 의료허가서를 가리켰다. 벌써 몇 번이나 잭이 스캔을 시도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차단당한 허가서였다.


  “안타까워, . 눈앞에 있어도 모르다니. 널 손 볼 수 있을 만큼 늙은 엔지니어가 있을지 궁금하군. 내가 직접 네 머리를 열어볼 수도 있겠지만, 보다시피 난 사람 전문이거든.”


  잭의 관자놀이에서 가는 빛이 새어 나왔다.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빛은 경고를 알리는 붉은 색이었다. 붕대로 가린 얼굴에서 표정을 읽는 것보다, 그의 인공 회로가 알려주는 색을 읽는 편이 쉬웠다.


  대니가 손을 내저었다.


  “소란을 일으킬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겠지. 난 기계 파편을 치우고 싶지 않.”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잭이 책상을 내리쳤다. 충격 대비 코팅이 나뭇결을 따라 산산이 쪼개졌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보통의 안드로이드라면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강도로 제작한 책상이었다. 대니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성가신 깡통 같으니.


  지금까지 대니는 여러 차례 잭의 폐기를 고려해 왔다. 비허가 구역 근처에도 오기 싫어하는 관리국 직원을 구슬려 보기도 했지만,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문제가 많은 안드로이드가 한 둘인가요. 마지막으로 접촉했을 때 직원은 그가 건네는 돈을 거절했다.


  한동안 잠잠한 듯 했는데, 고작 전송기 따위로 이런 꼴이라니.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대니는 바닥에 나뒹구는 의료 패널을 집어 들었다. 예약한 환자가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잭의 거친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대니는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폐기당하고 싶은 거라면 관리국에 연락하겠어. 나로서도 환영이거든.”


  “그전에 내가 널 때려죽이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


  “할 수 있다면 해 봐, . 그럼 이곳의 유일한 의사는 사라지겠지. 곤란한 사람들이 꽤 많이 생길 거야. 그들이 널 내버려 둘까?”


  잭은 작게 중얼거렸다. 알 바냐. 그러나 관자놀이 부근을 통과하는 인공 회로는 이제 완전한 초록빛을 내뿜고 있었다. 모든 프로그램이 안정되었다는 신호였다.


  대니의 말마따나, 그의 병원은 비허가 구역의 유일한 의료 시설이었다. 중앙 구역의 병원보다 많은 치료비를 청구하는 대신, 이곳은 누구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연합 보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니의 존재는 각별했다. 비록 대니 또한 블랙마켓의 단골이라 할지라도.


  대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됐어. 네 처분 따위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소모적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다시 묻겠는데, 레이첼은 어디 있나?”


  잭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조그맣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잭이 손을 뻗어 잠금 버튼을 눌렀다. 바닥에 흩어진 케이스들을 짓밟으며 잭은 대니에게 다가갔다. 형형하게 빛나는 인공 안구와 시선이 마주치자 대니는 그대로 토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잘 들어, 이 돌팔이 자식. 잭이 목소리를 낮췄다.


  “구역질나는 병원 따위 알까 보냐. 가게의 그 시커먼 놈이 저 녀석을 기억했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냐?”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


  “닥쳐 봐! 이 짓거리를 때려치우든가, 빌어먹을 전송기 가져 와. 그 전까지 부르면 네놈 멱부터 따버릴 줄 알아.”


  “꺼져, . 그 얼굴 더 보고 있다간 오늘 점심 메뉴를 다시 확인할 것 같으니까.”


  몇 마디 욕설을 내뱉은 잭이 진료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바깥에서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잭의 말에 묻혀 지워졌다. 대니는 데스크의 안드로이드를 호출하며 짧게 덧붙였다. 깨끗하게 치우도록.


  그는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려 몸을 파묻었다. 잭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레이첼에 관해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예측했던 것보다 필요 이상으로 잭은 레이첼을 감싸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자신이 레이첼을 만나는 것조차 간섭하고 있지 않은가.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는데. 대니의 미간 사이로 칼로 그은 듯 한 선이 새겨졌다. 레이첼이 잭을 데리고 왔을 때, 조금 더 강경하게 대했어야 했다. 안전하고 성능 좋은 안드로이드가 하루에도 수십 대씩 출시되는 와중에, 그런 쓰레기 같은 깡통에 집착하다니. 조심스럽게 잭을 가리키던 레이첼과 그녀의 푸른 눈이 떠오르자 대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너무 성가시단다, 레이첼.


  청소를 마친 안드로이드가 예약 환자의 도착을 알렸다. 대니는 의자를 돌려 앉았다. 책상이 있던 자리에는 환자용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료해야 할 환자의 눈은 가까이 들여다볼 가치가 있었기에, 그는 의자를 조금 앞으로 당겨 앉았다.


  문이 열리자, 대니는 상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잭은 거의 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대니의 병원을 방문했던 날, 그는 또 다른 시선이 자신에게 따라붙은 것을 알아차렸다. 블랙마켓에서부터 쫓아왔나? 단언하기엔 수가 적었고, 무시하기엔 노골적이었다. 레이첼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잭은 구역 전체를 돌아 다녔다. 간혹 떠돌이 안드로이드가 보이면 붙잡고 스캔을 시도했지만 숨겨진 카메라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시선을 유도해도,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시선은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더욱 불쾌하고 진득하게 바뀌어갈 뿐이었다.


  고작 부품을 노리는 거라면, 모습을 드러내도 충분하지 않은가. 잭의 생각과 달리 시선은 그를 시험하는 듯, 혹은 그가 지쳐서 어딘가에 멈추기를 바라는 듯 끈질겼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잭은 데이터를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장기전이 되면 불리한 쪽은 자신이었다.


  삼 일째에 시선은 잭에게서 말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혹은 충분한 정보를 얻어낸 것처럼. 잭으로서는 찜찜한 해방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길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가 없어, 그는 최대한 많은 골목길을 거쳐 집으로 되돌아왔다. 짧은 충전을 거치고 다시 거리로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시끄럽고 지저분한 풍경이었다. 잭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주변을 탐지하며 정찰을 이어 나갔다.


  하루 종일 구역 전체를 스캔하고 돌아와 충전 기계에 들어가는 나날이 반복되었으나 별다른 수확이 없어 염증을 느낄 무렵, 레이첼이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벌써 삼 주 째 대니에게서 연락이 없다. 대량으로 약을 구매했다고 해도, 병원을 찾는 인원을 고려하면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터였다. 성가신 놈이 조용하니까, 좋은 거 아니냐? 잭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정말로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에너지였다.


  충전 장치로 다가서는 그의 발목을 레이첼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그럼 내가 선생님한테 다녀올 테니까.”


  잭은 뒤돌아섰다. 레이첼은 이미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니가 바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귀찮을 정도로 오던 대니의 메시지가 끊긴 것이 조금은 편안했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도 몇 번이나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자 레이첼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법적 보호자인 대니에게 이변이 생기면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안드로이드인 잭은 법적으로 레이첼에게 어떤 그늘도 제공할 수 없었으니까. 잭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다녀올게. 레이첼이 현관으로 향하자 잭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병원에 잠깐 가는 정도라면,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지는 않을 것이다.


  “, 기다려!”


  평소였다면 레이첼에게 밀려 함께 나가는 쪽을 선택했겠지만, 잭은 우격다짐에 가까운 말들로 레이첼을 집 안에 붙들어놓았다. 레이첼은 못 미더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결국 현관을 나서는 잭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여간 고집은 더럽게 세 가지고. 현관문 밖으로 펼쳐진 더러운 골목길을 걸으며 잭은 작게 중얼거렸다.


  대니의 안부야 그가 알 바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가 자신이 했던 말을 염두에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전송기를 설치했다면 부를 일이 없겠지.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잭은 몇 개의 골목을 통과했다. 구역 변두리에 있는 집에서 대니의 병원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 터라, 서두르지 않으면 병원 문손잡이를 잡다가 방전될 지도 모른다. 그딴 우스운 꼴 누가 보게 할까 보냐. 잭은 이제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간이상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 잭은 길 끝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독특한 외관 때문에 주목을 받는 일은 익숙했다. 다만 근 한 달 가까이 시선에 예민해진 잭으로서는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넘기기 어려웠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해 손짓까지 보내고 있다면 더더욱.


  잭은 스캔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익숙한 정보들이 출력되었다. 인공 피부를 비롯한 신체 부품 몇 개를 교체했지만, 그가 알고 있는 안드로이드들이었다. 잭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불필요한 데이터는 주기적으로 삭제하고 있지만, 자신을 매립장에 직접 던져 넣었던 안드로이드를 지워 버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 재수가 없으려니까. 잭은 멈춰 섰다. 그들은 이제 서 있는 간격을 넓혀 길을 막고 있었다.


  레이첼이 그에게 대니와의 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이야기를 노출하지 않는 것처럼, 잭도 매립장에 버려져 있던 이유를 밝히길 꺼렸다. 어찌 됐든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 이런 곳에 사는 놈들 중에 좋은 사연 들고 나오는 놈이 있었나. 잭은 스캔 프로그램을 껐다. 이들을 따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둘 중 어느 쪽의 에너지가 먼저 고갈될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레이첼과 함께 나오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일까.


  잭이 묵묵히 서 있자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안녕, !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잘 지내긴 개뿔. 길 막지 말고 꺼져.”


  서운한걸. 남자가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이내 그들의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거리를 메웠다. 잭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의 웃음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고,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뭘 웃고 자빠졌어. 잭이 반응할 즈음이면 그들은 일제히 무표정한 얼굴로 잭을 응시하곤 했다. 그들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취향대로, 하나의 명령 체계 안에서 언제든 빠른 반응을 보이도록 개조된 탓이었다. 당시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던 안드로이드들 중에서, 잭은 유일하게 거부라는 답을 내놓았다. 잘 싸우기만 하면 됐지, 아무 때나 쳐 웃기까지 하라고? 그 말이 그가 지내던 불법 격투장에서 했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전원 장치를 끄고 내다 버리기까지 했으니, 새삼 그들이 자신을 다시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이봐, . 다시 입을 연 남자의 말투는 높낮이가 일정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고, 함께 가줘야겠어.”


  이젠 방법이 없다. 잭은 눈앞의 남자를 밀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경고. 에너지 잔량 6%. 충전을 시작해 주십시오.]


  잭은 시야에 출력되는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며 방향을 꺾었다. 앞으로 몇 시간은 버틸 수 있겠지만, 자신을 뒤쫓아 오는 안드로이드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잭은 뒤를 돌아보았다. 꺼져, 이 새끼들아! 좁은 골목을 따라 달려오던 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가, ! 그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한 명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발소리마저 일정했으며, 구호처럼 외쳐대는 같이 가, ! 이라는 말을 내뱉는 타이밍도 같았다.


  환장하겠네. 잭은 낮은 담을 타 넘었다. 자신이 반강제로 떠난 후에도 몇 차례의 개조가 이어진 게 분명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수십 마리의 개미가 군집을 이루어 움직이듯, 그들은 오직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달리고, 발이 걸려 넘어지고, 일어나고, 외치고, 또 달린다. 잭은 길가의 잡동사니를 팔로 쓸고, 발로 차며 방해물을 만들어냈지만 뒤쫓아 오는 안드로이드들은 점차 덜 넘어지고, 더 빨라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잭의 후드를 움켜쥐려 했지만 잭은 가까스로 몸을 숙일 수 있었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신경 회로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다. 잭은 이를 악물었다. 구역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곳은 아무리 소란이 일어나도 치안을 위해 나서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그는 뒤를 살폈다. 뒤쫓아 오는 안드로이드들이 손을 뻗었다. 잭은 비허가 구역 바깥으로 통하는 길을 향해 달렸다. 중앙 구역에는 패트롤이 있다. 떠돌이 안드로이드 한둘쯤은 못 본 척 하고 지나가는 이들이지만, 중앙 구역 내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들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이 끈질긴 놈들을 한두 명쯤은 처리해 주겠지. 비허가 구역 전체를 감싸고 있는 벽이 잭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잭이 온 몸을 내던지려는 찰나, 누군가가 잭의 옷깃을 잡았다. 중심을 잃은 잭은 휘청거렸고, 안드로이드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잭을 에워쌌다.


  유감이야, .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메아리처럼 그들의 말이 되풀이 된다. 유감이야, . 유감이야, . 유감이야. 잭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안드로이드의 다리를 걷어찼다. 단단한 금속이 서로 부딪치며 카랑카랑한 소리가 울렸다. 그들의 이목이 소리에 집중된 틈을 타, 잭은 몸을 일으켰다. 개조된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승산은 없다. 잭에게 밀쳐진 안드로이드가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문을 여는 잭을 뒤쫓았다.


  [경고. 에너지 잔량 5%. 전체 손상도 7%. 수리와 충전을 시작.]


  평소보다 빠르게 소모되는 에너지에 잭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지하도로의 스크린들이 빠르게 잭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늘 나오던 광고 대신, 뉴스를 내보내고 있는 듯 했다. 발소리에 묻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긴급테러대피중앙. 잭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말들이 손상으로 인한 착각이기를 바랐다. 옷깃을 잡아채려는 손들을 뿌리치며 잭의 발은 지하도로의 끝에 도달했다.


  …그 광경. 공중 도로를 상쾌하게 주행하던 수많은 차들은 지워지고, 서서히 밤 그늘이 내리는 하늘. 그곳에 몇 대의 군용 헬기가 별처럼 박혀 있었다. 비허가 구역을 연상케 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총소리, 폭발음, 알 수 없는 발밑의 진동, 경고에너지 잔량, 잭은 순간 멈추려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였다. 패트롤들은 잭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피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달렸고, 충분히 소란스러웠다. 잭은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려 했으나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그를 밀쳐내며 앞으로 나아가기 급급했다. 비켜, 비키라고! 잭의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는 폭발음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피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패트롤들이 울부짖다시피 내지르는 말들만이 몇몇의 주의 깊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잭이 나온 지하도로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잭은 고개를 들어 군용 헬기의 움직임을 좇았다. 위에서 조망하는 이들이라면 소란의 근원지를 따라 이동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안드로이드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잭은 스캔 프로그램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파에 밀려간 그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안드로이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잭은 몸을 낮췄다. 빌어먹을, 그대로 쓸려가 버리라고. 총이라도 맞든가. 대피소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서 잭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보폭을 맞춰 움직였다.


  폭발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 바닥은 곳곳이 파여 있어, 사람들은 자주 발이 걸려 넘어졌다. 발밑의 진동이 점차 거세진다. 진동의 근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패트롤들이 한 곳으로 이동했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구식 화물 차량 수십 대가 접근하는 중이었다. 수십 년 전에 사라졌을 지상 주행 차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렸지만 패트롤들의 위협사격에도 멈추지 않았다. 잭은 선두를 달리는 트럭에서 쏟아져 나오는 탄환들을 보았다. 군용 헬기가 조금씩 하강하며 대응 사격을 했지만 사람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우리는 회귀를 원한다. 트럭에 달린 증폭 장치에서 단조로운 문장이 흘러 나왔다. 주인을 감싸던 안드로이드 한 대가 탄환에 맞아 휘청거렸다. 잭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데이터를 불러내며 후드를 눌러 썼다. 안드로이드 무장 집단. 한 달 전에 보았던 뉴스 데이터가 출력되었다. 이 미친놈들이! 중앙 구역 외곽을 돌던 그들이 마침내 중심부까지 테러의 규모를 확산시켰다. 우리는 회귀를경고, 에너지 잔량 3%원한다살려주세요!인간을 최우선으로 보호해! 잭은 밀려들어오는 음성들을 차단하기 위해 귀를 막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다리를 움켜쥐었다. 잭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가, ! 상반신만 남은 안드로이드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잭은 반대편 발로 안드로이드를 걷어찼다. 도망치던 패트롤이 잭을 넘어뜨렸다. 잭과 안드로이드가 한 데 엉켜 바닥을 뒹굴었다. 같이 가, . 탄환이 잭을 붙들고 있는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관통했다. . 잭은 몸을 일으켰다. 후드가 벗겨지며 붕대로 감싼 그의 얼굴과, 관자놀이를 따라 흐르는 적색 회로의 빛이 드러났다. 안드로이드다! 트럭을 탄 누군가가 소리쳤다. 잭은 달리려 했으나, 몇 발의 탄환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치명적 손상보호를.]


  무언가를 생각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시야가 무너져 내린다. 쓰러진 잭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쳤다. 잭의 몸은 반동으로 들썩였다. 바닥에 인공 안구 하나가 나뒹굴었다. 한 때는 푸른색으로 반짝였을 아름다운 눈이, 무심하게 잭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따르듯, 잭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긴 밤의 끝이었다












#1. End

Posted by S.mojo
2018. 1. 1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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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A2017. 10. 7. 14:01

미도리야 이즈쿠 X 바쿠고 카츠키

주제: "고백" 




Patience

 





 

   바쿠고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굴욕감만을 안겨준 체육 대회의 결과였다. 몇 개의 가정과 계산이 머리를 스쳤다. 오래 전부터 그려 놓은 전도유망한 미래에 닿을 수 있는 레일이 또 하나 펼쳐진다. 자신을 지명한 수많은 사무소 중 인지도가 높은 히어로를 찾아, 바쿠고의 시선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사무소를 가지 치듯 지워가는 그의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무도 지명하지 않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미도리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떠오른다. 그것이 미도리야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쿠고는 책상을 걷어차고 일어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버리고 싶다.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해빠진 인간, 고작 그 수준임에도 자꾸만 발치로 다가와 걸음을 방해하고 자신의 앞으로 굴러가려는 그 모습을 마구 흩어놓고 싶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각자 어느 사무소를 고를 지, 무엇을 얻고 돌아올지 들떠서 목소리를 높이는 중에도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내 미도리야의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같은 중학교 출신이기 때문인지, 혹은 운이 나빠서인지 앞뒤로 나란히 앉은 탓에 바쿠고는 줄곧 뒷자리의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미도리야의 공기 의자로 다시 떠들썩해진 주변은 예민한 바쿠고를 무신경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시끄러.”

 

   여러 개의 목소리에 섞여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미도리야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다. 한껏 눌린 톤에 서서히 힘이 실린다. 기본적으로 겁쟁이인 주제에,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겠지. 마침내 단언하듯이 내뱉는 단어들의 조합은 늘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그 눈, 그 시선, 바쿠고는 문득 주변을 둘러본다. 입학한 이후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은 가지각색이었지만 유독 끈끈하게 달라붙는 종류의 시선이 있었다. 발뒤꿈치에서부터 올라와 두 다리를 단단히 휘감고 훑어가다 마침내 목덜미 즈음에서 멈추고 마는. 시선은 늘 한 방향에서 온다.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 지니스트 사무소를 적어 넣었다. 썩을 너드는 발도 붙여볼 수 없는, 그리하여 어떤 시선도 닿지 못할 장소였다.

 

   직장 체험 전 날, 바쿠고는 햇살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걸었다. 따뜻한 공기 때문에 옅은 졸음이 밀려왔다. 일찍 잠들 생각으로 키리시마의 권유도 무시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바쿠고는 자신을 부르는 미도리야의 목소리를 들었다. 계단을 두어 개쯤 내려가자, 목소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 기어이 바쿠고의 발목을 붙들었다. 썩을. 바쿠고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수선하게 뻗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뛰어오는 미도리야가 보인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커지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다려, 캇쨩. 마침내 숨을 고른 미도리야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들을 마주하는 동안, 바쿠고는 현상된 사진의 피사체처럼 굳어 있었다.

 

   교활한 새끼.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바쿠고는 눈앞에 없는 미도리야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말들에는 여느 때와 달리 당혹감과 경멸이 혼재되어 있었다. 첫 대전 훈련이 끝나고 미도리야가 자신을 불러 세웠을 때도 이렇게 얼이 빠지진 않았다. 그저 깎여나간 자존심의 부스러기를 쓸어냈을 뿐, 미도리야의 말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날, 바쿠고는 침대에 누워 여러 번 뒤척였다. 바싹 말라버린 미도리야의 입술이 그리던 부드러운 곡선과, 상기된 두 뺨에 선명하게 떠오르던 작은 주근깨가 쉴 새 없이 바쿠고의 눈앞을 떠다녔다. 반응할 가치도 없어. 불 꺼진 방 안에 바쿠고의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외면. 바쿠고의 첫 대답이었다.

 




* 

 




   촘촘한 빗살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니스트의 유연한 손길은 바쿠고의 머리카락을 기어이 차분하게 눕혀 놓았다.

 

   직장 체험 이틀 만에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발언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굳어버린 바쿠고 앞에 깨끗한 거울이 놓였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보며 지니스트는 히어로가 지녀야할 인품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거울에 맺힌 바쿠고의 상이 점차 일그러진다. 잘못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웃기지도 않은 헤어스타일 따위로 지난 이틀 간 잠을 설치게 했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잊혀져 간다. 그 사실이 바쿠고를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빌런을 때려눕히는 일이나 시민 구조 작업 등 인지도가 올라갈 수 있는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바쿠고는 그럭저럭 직장 체험을 얌전히 끝마칠 수 있었다. 휴대폰에는 키리시마와 카미나리, 세로가 보낸 라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 사무소와 관련된 시답잖은 이야기였지만, 개중에는 히어로 살해자 스테인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바쿠고는 내심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화면을 내렸다. 키리시마가 보낸 사진 한 장이 섞여 있었다.

 

   [미도리야가 보낸 건데, 역시 스테인이랑 마주쳤었나봐.]

 

   울창한 나뭇가지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골목길의 지도였다. 바쿠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철 안에서 바쿠고는 스테인에 관한 뉴스 몇 가지를 찾아 읽으며 익숙한 이름을 찾아내려 했다. 미도리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대체 뭐야, 그 새끼. 머릿속에 몇 가지 가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바쿠고는 뉴스 페이지를 껐다. 주제넘게 참견하고 다니는 것 또한 미도리야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밀다니. 불쾌한 기억이 사슬처럼 엮여 떠오른다. 노란 유치원복을 입고 다닐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단에 서 있는 자신에게 쏟아지던 말들, 데쿠 주제에 자신을 내려다보며 빨간 얼굴로 겨우 겨우 내뱉던 말들


   바쿠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그런 생각을 품은 적도 없었다. 하필 처음이 데쿠라니. 바쿠고는 여전히 반듯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을 거칠게 손으로 털어냈다. 선명하게 떠올랐던 미도리야의 검은 주근깨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자 쏟아지는 키리시마의 웃음에 바쿠고는 몇 차례 폭발을 일으켰다. 진짜냐, 바쿠고!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세로와 카미나리를 쫓으면서도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늘 그렇듯, 바쿠고는 무시했다. 십여 년 간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은 바쿠고에게 있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가볍게 위협하면 겁을 먹고 사라지는 잡몹들과는 달리, 미도리야는 언제나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좇았다. 그 시선에 담긴 동경, 선망을 바쿠고는 당연하게 여겼다. 비록 이제는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리긴 하지만, 유에이는 한가롭게 연애 놀이나 즐길 정도로 여유를 주지 않는다. 미도리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쿠고는 간만에 복귀한 일상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미도리야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바쿠고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올마이트를 상대로 한 빌런 제압 훈련에서 미도리야의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졌을 때도, 분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올마이트에게 덤벼들었을 때도, 출구 게이트를 향해 달려나가는 미도리야를 대신해 올마이트의 앞에 끼어들었을 때도, 바쿠고는 그렇게 믿었다. 데쿠는 언제나 내 뒤나 좇는 녀석이라고. 양호실의 흰 천장을 바라보며 바쿠고는 떨리는 두 팔을 쓰다듬었다. 옆 침대에는 미도리야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일어났어, 캇쨩? 미도리야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바쿠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겼겠지, 썩을 너드.”

 

   “캇쨩 덕분이야.”

 

   “닥쳐.”

 

   바쿠고는 서두르고 있었다. 리커버리 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쿠고는 직접 양호실을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온갖 감정이 들끓는 와중에도, 바쿠고의 조바심에는 미도리야가 뒤쫓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껄끄러움이 있었다. 교실 안에서 무심하게 시선을 넘겨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바쿠고의 불안한 예감은 이내 적중했다.

 

   “캇쨩, 기다려. 할 말이.”

 

   “닥쳐! 있어도 닥치고 없어도 닥치고 꺼져.”

 

   “하지만.”

 

   동요하고 있다. 바쿠고는 스스로를 최대한 억누르며 걸었다. 통증을 이기지 못했는지 미도리야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시선은 계속 바쿠고의 다리를 붙들었다. 캇쨩, 내가 한 말 기억해? 캇쨩. 나는 캇쨩을. 바쿠고는 조금 더 늦게 깨어났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썩을 너드.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 경멸이 당혹스러움으로, 당혹스러움이 동요가 되어 눈앞이 아찔해진다. 어떤 방식으로든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시야를, 생각을, 일상을 침범한다. 두 번째 거절 앞에서 미도리야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바쿠고는 예감하고 있었다. 침식이 일어나고 있다.

 

   “썩을 너드.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얼쩡거리면 날려버린다!”

 

   자신과 반대편으로 향해야 할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평생 거기 서 있던가. 홀가분하면서도 어쩐지 운동화 바닥에 진득한 껌이 달라붙은 것만 같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음을 방해하고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게 만드는 종류의 무언가가, 바쿠고의 발목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뒷목을 감싸고 있었다. 바쿠고는 털어내듯 몸서리를 치며 걸었다.

 

   “그럴 수 없어, 캇쨩. 그건 안 돼.”

 

   뒤늦은 대답이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 

 




   왜 하필 캇쨩이야?

 

   미도리야는 스스로에게 한 번, 되물어본 적이 있다. 올마이트의 영상을 틀어 놓고 집중이 흐트러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미도리야는 수십 가지 이유를 즉각적으로 댈 수 있었다. 화려하고, 강한 캇쨩.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캇쨩. 닮아가고 싶은 대상,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 거칠고 두꺼운 손바닥의 감촉이 새삼 궁금해질 때면 미도리야는 스스로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올마이트와는 달라. 올마이트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새우긴 해도 잠을 설친 적은 없었다. 칠판을 바라보다가도 문득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금빛 솜털이 자잘하게 돋아 있는 바쿠고의 흰 목덜미를 처음으로 발견한 순간, 미도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뻗은 손을 다급하게 감췄다. 거칠고 단단한 바쿠고에게도, 무방비하고 부드러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미도리야의 잠을 앗아갔다.

 

   왜 캇쨩이 아니면 안 돼?

 

   미도리야는 질문을 바꿨다. 유에이에는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매력적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상냥한 우라라카, 솔직한 아스이, 침착한 토도로키, 모범적인 이이다, 언제나 명랑한 키리시마, 미도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닿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시선을 뺏기는 것은 이제 미도리야에게 불가항력의 일상이 되었고, 두 번의 거절은 미도리야에게 사소한 타격에 불과했다. 바쿠고가 선선히 받아들였다면 미도리야는 자신의 얼굴을 후려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키리시마가 내민 손을 바쿠고가 잡는 순간, 미도리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빌런에게 납치되는 순간까지 바쿠고는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럼에도 키리시마가 내민 손은 잡을 것이라고 예측한 것은 미도리야 자신이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그 말은 자신이 내뱉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바쿠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미도리야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너무 숱한 거절을 받은 탓에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거절에 익숙했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거절당하기 위해 나아갔다. 눈 내리는 산을 맨 몸으로 헤쳐 나가는 사람은 감각이 마비되어 서서히 자멸한다고 했던가. 그리하여 열기와 냉기를 착각하고 홀로 뜨거워하는지도.

 

   미도리야는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면서도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으면 바쿠고의 가지런한 눈썹과 미간의 주름이, 쏘아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흰 목덜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던 얼굴이 선명해진다. , 역시.

 

   캇쨩이 아니면 안 돼.

 

 



* 

 

 



   반창고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끈끈한 흔적이 남았다. 바쿠고는 거칠게 뺨을 문질러 닦아냈다. , 데쿠 새끼. 제대로 쳤네. 먼저 손을 올린 것은 자신이었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부딪치면 이렇게 흔적이 오래 남는 것인지. 등을 돌리고 기숙사를 청소하는 동안 미도리야는 몇 번인가 말을 붙여 왔지만, 대개는 전투 스타일이나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바쿠고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불편한 주제를 꺼내지 않은 것에 안도할 지경이 되어서야, 바쿠고는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 데쿠 주제에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하루 먼저 수업으로 복귀하면서 미도리야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바쿠고는 청소기의 전원을 켜고 등을 돌렸다. 쓰레기를 봉투에 주워 담고 먼지를 빨아들였다. 가끔 코드가 소파에 걸려 휘청거릴 때마다 바쿠고는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 씨발! 데쿠! 코드 잡으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홀로 청소하기에는 유에이의 기숙사는 무식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바쿠고는 코드를 뽑고 남은 청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보며 얼굴에 남은 반창고를 떼어 냈다.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건, 오랜만이었다. 얼룩처럼 시야에 묻어나던 미도리야가 점점 옅어져 간다. 알 바냐. 바쿠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인내심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내리 누르는 온갖 중압감과 더불어, 힐끔거리는 미도리야의 시선을 참아주는 것 또한. 그러나 정작 후자에 대해서는 바쿠고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웃는 미도리야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걷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발짝 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은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건방지게 뭘 마주 보고 웃어. 바쿠고는 작은 덤벨을 쥐었다. 전신이 땀으로 범벅될 때까지 자가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 바쿠고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씨발. 착각하지 말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모른 채, 바쿠고는 빈 방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키리시마의 손을 잡았을 때,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 머물렀다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런 와중에 또 시작이냐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아래에서는 지옥 같은 육탄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불평할 겨를이 없었다. 그 때에는 미도리야의 시선마저도 덜 거슬릴 정도로, 일상으로의 복귀가 반가웠으니까. 결코 안도한 적은 없었다. 시가라키를 앞에 두고 팽팽하게 긴장했던 몸이 빨리 풀렸을 뿐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일들은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었고, 우습게도 자신이 찾아낸 돌파구는 미도리야였다


   미친 놈. 바쿠고는 피식 웃었다. 두 번씩이나 미도리야를 세워 놓고 가버린 주제에. 한껏 경멸한 주제에. 바쿠고는 자세를 바꿔 다리를 풀어 주었다. 얼굴에 맺힌 땀이 바닥에 깔린 카펫에 후두둑 떨어졌다.

 

   왜 난데? 한 번쯤은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쿠고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데쿠니까, 데쿠 같은 이유겠지. 그런 이유에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 타월을 꺼내 땀을 닦으며 바쿠고는 문득 깨닫는다. 방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음을. 이런 씨발. 이마에서 한 줄기의 땀이 마저 흘러내렸다.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캇쨩. 있어? 바쿠고는 굳은 듯이 방 한가운데에 서 있다. 대답하지 않아도 문이 열리고 미도리야가 부스스한 머리칼 아래에서 눈을 빛내며 들어설 것만 같다. 그럼 나는 어떤 표정으로 저 새끼를 바라봐야 하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해줄 게 있는데. 캇쨩, 어디 간 걸까? 중얼거리는 목소리, 바쿠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놔두고 꺼져.”

 

   문 아래의 틈새로 반듯한 종이가 들어온다. 갈게, 캇쨩. 바쿠고는 자신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미도리야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지만, 손이 닿은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일그러지고 있었다. 바쿠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몇 가지 욕설이 낮게 흘러나왔다. 동요를 넘어서는 무언가, 지각해버린 무언가가 바쿠고의 손끝에서부터 쿵쿵 울렸다. 미도리야에게만 한정된 경멸, 미도리야를 향한 당혹감, 동요, 끝내 미도리야를 찾아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끊어진 인내심, 인내심. 사실은 무엇을 참고 있었던 것인지. 바쿠고는 종이를 내팽개치고 문을 열어젖혔다.

 

   야, 데쿠! 한참 멀어진 부스스한 뒷모습이 지워지고 미도리야의 얼굴이 나타난다. 의아해하면서도 다가오는 미도리야를 향해 바쿠고는 할 말을 고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데쿠 새끼가 했던 그런 건 아니야. 그것보다 더 우월한 거지. 방문 앞에 선 미도리야의 멱살을 쥐고, 바쿠고는 마침내 몇 마디를 내뱉었다.

 

   바쿠고는 그렇게 환한 웃음을, 이전에 본 적이 없다. 두 팔이 바쿠고를 끌어당겼다. 젖은 목덜미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씨발, 땀 냄새 난다고.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바쿠고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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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아카 전력 60분 [자유주제]

키리시마 에이지로 바쿠고 카츠키




차가운 사랑 냄새









 

 키리시마는 조금 울었다. 오후 3시의 뉴스 속보에서 도심을 습격한 빌런과 대치 중인 히어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타는 냄새가 난다. 키리시마는 소파를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집을 나가기 전 바쿠고는 냉장고의 야채들을 전부 꺼내 오랜 시간을 들여 씻고, 자르고, 다져 놓았다. 도마와 칼이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냄비를 꺼내는 소리, 불린 쌀과 물을 쏟아붓는 소리, 주걱이 냄비 바닥을 긁는 희미한 소음을 키리시마는 누워서 듣고 있었다.


  요리는 언제나 바쿠고의 몫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재료를 다듬고, 가스렌지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올리는 동안 자신은 식탁에 접시를 놓으며 하루의 일과를 유쾌하게 떠들곤 했다. 바쿠고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가끔 어, 그러냐. 시끄러워. 정도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사무소가 다른 두 사람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지명도가 올라갈수록 바쿠고의 모습은 부엌에서 차츰 지워져갔지만, 키리시마는 식탁에 팔을 올려놓고 바쿠고에게 말을 거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조금씩 옅어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천천히, 가끔은 생각에 잠겨 잊었던 것처럼 빠르게,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멎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았다.


  “먹어.”


  협탁에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바쿠고가 짧게 말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은 채 바쿠고의 기척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열 때문에 젖은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숨처럼 짧은 시간이었다. 백기를 든 쪽은 언제나 그랬듯, 키리시마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바쿠고는 발소리와 함께 침실을 빠져나갔다. 키리시마는 실눈을 뜨는 대신 바쿠고가 짐을 챙겨서 집을 나가는 작은 소음들에 귀를 기울였다. 공기가 천천히 식어간다. 이제 집 안에서 소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키리시마는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형편없는 연기력이야, 에이지로. 몇 차례 코를 풀고, 키리시마는 표면이 굳은 죽을 휘저어 떠 먹었다. 지독한 감기였다. 집을 나가겠다는 바쿠고를 붙들 힘도 없었다. 그러나 좋은 핑계는 아니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키리시마는 짐을 싸는 바쿠고를 가만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옷장에서 옷을 직접 꺼내주었을지도 모른다. 바쿠고가 마음에 들어 했던 자신의 옷도 내 주었을 터였다. 그렇게 차분하고 평화롭게, 바쿠고를 배웅할 수도 있었다. 관계를 마무리지을 때도 그만큼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키리시마는 알고 있었다. 바쿠고가 냄비 가득 죽을 끓여놓고 간 것처럼.


  키리시마는 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약 기운에 취해 꼬박 잠을 잤고, 다음 날은 일어나서 죽을 데워 먹었다. 냄비 뚜껑에 올려진 메모를 보며 웃기도 했다. 남기지 말고 쳐먹어. 휘갈긴 글씨였지만 힘을 주어 썼는지 약간 번져 있었다. 밤에는 거실로 나와 TV를 켜 놓고 소파에 웅크려 잤다. 삼일 째에는 카미나리와 세로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바쿠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언급만으로도 키리시마가 무너질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안부만을 물었다. 고작 삼 일만에 다 알게 된 것일까. 생각들이 밀려올 때면 키리시마는 채널을 돌려가며 바쿠고의 흔적을 좇았다.


  자신도 바쿠고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함께 살기로 한 것도, 떨어지기로 한 것도.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바쿠고가 몇 개의 가방을 들고 현관에 나타났고, 그 날 둘은 베개 하나를 함께 베고 잤다. 다음 날에는 바쿠고의 이불과 베개를 마련했다. 옷장의 절반을 비워 바쿠고의 옷가지를 채워 넣었다. 쓰지 않던 그릇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휴일에는 바쿠고와 어울려 나갔다. 어떤 겨울은 너무 추워서, 서로를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싸운 날에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이, 투박한 손끝이, 뻗친 머리카락과 고함이 너무나 아쉽고 그리워지곤 했다.


  조밀하게 채워 온 시간이 어느 날 갑자기, 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직감한 순간부터 키리시마는 외면했고, 바쿠고는 받아들였다. 어쩌면 키리시마가 받아들이고 바쿠고가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생겨난 균열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관계를 유지하려 할수록 균열이 커져갔다. 키리시마는 유에이의 체육 대회를 떠올렸다. 바쿠고, 그 때도 먼저 알았지. 옆구리에 꽂히는 주먹이 묵직했었다. 옷장 위에 올려두었던 바쿠고의 빈 가방에 짐이 채워졌다. 근성은 어디 갔냐. 바쿠고는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시간들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사무소로 복귀한 뒤 키리시마는 빌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바쿠고와 마주쳤다. 안녕, 바쿠고! 인사를 건넨 쪽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경화를 유지했을 때만 키리시마는 바쿠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과 날카로운 시선이 아주 잠깐, 자신에게 향했다가 이내 멀어져갔다.


  언제나 그렇듯,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쿠고는 현장을 떠났다. 바쿠고도 자신도, 받아들인 것처럼 짧게 스쳐가고 나면 키리시마는 비로소 경화를 해제했다. 남자답지 못하네, 에이지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늘었다. 자신과 바쿠고의 개성은 앞으로도 서로를 같은 현장에서 마주치게 만들 것이다. 그때마다 뻣뻣하게 굳어서 마주할 수는 없지. 키리시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은 바쿠고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야 했다.


  한동안 키리시마는 히어로 활동에 전념했다. 밤늦게, 때로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고, 침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휴일에는 카미나리들과 어울려 시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간혹 전광판에서 바쿠고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걸음을 멈추기도 했지만,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카미나리와 세로를 향해 웃어주었다. 바쿠고, 멋있네. 이것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키리시마는 생각했다


  바쿠고의 소식은 듣지 않으려 해도 각종 채널에서 쏟아져 나왔고,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는 키리시마는 적당히 둔감해지고 있었다. 바쿠고가 쓰던 그릇을 다시 꺼내어 쓰고, 손끝을 베이면서 스스로 요리를 했다. 들쑥날쑥한 크기의 재료를 대강 냄비에 쏟아붓고 가스렌지의 불을 켰다. 불을 중간에 맞춰 두고 키리시마는 거실로 돌아와 TV를 켰다.


  ‘, 바쿠고 코스튬이 바뀌었네.’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공격 방식 덕분인지, 화면에 클로즈업된 바쿠고의 뒷모습은 눈이 부셨다. 앵커는 바쿠고의 진압 방식에 대해 패널들과 진중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바쿠고, 이 방송 보면 화를 내겠는걸. 키리시마는 테이블을 내려치며 화를 내는 바쿠고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바쿠고가 내려쳐 일그러진 테이블 끝을 매만졌다. 새 테이블, 사야겠다. 이윽고 키리시마는 아주 조금, 울었다. 겨우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질 정도로만 울었다. 타는 냄새가 난다. 부엌에서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불을 끄고 키리시마는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긁었다. 주걱 끝에 눌어붙은 덩어리가 턱턱 걸렸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 미처 익지 못한 쌀알과 뭉그러진 양파를 함께 으깨가며, 키리시마는 오랫동안 냄비 안을 휘젓고 있었다. 탄내와 함께 따스한 열기가 빠져나왔다. 다시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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