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A2017. 9. 23. 20:33

히로아카 전력 60분 [자유주제]

키리시마 에이지로 바쿠고 카츠키




차가운 사랑 냄새









 

 키리시마는 조금 울었다. 오후 3시의 뉴스 속보에서 도심을 습격한 빌런과 대치 중인 히어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타는 냄새가 난다. 키리시마는 소파를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집을 나가기 전 바쿠고는 냉장고의 야채들을 전부 꺼내 오랜 시간을 들여 씻고, 자르고, 다져 놓았다. 도마와 칼이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냄비를 꺼내는 소리, 불린 쌀과 물을 쏟아붓는 소리, 주걱이 냄비 바닥을 긁는 희미한 소음을 키리시마는 누워서 듣고 있었다.


  요리는 언제나 바쿠고의 몫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재료를 다듬고, 가스렌지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올리는 동안 자신은 식탁에 접시를 놓으며 하루의 일과를 유쾌하게 떠들곤 했다. 바쿠고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가끔 어, 그러냐. 시끄러워. 정도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사무소가 다른 두 사람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지명도가 올라갈수록 바쿠고의 모습은 부엌에서 차츰 지워져갔지만, 키리시마는 식탁에 팔을 올려놓고 바쿠고에게 말을 거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조금씩 옅어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천천히, 가끔은 생각에 잠겨 잊었던 것처럼 빠르게,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멎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았다.


  “먹어.”


  협탁에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바쿠고가 짧게 말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은 채 바쿠고의 기척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열 때문에 젖은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숨처럼 짧은 시간이었다. 백기를 든 쪽은 언제나 그랬듯, 키리시마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바쿠고는 발소리와 함께 침실을 빠져나갔다. 키리시마는 실눈을 뜨는 대신 바쿠고가 짐을 챙겨서 집을 나가는 작은 소음들에 귀를 기울였다. 공기가 천천히 식어간다. 이제 집 안에서 소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키리시마는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형편없는 연기력이야, 에이지로. 몇 차례 코를 풀고, 키리시마는 표면이 굳은 죽을 휘저어 떠 먹었다. 지독한 감기였다. 집을 나가겠다는 바쿠고를 붙들 힘도 없었다. 그러나 좋은 핑계는 아니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키리시마는 짐을 싸는 바쿠고를 가만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옷장에서 옷을 직접 꺼내주었을지도 모른다. 바쿠고가 마음에 들어 했던 자신의 옷도 내 주었을 터였다. 그렇게 차분하고 평화롭게, 바쿠고를 배웅할 수도 있었다. 관계를 마무리지을 때도 그만큼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키리시마는 알고 있었다. 바쿠고가 냄비 가득 죽을 끓여놓고 간 것처럼.


  키리시마는 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약 기운에 취해 꼬박 잠을 잤고, 다음 날은 일어나서 죽을 데워 먹었다. 냄비 뚜껑에 올려진 메모를 보며 웃기도 했다. 남기지 말고 쳐먹어. 휘갈긴 글씨였지만 힘을 주어 썼는지 약간 번져 있었다. 밤에는 거실로 나와 TV를 켜 놓고 소파에 웅크려 잤다. 삼일 째에는 카미나리와 세로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바쿠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언급만으로도 키리시마가 무너질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안부만을 물었다. 고작 삼 일만에 다 알게 된 것일까. 생각들이 밀려올 때면 키리시마는 채널을 돌려가며 바쿠고의 흔적을 좇았다.


  자신도 바쿠고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함께 살기로 한 것도, 떨어지기로 한 것도.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바쿠고가 몇 개의 가방을 들고 현관에 나타났고, 그 날 둘은 베개 하나를 함께 베고 잤다. 다음 날에는 바쿠고의 이불과 베개를 마련했다. 옷장의 절반을 비워 바쿠고의 옷가지를 채워 넣었다. 쓰지 않던 그릇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휴일에는 바쿠고와 어울려 나갔다. 어떤 겨울은 너무 추워서, 서로를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싸운 날에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이, 투박한 손끝이, 뻗친 머리카락과 고함이 너무나 아쉽고 그리워지곤 했다.


  조밀하게 채워 온 시간이 어느 날 갑자기, 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직감한 순간부터 키리시마는 외면했고, 바쿠고는 받아들였다. 어쩌면 키리시마가 받아들이고 바쿠고가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생겨난 균열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관계를 유지하려 할수록 균열이 커져갔다. 키리시마는 유에이의 체육 대회를 떠올렸다. 바쿠고, 그 때도 먼저 알았지. 옆구리에 꽂히는 주먹이 묵직했었다. 옷장 위에 올려두었던 바쿠고의 빈 가방에 짐이 채워졌다. 근성은 어디 갔냐. 바쿠고는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시간들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사무소로 복귀한 뒤 키리시마는 빌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바쿠고와 마주쳤다. 안녕, 바쿠고! 인사를 건넨 쪽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경화를 유지했을 때만 키리시마는 바쿠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과 날카로운 시선이 아주 잠깐, 자신에게 향했다가 이내 멀어져갔다.


  언제나 그렇듯,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쿠고는 현장을 떠났다. 바쿠고도 자신도, 받아들인 것처럼 짧게 스쳐가고 나면 키리시마는 비로소 경화를 해제했다. 남자답지 못하네, 에이지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늘었다. 자신과 바쿠고의 개성은 앞으로도 서로를 같은 현장에서 마주치게 만들 것이다. 그때마다 뻣뻣하게 굳어서 마주할 수는 없지. 키리시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은 바쿠고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야 했다.


  한동안 키리시마는 히어로 활동에 전념했다. 밤늦게, 때로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고, 침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휴일에는 카미나리들과 어울려 시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간혹 전광판에서 바쿠고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걸음을 멈추기도 했지만,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카미나리와 세로를 향해 웃어주었다. 바쿠고, 멋있네. 이것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키리시마는 생각했다


  바쿠고의 소식은 듣지 않으려 해도 각종 채널에서 쏟아져 나왔고,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는 키리시마는 적당히 둔감해지고 있었다. 바쿠고가 쓰던 그릇을 다시 꺼내어 쓰고, 손끝을 베이면서 스스로 요리를 했다. 들쑥날쑥한 크기의 재료를 대강 냄비에 쏟아붓고 가스렌지의 불을 켰다. 불을 중간에 맞춰 두고 키리시마는 거실로 돌아와 TV를 켰다.


  ‘, 바쿠고 코스튬이 바뀌었네.’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공격 방식 덕분인지, 화면에 클로즈업된 바쿠고의 뒷모습은 눈이 부셨다. 앵커는 바쿠고의 진압 방식에 대해 패널들과 진중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바쿠고, 이 방송 보면 화를 내겠는걸. 키리시마는 테이블을 내려치며 화를 내는 바쿠고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바쿠고가 내려쳐 일그러진 테이블 끝을 매만졌다. 새 테이블, 사야겠다. 이윽고 키리시마는 아주 조금, 울었다. 겨우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질 정도로만 울었다. 타는 냄새가 난다. 부엌에서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불을 끄고 키리시마는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긁었다. 주걱 끝에 눌어붙은 덩어리가 턱턱 걸렸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 미처 익지 못한 쌀알과 뭉그러진 양파를 함께 으깨가며, 키리시마는 오랫동안 냄비 안을 휘젓고 있었다. 탄내와 함께 따스한 열기가 빠져나왔다. 다시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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