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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21 [살육의 천사-잭x레이] 대신, 손을
Angels of Death2016. 6. 21. 01:37

대신, 손을

 

 



-, 아파.


레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른 손목을 휘감은 잭의 손이 순간 느슨해졌다.

 

 



 

*

 

 

 


좁히지 못하는 거리 때문에 언제나 종종거리는 레이첼을 잭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기대할 수 없어. 점점 작아지는 잭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레이첼은 다리에 온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멀찍이서 재촉하는 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줄 수 없다고. 그 목소리는 언제나 레이첼을 뛰게 만들었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의식하고 싶지 않아서, 레이첼은 잭을 향해 내달렸다. 기다려, . 턱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차마 내뱉을 수 없도록, 잭은 레이첼이 뛰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곤 했다.


잘 알고 있어. 기대할 수 없어. 잭의 그림자가 햇살을 가려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하면, 비로소 레이첼은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잭에게 수배령이 내려진 뒤로 두 사람은 어두운 밤에 인적이 드문 골목길만을 이용해 왔다. 그건 잭을 위해서도, 레이첼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선택임을 알고 있지만 대낮의 햇살을 그리워한 쪽은 예상 외로 잭이었다. 나는, 그런 것 신경쓰지도 않는다고. 어느 골목길 안쪽에서 잭이 쓰레기통을 걷어차며 내뱉은 말은, 불안해하는 레이첼을 대낮의 거리로 이끌었다. 상반신을 휘감은 붕대와 푹 눌러쓴 후드 때문에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잭은 거리로 나오면 어느 때보다도 걸음이 빨라졌다. 보호소의 창문을 깨고 나타났던 밤처럼 기분 좋은 듯이 웃기도 하면서, 가끔 레이첼에게 그림자로 햇살을 가려주는 거리를 유지해주는 것이 잭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배려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레이첼은 도저히 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잭은 불안하지 않아? 어두운 은신처 안에서 레이첼이 말을 걸었을 때, 잭은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잔에 물을 따르듯, 어느 순간 덜컥하고 미끄러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감정들은 오직 레이첼만의 것처럼 흘러 넘친다. 고작 열 세살. 레이첼은 자신의 나이에 기대보려 했지만, 그런 어리광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아주는 잭이었다면 이렇게 뛰지 않을 것이다. 뛰는 동안 레이첼의 표정은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아직, 잔이 넘치지 않았어. 아직, 단 한 방울의 자리가 있어. 출렁이는 머리카락처럼 무언가가 등을 툭툭 두드리는 것 같다. 앞서 가던 잭이 멈춰 섰다.


-아직도 뛰고 있어?

 

잭의 말이 레이첼에게 햇살처럼 부서진다. 쏟아진다. 작고 투명한 잔에 바다를 들이부은 것처럼 급기야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레이첼의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언제까지? 레이첼, 똑똑한 레이첼은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다. , . 레이첼의 입술에서 터져나오는 말들은 완성되지 못하고 까만 구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멈춰 선 잭을 사람들이 지나치고, 레이첼의 뒤에서 불쑥 솟아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거리의 일부처럼 잠시 박제되어 있다가, 다시금 잭의 말로 부서졌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기대할 수 없다고, 레이첼은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세웠다. 은신처에서부터 잭의 뒤를 쫓아, 레이첼은 달리고 또 달렸다. 일으켜진 것은 어느 쪽의 레이첼이었을까. 떨리는 다리를 붙드는 레이첼에게 긴 그림자가 뻗어오고 있다. , 젠장. 이제 잭은 레이첼의 코앞까지 다가와 작은 등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이봐, 레이. 레이첼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눌러쓴 후드 아래에서 검은 눈동자와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관통할 것처럼 빛나고 있다.

 

-그만 뛰어도 된다고. 언제까지 뛸 거야?

 

레이첼은, 작고 부서진 잔을 쥐고 있는 소녀는 대답할 수가 없다. 붕대를 휘감은 손이 레이첼의 손목을 붙들었다. 어느 조용한 겨울의 정경처럼, 마른 나뭇가지 위에 어느 새 쌓인 눈처럼, 레이첼은 떨쳐낼 수 없는 감각에 붙들렸음을 깨달았다.

 

 

 

 

*


 

 

 

-, 아파.

 

레이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잭의 손이 순간 느슨해졌다. 대답은, 역시나 기대할 수 없지. 레이첼은 한결 느려진 잭의 걸음에 맞춰 걷고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 은신처로 되돌아오기까지, 잭은 평소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흥미로운 물건 앞에서는 멈춰 서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게의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면서 사소한 물건들을 갖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것처럼, 잭은 진열된 신발을 물끄러미 보고 지나쳐, 베이커리 앞에서 멈추기도 했다. 잭은 이런 것들을 보는구나. 은신처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느려지는 잭을 올려다보며, 레이첼이 물었다. , 무슨 생각해? 잭이 레이첼을 내려다보았다. 안 해, 아무 것도.


조심조심 새하얀 뼈를 깎아나가듯이, 레이첼은 말을 고른다. 잭은, 이라고 운을 떼면 그 뒤에는 너무나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나올 것 같다. 사막에서 단 하나의 모래 알갱이를 찾는 사람처럼 레이첼은 오랫동안 생각한다. 두 사람의 시야에 좁은 골목길 끝에 숨겨진 은신처가 들어온다. 잭의 손은 금방이라도 풀려 버릴 것처럼 느슨해져 있다. 한순간 힘을 꽉 주었다가, 이윽고 사구의 모래가 흘러내리듯이 레이첼의 손목 바깥으로 풀려나간다. 레이첼은 그 순간에, 자신이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모래알을 발견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붕대로 촘촘하게 덮인 손가락에 레이첼의 가늘고 작은 손가락이 감긴다. 있잖아, .

 

-손목이 아니라, 손을 잡는 거야.

 

잭은 어째서, 라거나 왜, 라고 묻지 않았다. 크고 마른 손가락이 레이첼의 손을 감쌌다. 붕대의 까끌한 감촉 너머로 희미하게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착각이 일어날 것만 같다. 레이첼은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손을 잡고 가는 거야. 어느새 여기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되었는지 레이첼도 잭도 설명할 수 없지만, 잭은 으스러트릴 것처럼 레이첼의 손을 꽉 쥐었다가 고쳐 잡았다. 그래.

 

어둡고 허름한 은신처를 향해 두 사람이 보폭을 맞추어 걷는다. 레이첼의 걸음에 맞추느라 잭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서툴게 걷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은신처에 도달할 것을 알고 있다. 달리는 대신 걷고 있으니까. 손목 대신 손을 꼭 쥐고 있으므로.


Posted by S.m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