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of Death2018. 2. 1. 07:27

프리게임 온리전 SAVE & LOAD~저장은 습관화~』  에 나오는 회지

『Point at Infinity』  샘플본입니다. 

(회지에는 샘플의 내용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Point 

at 

Infinity





1. 백야





  남자는 한 손으로 잭이 내민 종이 끄트머리를 잡았다. 어두운 밤색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안, 잭은 묵묵히 서 있었다. 남자가 종이를 구겨 휴지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꽤 자주 오는 것 같은데? 네 주인도 상당히 심각한가 봐, ? 남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잭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카운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운터 뒤편의 문으로 사라졌다.


  블랙마켓의 인간들과 필요 이상으로 말을 섞지 마.


  잭에게 처음으로 일을 맡기던 날, 대니는 단 한 가지의 충고를 남겼다. 음성만으로도 신원 정보의 대부분을 도출해낼 수 있는 곳에서, 굳이 말을 꺼낸다면 침묵보다 가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이곳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그 대신, 무엇이든 빼앗길 수 있다.


  저딴 놈이랑 시시덕거릴까 보냐. 잭은 후드 점퍼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돌아다니는 로봇은 심부름 로봇이 전부인 이 거리에서 인간형인 잭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가게까지 오는 내내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주인이 있는 안드로이드를 함부로 팔아넘길 수는 없지만, 부품을 몇 개 빼돌리는 정도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 가게의 주인도 그런 패거리들과 한 패가 아니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잭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 가게 주인은 쓸 만 했는데. 결코 친절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거래를 제외한 푼돈벌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잭은 전 주인의 데이터를 삭제했다. 그는 삼 개월 전에 테러에 휘말려 죽었다.


  쓸 만한 사람은 언제나 일찍 죽고, 성능이 좋은 안드로이드는 빨리 망가진다. 잭은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가게 벽에 설치된 스크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드로이드를 외치는 무장 집단의 테러 확산을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건을 들고 나온 가게 주인이 잭의 시선을 따라 스크린으로 고개를 향했다. 화면 속의 안드로이드가 순식간에 파편이 되어 흩날리자, 남자가 혀를 찼다. 멍청한 놈들. 아깝게 무슨 짓이야. 어이,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야? 돈은?


  잭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폐 다발을 꺼내자, 남자는 약품 더미를 카운터 위에 쏟아 놓았다. 그가 지폐를 세는 동안 잭은 카운터 위의 약품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오기 전에 확인했던 목록과 일치했다, 약품 하나를 제외하고. 잭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이거.”


  잭은 약품 더미에서 낡은 종이 박스를 잡았다. 눈으로는 스캔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남자의 신체 온도를 주시했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손을 멈추고 지나치게 과장된 태도로 웃어 보였다. 고르지 못한 치열 사이로 군데군데 까맣게 썩어 들어간 치아들이 번들거렸다.


  “그거? 효과 끝내주지. , 실례. 소화 기관은 없는 건가?”


  “…….”


  “농담이야. 얼굴을 가려놔서 표정을 모르겠네. 이봐, 이래봬도 내 할아버지 때부터 해 온 일이야. 아닌가, 아버지 때부터였나?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고말고. 난 제대로 줬어.”


  잭은 서서히 상승하는 남자의 신체 온도와, 지폐를 꼭 붙들고 있는 굵은 손가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있었지, 이런 인간. 잭이 두 번째로 블랙마켓을 방문했을 때, 당시의 거래처 주인은 싸구려 약품 몇 개를 슬쩍 끼워 팔았다. 잭은 그 사실을 대니를 통해 확인했고, 분노한 잭이 다시 블랙마켓을 찾았을 때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종종 거짓말을 하지. 그걸 간파하는 것도 능력 아닐까? 대니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던 순간이 선명해진다. 남자가 잭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괜히 트집 잡지 말고, 어이, 어딜 스캔하고 있는 거야? 그 빌어먹을 거 당장 끄지 못 해?!”


  남자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할까. 팔목 째로 잘려나가도 저 손은 돈을 쥐고 있을 것이다. 깊게 생각하는 건 잭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남자를 달래서 좋은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건 대니에게나 적합한 일이었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잭은 한 손으로 후드 주머니를 뒤적였다.


  낡고 더러운 잿빛 천 사이로 두꺼운 나이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 멋진 칼이네. 남자는 적갈색으로 얼룩진 칼날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애써 웃었다. 잭은 손잡이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 이봐, 너무 심각하게 굴지 마. 나 이래봬도 평등주의자거든? 소리친 건 사과할게. 이건 거래를 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사소한, 아주 사소한 해프닝인 거지. 그러니까 진정하고, 워오! 가까이 오지 마!”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남자는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었다. 잭은 들고 있던 종이 박스를 카운터 한 쪽에 내려놓았다. 잭은 남자에게서 몇 장의 지폐를 되돌려 받았다.


  요즘 약값이 비싸져서 말이야, 오해하지 말라고. 창백하게 질렸던 남자의 뺨은 잭이 나이프를 집어넣자 서서히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말이 많은 남자다. 자신이 이 일을 맡기 전에는 대니나 레이첼이 이런 인간들을 마주했을 것이다. 전자는 알 바가 아니지만, 후자는 어떤 식으로든 불쾌한 결론을 도출했다. 잭은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물건을 포장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내민 꾸러미는 제법 묵직했다. 잭은 여전히 할 말을 찾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를 뒤로 하고 몸을 돌렸다.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남자가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니였다면, 남자의 말을 듣지 못하고 가게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잭의 프로그램은 인간의 발음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좋든 싫든 잭의 청력 기관에는 남자의 혼잣말이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여자애가 편했는데.

 

 




  레이첼은 눈으로 물고기의 움직임을 좇았다. 유선형의 몸통을 따라 길게 펼쳐진 홀로그램 지느러미가 섬세하게 물결쳤다. 수조의 끝과 끝을 오가는 그들은 깊은 바다 속을 누비듯, 부드럽게 유영하며 서로의 몸을 통과하고 있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레이첼 또래의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이 쪽 본다. 더 세게 두드려 봐. 몇 마리의 물고기가 방향을 바꿔 레이첼이 있는 구석으로 몰려들었다. 붉은 산호 가지 사이로 몇 개의 영상이 겹쳐지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뭐야, 신종도 똑같잖아. 가자. 아이들이 떠난 뒤에도 레이첼은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었다. 가게 안에서 작은 케이스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그녀를 스쳐갔다. 레이첼은 지갑 속 지폐의 수를 천천히 헤아렸다. 생활에 필요한 금액을 제외하고 나면 한참 부족한 액수였다.


  가지고 싶은 건 뭐든지 나에게 말해주렴. 대니는 습관처럼 레이첼에게 말했지만, 그가 가져오는 물건들은 언제나 너무 많았다. 레이첼이 소형 강아지 로봇에 관심을 보였을 때, 대니는 그녀의 방 안 가득 요크셔테리어 종 강아지들을 풀어 놓았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레이첼 또한 습관처럼 말했지만, 대니가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대니 선생님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레이첼은 가지런한 금빛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의 방은 오래 전부터 포화 상태였고, 잭의 방에 옮겨 두는 것도 슬슬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던 잭도-종종 그의 베개 근처에서 작은 장난감들이 돌아다녔으므로-최근 들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충전하는 내내 그놈들이  내 얼굴을 밟고 다닌다고!


  레이첼은 이제 산호 가지를 빠져나와 천천히 이동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달에도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에 잠긴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여기서 뭐 하냐.”


  무심한 목소리가 먼지를 털어내듯 레이첼의 신경을 흐트러뜨렸다.


  양 손 가득 짐을 든 남자가 유리창에 비쳤다. . 레이첼이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잭은 몸을 숙여 유리창에 바짝 얼굴을 댔다. 관자놀이 부근의 붕대 틈으로 회로의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 상품을 허락 없이 스캔하면 안 돼.”


  레이첼의 손을 피해 잭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쩌라고. 닳는 것도 아닌데.”


  “불법이야.”


  “! 알 바냐?”


  노랗게 빛나는 잭의 한 쪽 눈동자에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레이첼은 체념하듯 몸을 돌려 그가 들고 있는 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들어, . 붕대 사이로 선처럼 그어진 얇은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됐거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봉투의 손잡이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볼일 다 봤냐? 그럼 가자고. 잭이 몸을 돌렸다. 잭의 걸음은 레이첼이 뛰다시피 걸어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빨랐고, 그가 새삼스럽게 속도를 늦춰주지 않는 것을 알기에 레이첼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껑충하게 키 큰 그의 머리 위로, 공중 도로를 이탈한 차가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이윽고 잭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썩을! 머리통 깨질 뻔 했네! 네놈 차도 부숴줄까! 몇 개의 시선이 잭에게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 틈에 레이첼은 잭의 옆에 설 수 있었다. 흰 손이 잭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부수지 마, .”


  “?”


  “잭이 부수면, 대니 선생님이 보상해줘야 하니까?”


  “그럼 부숴도 되는 거 아니냐?”


  “아니라고 생각해.”


  짧은 욕설이 이어졌지만, 잭의 시선은 곧 앞을 향했다. 무거워, 임마. 레이첼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앞서 가는 잭의 발걸음이 아주 약간, 느려졌다. 둘은 묵묵히 혼잡한 중앙 구역을 가로질렀다. 옅은 인공 구름이 그들을 따라 느리게 이동하고 있었다.


  구역 외곽으로 통하는 지하도로를 걷는 동안 벽면에 설치된 입체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드로이드 광고가 나왔을 때 레이첼은 잭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잭은 집에서든 거리에서든 마음에 드는 방송을 발견하면 한참 동안 멈춰 서서 스크린을 바라보곤 했다. 잭의 시선은 매력적으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남성 어린이형 안드로이드 모델에 머물러 있었다. 뭘 웃고 앉았어.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봉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잭은 자신에게 향한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 녀석. 인공 안구에 탑재된 센서가 재빨리 레이첼의 표정을 읽고 관련 정보를 송출했다. 잭은 시야를 가리는 온갖 메시지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저거, 재수 없게 웃잖냐.”


  말을 내뱉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잭을 쫓으며 레이첼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붉은 머리카락의 안드로이드 모델은 미소를 지으며 외국어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레이첼은 잠시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잭과 함께 지하도로를 빠져나갔다.


  점차 지저분해지는 도로의 끝에는 돔 형태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비허가 구역이 있다. 대니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비허가 구역에 발을 내딛었던 날처럼, 구역의 문을 통과하며 레이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돔의 천정에서부터 인공조명이 구역 전체를 관통하며 작열하고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진 내부 곳곳에서 간이음식점의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개미굴이 따로 없구만. 레이첼은 잭이 내뱉은 표현이 이곳에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헤아릴 수 없이 뻗어나간 골목길이 구역 전체를 연결했고, 사람들과 안드로이드는 끊임없이 그 길을 오가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둘은 비허가 구역 중심부에 높이 솟아오른 건물로 향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전송기를 설치하면 되는 걸 가지고.”


  어깨로 문을 밀어 건물 안에 들어선 잭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텅 빈 복도에 그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그럼, 다음부턴 나 혼자 갈까?”


  레이첼이 잭을 올려다보았다. 빈 벽을 울리던 발소리가 멎었다. 잭은 이제 양 손에 쥔 짐을 번갈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놈, 뭐라고 지껄였더라. 코피를 흘리며 뒷문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던 남자를 떠올리자 신경 회로에서 기분 좋은 불꽃이 튀는 것만 같다. 잭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네가 이걸 전부 들고 올 수 있냐?”


  “나눠서 조금씩 들고 오면.”


  “집어 쳐. 네 걸음으로는 하루도 모자라다고.”


  승강기 앞에서 레이첼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버튼을 짧게 두 번 누르고, 검지 손가락을 버튼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건물에 등록된 생체 정보에 안드로이드는 없었다. 건물이 지어질 때는 아무도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함께 승강기를 탈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잭은 혼자 올 때면 늘 더러운 계단을 직접 오르곤 했다. 육중한 소음과 함께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대니의 병원은 오 층에 있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안드로이드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니의 진료실을 노크하려던 레이첼을 저지하고, 잭은 대기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 자식하고 할 말 있으니까 이따 들어와라. 데스크의 안드로이드가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대니가 주문하는 약의 수가 늘었다. 단체로 싸움질이라도 하고 다니냐? 잭이 진료실 바닥에 짐을 내려놓았다. 의료 패널을 들여다보던 대니가 안경을 벗고 얼굴을 문질렀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 레이첼은 어디 있지?”


  “네놈이 알 바 아니야.”


  “태도는 여전하군. 대체 누가 널 만들었을까, ?”


  말투는 상냥했지만 대니의 시선은 바닥에 놓인 짐을 향하고 있었다. 잭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짐을 다시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잭이 블랙마켓에 다녀오게 된 후로 대니는 항상 잭의 눈앞에서 물건을 확인했다. 대니가 신중하게 약의 케이스를 확인하는 동안 잭은 팔짱을 끼고 진료실을 서성였다. 또 한참 걸리겠군. 윤이 나도록 닦인 바닥 위에 옅은 회색 발자국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약품을 분류하던 대니가 고개를 들었다.


  “하나가 없잖아, .”


  “그 자식이 시답잖은 수작을 부리길래 뺐다. 그런 걸 들고 와 봤자 네놈이 받을 리가 없잖냐.”


  대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쓸모 있어져도 곤란한데 말이지. 애초에 잭에게 기대를 하고 맡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입이 무겁고, 써먹기 좋으며 많은 짐을 나를 수 있다면 충분했다. 있으면 편리하지만, 없어져도 아쉽지 않을 정도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을. 대니는 약을 한 쪽으로 밀어 두고 잭에게 약속한 금액을 건넸다.


  여느 때라면 돈을 받아들고 곧장 몸을 돌렸을 테지만, 잭은 돈을 쥔 채 서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대니가 짧게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잭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대니는 눈을 감고 잭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욕설과 잡다한 이야기를 걷어내고 나면, 핵심은 결국 전송기를 설치하라는 것뿐이다. 대니는 천천히 눈을 떴다.


  “, 몇 번이나 말해야 할까? 여긴 비허가 구역이라고. 전송기 부품 하나라도 들이는 순간 병원은 끝이야. 이제는 그 낡아빠진 코어에 새길 법 하지 않아?”


  “! 이딴 약이나 쓰는 주제에 할 말이냐, 그게? 애초에 면허도 없이 남의 배 가르는 놈이 이제 와서 겁나는 거냐?”


  대니의 흰 손이 진료실 벽에 투영된 의료허가서를 가리켰다. 벌써 몇 번이나 잭이 스캔을 시도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차단당한 허가서였다.


  “안타까워, . 눈앞에 있어도 모르다니. 널 손 볼 수 있을 만큼 늙은 엔지니어가 있을지 궁금하군. 내가 직접 네 머리를 열어볼 수도 있겠지만, 보다시피 난 사람 전문이거든.”


  잭의 관자놀이에서 가는 빛이 새어 나왔다.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빛은 경고를 알리는 붉은 색이었다. 붕대로 가린 얼굴에서 표정을 읽는 것보다, 그의 인공 회로가 알려주는 색을 읽는 편이 쉬웠다.


  대니가 손을 내저었다.


  “소란을 일으킬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겠지. 난 기계 파편을 치우고 싶지 않.”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잭이 책상을 내리쳤다. 충격 대비 코팅이 나뭇결을 따라 산산이 쪼개졌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보통의 안드로이드라면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강도로 제작한 책상이었다. 대니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성가신 깡통 같으니.


  지금까지 대니는 여러 차례 잭의 폐기를 고려해 왔다. 비허가 구역 근처에도 오기 싫어하는 관리국 직원을 구슬려 보기도 했지만,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문제가 많은 안드로이드가 한 둘인가요. 마지막으로 접촉했을 때 직원은 그가 건네는 돈을 거절했다.


  한동안 잠잠한 듯 했는데, 고작 전송기 따위로 이런 꼴이라니.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대니는 바닥에 나뒹구는 의료 패널을 집어 들었다. 예약한 환자가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잭의 거친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대니는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폐기당하고 싶은 거라면 관리국에 연락하겠어. 나로서도 환영이거든.”


  “그전에 내가 널 때려죽이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


  “할 수 있다면 해 봐, . 그럼 이곳의 유일한 의사는 사라지겠지. 곤란한 사람들이 꽤 많이 생길 거야. 그들이 널 내버려 둘까?”


  잭은 작게 중얼거렸다. 알 바냐. 그러나 관자놀이 부근을 통과하는 인공 회로는 이제 완전한 초록빛을 내뿜고 있었다. 모든 프로그램이 안정되었다는 신호였다.


  대니의 말마따나, 그의 병원은 비허가 구역의 유일한 의료 시설이었다. 중앙 구역의 병원보다 많은 치료비를 청구하는 대신, 이곳은 누구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연합 보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니의 존재는 각별했다. 비록 대니 또한 블랙마켓의 단골이라 할지라도.


  대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됐어. 네 처분 따위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소모적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다시 묻겠는데, 레이첼은 어디 있나?”


  잭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조그맣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잭이 손을 뻗어 잠금 버튼을 눌렀다. 바닥에 흩어진 케이스들을 짓밟으며 잭은 대니에게 다가갔다. 형형하게 빛나는 인공 안구와 시선이 마주치자 대니는 그대로 토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잘 들어, 이 돌팔이 자식. 잭이 목소리를 낮췄다.


  “구역질나는 병원 따위 알까 보냐. 가게의 그 시커먼 놈이 저 녀석을 기억했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냐?”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


  “닥쳐 봐! 이 짓거리를 때려치우든가, 빌어먹을 전송기 가져 와. 그 전까지 부르면 네놈 멱부터 따버릴 줄 알아.”


  “꺼져, . 그 얼굴 더 보고 있다간 오늘 점심 메뉴를 다시 확인할 것 같으니까.”


  몇 마디 욕설을 내뱉은 잭이 진료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바깥에서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잭의 말에 묻혀 지워졌다. 대니는 데스크의 안드로이드를 호출하며 짧게 덧붙였다. 깨끗하게 치우도록.


  그는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려 몸을 파묻었다. 잭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레이첼에 관해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예측했던 것보다 필요 이상으로 잭은 레이첼을 감싸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자신이 레이첼을 만나는 것조차 간섭하고 있지 않은가.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는데. 대니의 미간 사이로 칼로 그은 듯 한 선이 새겨졌다. 레이첼이 잭을 데리고 왔을 때, 조금 더 강경하게 대했어야 했다. 안전하고 성능 좋은 안드로이드가 하루에도 수십 대씩 출시되는 와중에, 그런 쓰레기 같은 깡통에 집착하다니. 조심스럽게 잭을 가리키던 레이첼과 그녀의 푸른 눈이 떠오르자 대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너무 성가시단다, 레이첼.


  청소를 마친 안드로이드가 예약 환자의 도착을 알렸다. 대니는 의자를 돌려 앉았다. 책상이 있던 자리에는 환자용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료해야 할 환자의 눈은 가까이 들여다볼 가치가 있었기에, 그는 의자를 조금 앞으로 당겨 앉았다.


  문이 열리자, 대니는 상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잭은 거의 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대니의 병원을 방문했던 날, 그는 또 다른 시선이 자신에게 따라붙은 것을 알아차렸다. 블랙마켓에서부터 쫓아왔나? 단언하기엔 수가 적었고, 무시하기엔 노골적이었다. 레이첼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잭은 구역 전체를 돌아 다녔다. 간혹 떠돌이 안드로이드가 보이면 붙잡고 스캔을 시도했지만 숨겨진 카메라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시선을 유도해도,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시선은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더욱 불쾌하고 진득하게 바뀌어갈 뿐이었다.


  고작 부품을 노리는 거라면, 모습을 드러내도 충분하지 않은가. 잭의 생각과 달리 시선은 그를 시험하는 듯, 혹은 그가 지쳐서 어딘가에 멈추기를 바라는 듯 끈질겼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잭은 데이터를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장기전이 되면 불리한 쪽은 자신이었다.


  삼 일째에 시선은 잭에게서 말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혹은 충분한 정보를 얻어낸 것처럼. 잭으로서는 찜찜한 해방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길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가 없어, 그는 최대한 많은 골목길을 거쳐 집으로 되돌아왔다. 짧은 충전을 거치고 다시 거리로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시끄럽고 지저분한 풍경이었다. 잭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주변을 탐지하며 정찰을 이어 나갔다.


  하루 종일 구역 전체를 스캔하고 돌아와 충전 기계에 들어가는 나날이 반복되었으나 별다른 수확이 없어 염증을 느낄 무렵, 레이첼이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벌써 삼 주 째 대니에게서 연락이 없다. 대량으로 약을 구매했다고 해도, 병원을 찾는 인원을 고려하면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터였다. 성가신 놈이 조용하니까, 좋은 거 아니냐? 잭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정말로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에너지였다.


  충전 장치로 다가서는 그의 발목을 레이첼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그럼 내가 선생님한테 다녀올 테니까.”


  잭은 뒤돌아섰다. 레이첼은 이미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니가 바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귀찮을 정도로 오던 대니의 메시지가 끊긴 것이 조금은 편안했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도 몇 번이나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자 레이첼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법적 보호자인 대니에게 이변이 생기면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안드로이드인 잭은 법적으로 레이첼에게 어떤 그늘도 제공할 수 없었으니까. 잭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다녀올게. 레이첼이 현관으로 향하자 잭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병원에 잠깐 가는 정도라면,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지는 않을 것이다.


  “, 기다려!”


  평소였다면 레이첼에게 밀려 함께 나가는 쪽을 선택했겠지만, 잭은 우격다짐에 가까운 말들로 레이첼을 집 안에 붙들어놓았다. 레이첼은 못 미더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결국 현관을 나서는 잭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여간 고집은 더럽게 세 가지고. 현관문 밖으로 펼쳐진 더러운 골목길을 걸으며 잭은 작게 중얼거렸다.


  대니의 안부야 그가 알 바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가 자신이 했던 말을 염두에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전송기를 설치했다면 부를 일이 없겠지.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잭은 몇 개의 골목을 통과했다. 구역 변두리에 있는 집에서 대니의 병원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 터라, 서두르지 않으면 병원 문손잡이를 잡다가 방전될 지도 모른다. 그딴 우스운 꼴 누가 보게 할까 보냐. 잭은 이제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간이상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 잭은 길 끝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독특한 외관 때문에 주목을 받는 일은 익숙했다. 다만 근 한 달 가까이 시선에 예민해진 잭으로서는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넘기기 어려웠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해 손짓까지 보내고 있다면 더더욱.


  잭은 스캔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익숙한 정보들이 출력되었다. 인공 피부를 비롯한 신체 부품 몇 개를 교체했지만, 그가 알고 있는 안드로이드들이었다. 잭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불필요한 데이터는 주기적으로 삭제하고 있지만, 자신을 매립장에 직접 던져 넣었던 안드로이드를 지워 버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 재수가 없으려니까. 잭은 멈춰 섰다. 그들은 이제 서 있는 간격을 넓혀 길을 막고 있었다.


  레이첼이 그에게 대니와의 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이야기를 노출하지 않는 것처럼, 잭도 매립장에 버려져 있던 이유를 밝히길 꺼렸다. 어찌 됐든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 이런 곳에 사는 놈들 중에 좋은 사연 들고 나오는 놈이 있었나. 잭은 스캔 프로그램을 껐다. 이들을 따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둘 중 어느 쪽의 에너지가 먼저 고갈될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레이첼과 함께 나오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일까.


  잭이 묵묵히 서 있자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안녕, !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잘 지내긴 개뿔. 길 막지 말고 꺼져.”


  서운한걸. 남자가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이내 그들의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거리를 메웠다. 잭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의 웃음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고,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뭘 웃고 자빠졌어. 잭이 반응할 즈음이면 그들은 일제히 무표정한 얼굴로 잭을 응시하곤 했다. 그들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취향대로, 하나의 명령 체계 안에서 언제든 빠른 반응을 보이도록 개조된 탓이었다. 당시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던 안드로이드들 중에서, 잭은 유일하게 거부라는 답을 내놓았다. 잘 싸우기만 하면 됐지, 아무 때나 쳐 웃기까지 하라고? 그 말이 그가 지내던 불법 격투장에서 했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전원 장치를 끄고 내다 버리기까지 했으니, 새삼 그들이 자신을 다시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이봐, . 다시 입을 연 남자의 말투는 높낮이가 일정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고, 함께 가줘야겠어.”


  이젠 방법이 없다. 잭은 눈앞의 남자를 밀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경고. 에너지 잔량 6%. 충전을 시작해 주십시오.]


  잭은 시야에 출력되는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며 방향을 꺾었다. 앞으로 몇 시간은 버틸 수 있겠지만, 자신을 뒤쫓아 오는 안드로이드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잭은 뒤를 돌아보았다. 꺼져, 이 새끼들아! 좁은 골목을 따라 달려오던 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가, ! 그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한 명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발소리마저 일정했으며, 구호처럼 외쳐대는 같이 가, ! 이라는 말을 내뱉는 타이밍도 같았다.


  환장하겠네. 잭은 낮은 담을 타 넘었다. 자신이 반강제로 떠난 후에도 몇 차례의 개조가 이어진 게 분명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수십 마리의 개미가 군집을 이루어 움직이듯, 그들은 오직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달리고, 발이 걸려 넘어지고, 일어나고, 외치고, 또 달린다. 잭은 길가의 잡동사니를 팔로 쓸고, 발로 차며 방해물을 만들어냈지만 뒤쫓아 오는 안드로이드들은 점차 덜 넘어지고, 더 빨라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잭의 후드를 움켜쥐려 했지만 잭은 가까스로 몸을 숙일 수 있었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신경 회로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다. 잭은 이를 악물었다. 구역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곳은 아무리 소란이 일어나도 치안을 위해 나서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그는 뒤를 살폈다. 뒤쫓아 오는 안드로이드들이 손을 뻗었다. 잭은 비허가 구역 바깥으로 통하는 길을 향해 달렸다. 중앙 구역에는 패트롤이 있다. 떠돌이 안드로이드 한둘쯤은 못 본 척 하고 지나가는 이들이지만, 중앙 구역 내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들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이 끈질긴 놈들을 한두 명쯤은 처리해 주겠지. 비허가 구역 전체를 감싸고 있는 벽이 잭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잭이 온 몸을 내던지려는 찰나, 누군가가 잭의 옷깃을 잡았다. 중심을 잃은 잭은 휘청거렸고, 안드로이드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잭을 에워쌌다.


  유감이야, .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메아리처럼 그들의 말이 되풀이 된다. 유감이야, . 유감이야, . 유감이야. 잭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안드로이드의 다리를 걷어찼다. 단단한 금속이 서로 부딪치며 카랑카랑한 소리가 울렸다. 그들의 이목이 소리에 집중된 틈을 타, 잭은 몸을 일으켰다. 개조된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승산은 없다. 잭에게 밀쳐진 안드로이드가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문을 여는 잭을 뒤쫓았다.


  [경고. 에너지 잔량 5%. 전체 손상도 7%. 수리와 충전을 시작.]


  평소보다 빠르게 소모되는 에너지에 잭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지하도로의 스크린들이 빠르게 잭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늘 나오던 광고 대신, 뉴스를 내보내고 있는 듯 했다. 발소리에 묻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긴급테러대피중앙. 잭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말들이 손상으로 인한 착각이기를 바랐다. 옷깃을 잡아채려는 손들을 뿌리치며 잭의 발은 지하도로의 끝에 도달했다.


  …그 광경. 공중 도로를 상쾌하게 주행하던 수많은 차들은 지워지고, 서서히 밤 그늘이 내리는 하늘. 그곳에 몇 대의 군용 헬기가 별처럼 박혀 있었다. 비허가 구역을 연상케 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총소리, 폭발음, 알 수 없는 발밑의 진동, 경고에너지 잔량, 잭은 순간 멈추려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였다. 패트롤들은 잭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피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달렸고, 충분히 소란스러웠다. 잭은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려 했으나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그를 밀쳐내며 앞으로 나아가기 급급했다. 비켜, 비키라고! 잭의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는 폭발음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피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패트롤들이 울부짖다시피 내지르는 말들만이 몇몇의 주의 깊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잭이 나온 지하도로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잭은 고개를 들어 군용 헬기의 움직임을 좇았다. 위에서 조망하는 이들이라면 소란의 근원지를 따라 이동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안드로이드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잭은 스캔 프로그램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파에 밀려간 그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안드로이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잭은 몸을 낮췄다. 빌어먹을, 그대로 쓸려가 버리라고. 총이라도 맞든가. 대피소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서 잭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보폭을 맞춰 움직였다.


  폭발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 바닥은 곳곳이 파여 있어, 사람들은 자주 발이 걸려 넘어졌다. 발밑의 진동이 점차 거세진다. 진동의 근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패트롤들이 한 곳으로 이동했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구식 화물 차량 수십 대가 접근하는 중이었다. 수십 년 전에 사라졌을 지상 주행 차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렸지만 패트롤들의 위협사격에도 멈추지 않았다. 잭은 선두를 달리는 트럭에서 쏟아져 나오는 탄환들을 보았다. 군용 헬기가 조금씩 하강하며 대응 사격을 했지만 사람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우리는 회귀를 원한다. 트럭에 달린 증폭 장치에서 단조로운 문장이 흘러 나왔다. 주인을 감싸던 안드로이드 한 대가 탄환에 맞아 휘청거렸다. 잭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데이터를 불러내며 후드를 눌러 썼다. 안드로이드 무장 집단. 한 달 전에 보았던 뉴스 데이터가 출력되었다. 이 미친놈들이! 중앙 구역 외곽을 돌던 그들이 마침내 중심부까지 테러의 규모를 확산시켰다. 우리는 회귀를경고, 에너지 잔량 3%원한다살려주세요!인간을 최우선으로 보호해! 잭은 밀려들어오는 음성들을 차단하기 위해 귀를 막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다리를 움켜쥐었다. 잭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가, ! 상반신만 남은 안드로이드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잭은 반대편 발로 안드로이드를 걷어찼다. 도망치던 패트롤이 잭을 넘어뜨렸다. 잭과 안드로이드가 한 데 엉켜 바닥을 뒹굴었다. 같이 가, . 탄환이 잭을 붙들고 있는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관통했다. . 잭은 몸을 일으켰다. 후드가 벗겨지며 붕대로 감싼 그의 얼굴과, 관자놀이를 따라 흐르는 적색 회로의 빛이 드러났다. 안드로이드다! 트럭을 탄 누군가가 소리쳤다. 잭은 달리려 했으나, 몇 발의 탄환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치명적 손상보호를.]


  무언가를 생각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시야가 무너져 내린다. 쓰러진 잭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쳤다. 잭의 몸은 반동으로 들썩였다. 바닥에 인공 안구 하나가 나뒹굴었다. 한 때는 푸른색으로 반짝였을 아름다운 눈이, 무심하게 잭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따르듯, 잭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긴 밤의 끝이었다












#1. End

Posted by S.mojo
2018. 1. 12. 23:26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MHA2017. 10. 7. 14:01

미도리야 이즈쿠 X 바쿠고 카츠키

주제: "고백" 




Patience

 





 

   바쿠고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굴욕감만을 안겨준 체육 대회의 결과였다. 몇 개의 가정과 계산이 머리를 스쳤다. 오래 전부터 그려 놓은 전도유망한 미래에 닿을 수 있는 레일이 또 하나 펼쳐진다. 자신을 지명한 수많은 사무소 중 인지도가 높은 히어로를 찾아, 바쿠고의 시선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사무소를 가지 치듯 지워가는 그의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무도 지명하지 않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미도리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떠오른다. 그것이 미도리야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쿠고는 책상을 걷어차고 일어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버리고 싶다.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해빠진 인간, 고작 그 수준임에도 자꾸만 발치로 다가와 걸음을 방해하고 자신의 앞으로 굴러가려는 그 모습을 마구 흩어놓고 싶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각자 어느 사무소를 고를 지, 무엇을 얻고 돌아올지 들떠서 목소리를 높이는 중에도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내 미도리야의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같은 중학교 출신이기 때문인지, 혹은 운이 나빠서인지 앞뒤로 나란히 앉은 탓에 바쿠고는 줄곧 뒷자리의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미도리야의 공기 의자로 다시 떠들썩해진 주변은 예민한 바쿠고를 무신경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시끄러.”

 

   여러 개의 목소리에 섞여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미도리야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다. 한껏 눌린 톤에 서서히 힘이 실린다. 기본적으로 겁쟁이인 주제에,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겠지. 마침내 단언하듯이 내뱉는 단어들의 조합은 늘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그 눈, 그 시선, 바쿠고는 문득 주변을 둘러본다. 입학한 이후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은 가지각색이었지만 유독 끈끈하게 달라붙는 종류의 시선이 있었다. 발뒤꿈치에서부터 올라와 두 다리를 단단히 휘감고 훑어가다 마침내 목덜미 즈음에서 멈추고 마는. 시선은 늘 한 방향에서 온다.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 지니스트 사무소를 적어 넣었다. 썩을 너드는 발도 붙여볼 수 없는, 그리하여 어떤 시선도 닿지 못할 장소였다.

 

   직장 체험 전 날, 바쿠고는 햇살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걸었다. 따뜻한 공기 때문에 옅은 졸음이 밀려왔다. 일찍 잠들 생각으로 키리시마의 권유도 무시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바쿠고는 자신을 부르는 미도리야의 목소리를 들었다. 계단을 두어 개쯤 내려가자, 목소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 기어이 바쿠고의 발목을 붙들었다. 썩을. 바쿠고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수선하게 뻗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뛰어오는 미도리야가 보인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커지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다려, 캇쨩. 마침내 숨을 고른 미도리야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들을 마주하는 동안, 바쿠고는 현상된 사진의 피사체처럼 굳어 있었다.

 

   교활한 새끼.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바쿠고는 눈앞에 없는 미도리야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말들에는 여느 때와 달리 당혹감과 경멸이 혼재되어 있었다. 첫 대전 훈련이 끝나고 미도리야가 자신을 불러 세웠을 때도 이렇게 얼이 빠지진 않았다. 그저 깎여나간 자존심의 부스러기를 쓸어냈을 뿐, 미도리야의 말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날, 바쿠고는 침대에 누워 여러 번 뒤척였다. 바싹 말라버린 미도리야의 입술이 그리던 부드러운 곡선과, 상기된 두 뺨에 선명하게 떠오르던 작은 주근깨가 쉴 새 없이 바쿠고의 눈앞을 떠다녔다. 반응할 가치도 없어. 불 꺼진 방 안에 바쿠고의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외면. 바쿠고의 첫 대답이었다.

 




* 

 




   촘촘한 빗살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니스트의 유연한 손길은 바쿠고의 머리카락을 기어이 차분하게 눕혀 놓았다.

 

   직장 체험 이틀 만에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발언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굳어버린 바쿠고 앞에 깨끗한 거울이 놓였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보며 지니스트는 히어로가 지녀야할 인품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거울에 맺힌 바쿠고의 상이 점차 일그러진다. 잘못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웃기지도 않은 헤어스타일 따위로 지난 이틀 간 잠을 설치게 했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잊혀져 간다. 그 사실이 바쿠고를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빌런을 때려눕히는 일이나 시민 구조 작업 등 인지도가 올라갈 수 있는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바쿠고는 그럭저럭 직장 체험을 얌전히 끝마칠 수 있었다. 휴대폰에는 키리시마와 카미나리, 세로가 보낸 라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 사무소와 관련된 시답잖은 이야기였지만, 개중에는 히어로 살해자 스테인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바쿠고는 내심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화면을 내렸다. 키리시마가 보낸 사진 한 장이 섞여 있었다.

 

   [미도리야가 보낸 건데, 역시 스테인이랑 마주쳤었나봐.]

 

   울창한 나뭇가지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골목길의 지도였다. 바쿠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철 안에서 바쿠고는 스테인에 관한 뉴스 몇 가지를 찾아 읽으며 익숙한 이름을 찾아내려 했다. 미도리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대체 뭐야, 그 새끼. 머릿속에 몇 가지 가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바쿠고는 뉴스 페이지를 껐다. 주제넘게 참견하고 다니는 것 또한 미도리야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밀다니. 불쾌한 기억이 사슬처럼 엮여 떠오른다. 노란 유치원복을 입고 다닐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단에 서 있는 자신에게 쏟아지던 말들, 데쿠 주제에 자신을 내려다보며 빨간 얼굴로 겨우 겨우 내뱉던 말들


   바쿠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그런 생각을 품은 적도 없었다. 하필 처음이 데쿠라니. 바쿠고는 여전히 반듯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을 거칠게 손으로 털어냈다. 선명하게 떠올랐던 미도리야의 검은 주근깨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자 쏟아지는 키리시마의 웃음에 바쿠고는 몇 차례 폭발을 일으켰다. 진짜냐, 바쿠고!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세로와 카미나리를 쫓으면서도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늘 그렇듯, 바쿠고는 무시했다. 십여 년 간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은 바쿠고에게 있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가볍게 위협하면 겁을 먹고 사라지는 잡몹들과는 달리, 미도리야는 언제나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좇았다. 그 시선에 담긴 동경, 선망을 바쿠고는 당연하게 여겼다. 비록 이제는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리긴 하지만, 유에이는 한가롭게 연애 놀이나 즐길 정도로 여유를 주지 않는다. 미도리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쿠고는 간만에 복귀한 일상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미도리야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바쿠고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올마이트를 상대로 한 빌런 제압 훈련에서 미도리야의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졌을 때도, 분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올마이트에게 덤벼들었을 때도, 출구 게이트를 향해 달려나가는 미도리야를 대신해 올마이트의 앞에 끼어들었을 때도, 바쿠고는 그렇게 믿었다. 데쿠는 언제나 내 뒤나 좇는 녀석이라고. 양호실의 흰 천장을 바라보며 바쿠고는 떨리는 두 팔을 쓰다듬었다. 옆 침대에는 미도리야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일어났어, 캇쨩? 미도리야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바쿠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겼겠지, 썩을 너드.”

 

   “캇쨩 덕분이야.”

 

   “닥쳐.”

 

   바쿠고는 서두르고 있었다. 리커버리 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쿠고는 직접 양호실을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온갖 감정이 들끓는 와중에도, 바쿠고의 조바심에는 미도리야가 뒤쫓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껄끄러움이 있었다. 교실 안에서 무심하게 시선을 넘겨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바쿠고의 불안한 예감은 이내 적중했다.

 

   “캇쨩, 기다려. 할 말이.”

 

   “닥쳐! 있어도 닥치고 없어도 닥치고 꺼져.”

 

   “하지만.”

 

   동요하고 있다. 바쿠고는 스스로를 최대한 억누르며 걸었다. 통증을 이기지 못했는지 미도리야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시선은 계속 바쿠고의 다리를 붙들었다. 캇쨩, 내가 한 말 기억해? 캇쨩. 나는 캇쨩을. 바쿠고는 조금 더 늦게 깨어났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썩을 너드.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 경멸이 당혹스러움으로, 당혹스러움이 동요가 되어 눈앞이 아찔해진다. 어떤 방식으로든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시야를, 생각을, 일상을 침범한다. 두 번째 거절 앞에서 미도리야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바쿠고는 예감하고 있었다. 침식이 일어나고 있다.

 

   “썩을 너드.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얼쩡거리면 날려버린다!”

 

   자신과 반대편으로 향해야 할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평생 거기 서 있던가. 홀가분하면서도 어쩐지 운동화 바닥에 진득한 껌이 달라붙은 것만 같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음을 방해하고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게 만드는 종류의 무언가가, 바쿠고의 발목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뒷목을 감싸고 있었다. 바쿠고는 털어내듯 몸서리를 치며 걸었다.

 

   “그럴 수 없어, 캇쨩. 그건 안 돼.”

 

   뒤늦은 대답이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 

 




   왜 하필 캇쨩이야?

 

   미도리야는 스스로에게 한 번, 되물어본 적이 있다. 올마이트의 영상을 틀어 놓고 집중이 흐트러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미도리야는 수십 가지 이유를 즉각적으로 댈 수 있었다. 화려하고, 강한 캇쨩.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캇쨩. 닮아가고 싶은 대상,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 거칠고 두꺼운 손바닥의 감촉이 새삼 궁금해질 때면 미도리야는 스스로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올마이트와는 달라. 올마이트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새우긴 해도 잠을 설친 적은 없었다. 칠판을 바라보다가도 문득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금빛 솜털이 자잘하게 돋아 있는 바쿠고의 흰 목덜미를 처음으로 발견한 순간, 미도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뻗은 손을 다급하게 감췄다. 거칠고 단단한 바쿠고에게도, 무방비하고 부드러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미도리야의 잠을 앗아갔다.

 

   왜 캇쨩이 아니면 안 돼?

 

   미도리야는 질문을 바꿨다. 유에이에는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매력적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상냥한 우라라카, 솔직한 아스이, 침착한 토도로키, 모범적인 이이다, 언제나 명랑한 키리시마, 미도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닿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시선을 뺏기는 것은 이제 미도리야에게 불가항력의 일상이 되었고, 두 번의 거절은 미도리야에게 사소한 타격에 불과했다. 바쿠고가 선선히 받아들였다면 미도리야는 자신의 얼굴을 후려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키리시마가 내민 손을 바쿠고가 잡는 순간, 미도리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빌런에게 납치되는 순간까지 바쿠고는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럼에도 키리시마가 내민 손은 잡을 것이라고 예측한 것은 미도리야 자신이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그 말은 자신이 내뱉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바쿠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미도리야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너무 숱한 거절을 받은 탓에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거절에 익숙했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거절당하기 위해 나아갔다. 눈 내리는 산을 맨 몸으로 헤쳐 나가는 사람은 감각이 마비되어 서서히 자멸한다고 했던가. 그리하여 열기와 냉기를 착각하고 홀로 뜨거워하는지도.

 

   미도리야는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면서도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으면 바쿠고의 가지런한 눈썹과 미간의 주름이, 쏘아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흰 목덜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던 얼굴이 선명해진다. , 역시.

 

   캇쨩이 아니면 안 돼.

 

 



* 

 

 



   반창고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끈끈한 흔적이 남았다. 바쿠고는 거칠게 뺨을 문질러 닦아냈다. , 데쿠 새끼. 제대로 쳤네. 먼저 손을 올린 것은 자신이었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부딪치면 이렇게 흔적이 오래 남는 것인지. 등을 돌리고 기숙사를 청소하는 동안 미도리야는 몇 번인가 말을 붙여 왔지만, 대개는 전투 스타일이나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바쿠고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불편한 주제를 꺼내지 않은 것에 안도할 지경이 되어서야, 바쿠고는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 데쿠 주제에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하루 먼저 수업으로 복귀하면서 미도리야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바쿠고는 청소기의 전원을 켜고 등을 돌렸다. 쓰레기를 봉투에 주워 담고 먼지를 빨아들였다. 가끔 코드가 소파에 걸려 휘청거릴 때마다 바쿠고는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 씨발! 데쿠! 코드 잡으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홀로 청소하기에는 유에이의 기숙사는 무식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바쿠고는 코드를 뽑고 남은 청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보며 얼굴에 남은 반창고를 떼어 냈다.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건, 오랜만이었다. 얼룩처럼 시야에 묻어나던 미도리야가 점점 옅어져 간다. 알 바냐. 바쿠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인내심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내리 누르는 온갖 중압감과 더불어, 힐끔거리는 미도리야의 시선을 참아주는 것 또한. 그러나 정작 후자에 대해서는 바쿠고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웃는 미도리야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걷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발짝 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은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건방지게 뭘 마주 보고 웃어. 바쿠고는 작은 덤벨을 쥐었다. 전신이 땀으로 범벅될 때까지 자가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 바쿠고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씨발. 착각하지 말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모른 채, 바쿠고는 빈 방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키리시마의 손을 잡았을 때,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 머물렀다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런 와중에 또 시작이냐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아래에서는 지옥 같은 육탄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불평할 겨를이 없었다. 그 때에는 미도리야의 시선마저도 덜 거슬릴 정도로, 일상으로의 복귀가 반가웠으니까. 결코 안도한 적은 없었다. 시가라키를 앞에 두고 팽팽하게 긴장했던 몸이 빨리 풀렸을 뿐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일들은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었고, 우습게도 자신이 찾아낸 돌파구는 미도리야였다


   미친 놈. 바쿠고는 피식 웃었다. 두 번씩이나 미도리야를 세워 놓고 가버린 주제에. 한껏 경멸한 주제에. 바쿠고는 자세를 바꿔 다리를 풀어 주었다. 얼굴에 맺힌 땀이 바닥에 깔린 카펫에 후두둑 떨어졌다.

 

   왜 난데? 한 번쯤은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쿠고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데쿠니까, 데쿠 같은 이유겠지. 그런 이유에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 타월을 꺼내 땀을 닦으며 바쿠고는 문득 깨닫는다. 방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음을. 이런 씨발. 이마에서 한 줄기의 땀이 마저 흘러내렸다.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캇쨩. 있어? 바쿠고는 굳은 듯이 방 한가운데에 서 있다. 대답하지 않아도 문이 열리고 미도리야가 부스스한 머리칼 아래에서 눈을 빛내며 들어설 것만 같다. 그럼 나는 어떤 표정으로 저 새끼를 바라봐야 하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해줄 게 있는데. 캇쨩, 어디 간 걸까? 중얼거리는 목소리, 바쿠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놔두고 꺼져.”

 

   문 아래의 틈새로 반듯한 종이가 들어온다. 갈게, 캇쨩. 바쿠고는 자신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미도리야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지만, 손이 닿은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일그러지고 있었다. 바쿠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몇 가지 욕설이 낮게 흘러나왔다. 동요를 넘어서는 무언가, 지각해버린 무언가가 바쿠고의 손끝에서부터 쿵쿵 울렸다. 미도리야에게만 한정된 경멸, 미도리야를 향한 당혹감, 동요, 끝내 미도리야를 찾아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끊어진 인내심, 인내심. 사실은 무엇을 참고 있었던 것인지. 바쿠고는 종이를 내팽개치고 문을 열어젖혔다.

 

   야, 데쿠! 한참 멀어진 부스스한 뒷모습이 지워지고 미도리야의 얼굴이 나타난다. 의아해하면서도 다가오는 미도리야를 향해 바쿠고는 할 말을 고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데쿠 새끼가 했던 그런 건 아니야. 그것보다 더 우월한 거지. 방문 앞에 선 미도리야의 멱살을 쥐고, 바쿠고는 마침내 몇 마디를 내뱉었다.

 

   바쿠고는 그렇게 환한 웃음을, 이전에 본 적이 없다. 두 팔이 바쿠고를 끌어당겼다. 젖은 목덜미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씨발, 땀 냄새 난다고.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바쿠고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MH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키리바쿠] 차가운 사랑 냄새  (0) 2017.09.23
Posted by S.mojo
MHA2017. 9. 23. 20:33

히로아카 전력 60분 [자유주제]

키리시마 에이지로 바쿠고 카츠키




차가운 사랑 냄새









 

 키리시마는 조금 울었다. 오후 3시의 뉴스 속보에서 도심을 습격한 빌런과 대치 중인 히어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타는 냄새가 난다. 키리시마는 소파를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집을 나가기 전 바쿠고는 냉장고의 야채들을 전부 꺼내 오랜 시간을 들여 씻고, 자르고, 다져 놓았다. 도마와 칼이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냄비를 꺼내는 소리, 불린 쌀과 물을 쏟아붓는 소리, 주걱이 냄비 바닥을 긁는 희미한 소음을 키리시마는 누워서 듣고 있었다.


  요리는 언제나 바쿠고의 몫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재료를 다듬고, 가스렌지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올리는 동안 자신은 식탁에 접시를 놓으며 하루의 일과를 유쾌하게 떠들곤 했다. 바쿠고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가끔 어, 그러냐. 시끄러워. 정도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사무소가 다른 두 사람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지명도가 올라갈수록 바쿠고의 모습은 부엌에서 차츰 지워져갔지만, 키리시마는 식탁에 팔을 올려놓고 바쿠고에게 말을 거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조금씩 옅어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천천히, 가끔은 생각에 잠겨 잊었던 것처럼 빠르게,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멎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았다.


  “먹어.”


  협탁에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바쿠고가 짧게 말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은 채 바쿠고의 기척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열 때문에 젖은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숨처럼 짧은 시간이었다. 백기를 든 쪽은 언제나 그랬듯, 키리시마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바쿠고는 발소리와 함께 침실을 빠져나갔다. 키리시마는 실눈을 뜨는 대신 바쿠고가 짐을 챙겨서 집을 나가는 작은 소음들에 귀를 기울였다. 공기가 천천히 식어간다. 이제 집 안에서 소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키리시마는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형편없는 연기력이야, 에이지로. 몇 차례 코를 풀고, 키리시마는 표면이 굳은 죽을 휘저어 떠 먹었다. 지독한 감기였다. 집을 나가겠다는 바쿠고를 붙들 힘도 없었다. 그러나 좋은 핑계는 아니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키리시마는 짐을 싸는 바쿠고를 가만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옷장에서 옷을 직접 꺼내주었을지도 모른다. 바쿠고가 마음에 들어 했던 자신의 옷도 내 주었을 터였다. 그렇게 차분하고 평화롭게, 바쿠고를 배웅할 수도 있었다. 관계를 마무리지을 때도 그만큼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키리시마는 알고 있었다. 바쿠고가 냄비 가득 죽을 끓여놓고 간 것처럼.


  키리시마는 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약 기운에 취해 꼬박 잠을 잤고, 다음 날은 일어나서 죽을 데워 먹었다. 냄비 뚜껑에 올려진 메모를 보며 웃기도 했다. 남기지 말고 쳐먹어. 휘갈긴 글씨였지만 힘을 주어 썼는지 약간 번져 있었다. 밤에는 거실로 나와 TV를 켜 놓고 소파에 웅크려 잤다. 삼일 째에는 카미나리와 세로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바쿠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언급만으로도 키리시마가 무너질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안부만을 물었다. 고작 삼 일만에 다 알게 된 것일까. 생각들이 밀려올 때면 키리시마는 채널을 돌려가며 바쿠고의 흔적을 좇았다.


  자신도 바쿠고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함께 살기로 한 것도, 떨어지기로 한 것도.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바쿠고가 몇 개의 가방을 들고 현관에 나타났고, 그 날 둘은 베개 하나를 함께 베고 잤다. 다음 날에는 바쿠고의 이불과 베개를 마련했다. 옷장의 절반을 비워 바쿠고의 옷가지를 채워 넣었다. 쓰지 않던 그릇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휴일에는 바쿠고와 어울려 나갔다. 어떤 겨울은 너무 추워서, 서로를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싸운 날에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이, 투박한 손끝이, 뻗친 머리카락과 고함이 너무나 아쉽고 그리워지곤 했다.


  조밀하게 채워 온 시간이 어느 날 갑자기, 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직감한 순간부터 키리시마는 외면했고, 바쿠고는 받아들였다. 어쩌면 키리시마가 받아들이고 바쿠고가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생겨난 균열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관계를 유지하려 할수록 균열이 커져갔다. 키리시마는 유에이의 체육 대회를 떠올렸다. 바쿠고, 그 때도 먼저 알았지. 옆구리에 꽂히는 주먹이 묵직했었다. 옷장 위에 올려두었던 바쿠고의 빈 가방에 짐이 채워졌다. 근성은 어디 갔냐. 바쿠고는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시간들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사무소로 복귀한 뒤 키리시마는 빌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바쿠고와 마주쳤다. 안녕, 바쿠고! 인사를 건넨 쪽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경화를 유지했을 때만 키리시마는 바쿠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과 날카로운 시선이 아주 잠깐, 자신에게 향했다가 이내 멀어져갔다.


  언제나 그렇듯,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쿠고는 현장을 떠났다. 바쿠고도 자신도, 받아들인 것처럼 짧게 스쳐가고 나면 키리시마는 비로소 경화를 해제했다. 남자답지 못하네, 에이지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늘었다. 자신과 바쿠고의 개성은 앞으로도 서로를 같은 현장에서 마주치게 만들 것이다. 그때마다 뻣뻣하게 굳어서 마주할 수는 없지. 키리시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은 바쿠고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야 했다.


  한동안 키리시마는 히어로 활동에 전념했다. 밤늦게, 때로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고, 침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휴일에는 카미나리들과 어울려 시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간혹 전광판에서 바쿠고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걸음을 멈추기도 했지만,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카미나리와 세로를 향해 웃어주었다. 바쿠고, 멋있네. 이것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키리시마는 생각했다


  바쿠고의 소식은 듣지 않으려 해도 각종 채널에서 쏟아져 나왔고,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는 키리시마는 적당히 둔감해지고 있었다. 바쿠고가 쓰던 그릇을 다시 꺼내어 쓰고, 손끝을 베이면서 스스로 요리를 했다. 들쑥날쑥한 크기의 재료를 대강 냄비에 쏟아붓고 가스렌지의 불을 켰다. 불을 중간에 맞춰 두고 키리시마는 거실로 돌아와 TV를 켰다.


  ‘, 바쿠고 코스튬이 바뀌었네.’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공격 방식 덕분인지, 화면에 클로즈업된 바쿠고의 뒷모습은 눈이 부셨다. 앵커는 바쿠고의 진압 방식에 대해 패널들과 진중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바쿠고, 이 방송 보면 화를 내겠는걸. 키리시마는 테이블을 내려치며 화를 내는 바쿠고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바쿠고가 내려쳐 일그러진 테이블 끝을 매만졌다. 새 테이블, 사야겠다. 이윽고 키리시마는 아주 조금, 울었다. 겨우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질 정도로만 울었다. 타는 냄새가 난다. 부엌에서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불을 끄고 키리시마는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긁었다. 주걱 끝에 눌어붙은 덩어리가 턱턱 걸렸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 미처 익지 못한 쌀알과 뭉그러진 양파를 함께 으깨가며, 키리시마는 오랫동안 냄비 안을 휘젓고 있었다. 탄내와 함께 따스한 열기가 빠져나왔다. 다시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MH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데쿠캇 고백 합작] Patience  (0) 2017.10.07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7. 9. 6. 22:50


Rondo







  무덤은 아늑했지만 시원하지 않았다. 점점 줄어드는 산소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기 위해 내쉬는 숨이 약해져갔다. 멀어지는 불규칙한 발소리와 기계의 둔중한 작동음을 들으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깨달았다. 무덤 안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문득 그가 묻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끔은 기이한 자세로 잠든 모습들이 떠올라 에드워드 메이슨은 힘겹게 몸을 웅크렸다. 상처의 고통보다도 피에 젖어 축축해진 흙의 감촉이 선명했다.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어. 다가오는 죽음을 향해 던지는 말은 과녁에 닿지 못하고 떨어지는 화살처럼 맥없이 추락했다. 육체의 죽음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었으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쓸쓸할 따름이었다. 생의 끝에 도달해서야 완전하게 가질 수 있는 죽음을 쥐고, 에드워드 메이슨은 어둠 속에서 눈꺼풀을 끌어내렸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떠오르는 마지막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밝고 환한 빛을 따라가지도 않았고, 육체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허공으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어두운 새벽녘에 문득 눈을 떠 창가를 바라보듯, 에드워드 메이슨은 무덤을 덮은 비석 위에 앉아 있었다. 새삼 의복이 깨끗해지거나 상처가 아무는 일도 없었다. 흙과 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에드워드 메이슨은 갑자기 깨어났다. 이런 걸, 깨어났다고 해도 되는 걸까. 턱을 괴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지만 딱히 대체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이 든 적도 없었는걸.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죽음은 이제 그의 앞에 길고 긴 레일처럼 펼쳐져 있었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딱히 신을 믿지도, 구원을 바라지도 않았으나 육체가 소실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석 아래로 내려가 부패가 시작되었을 생전의 몸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지만, 에드워드 메이슨은 그 자리에 붙들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와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후로도 에드워드 메이슨은 자신의 비석 위에 앉아 천천히 옅어져갔을 것이다. 사고마저도 완전히 소실되면 완벽한 죽음을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 늘 운이 없었던 그는 죽은 후에도 사색에 잠길 시간을 빼앗긴 채 불타는 건물 위로 솟구쳤다. 건물의 지하는 완전히 붕괴되어 자신의 육체는 거대한 무덤 안에 잠겨버렸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두 명의 생존자가 각기 다른 차에 실려 건물을 떠나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대로 저 둘의 결말도 정해진 것일까? 잭이 체포되는 모습은 꽤나 즐거웠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뒤집어쓴 자루 아래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도 듣지 못하는 웃음은 산소 마스크가 씌워진 채로 구급차에 실려가는 레이첼의 모습을 보자 이내 사그라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시큰한 감각이다. 육체가 없어도 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후로 오랫동안 에드워드 메이슨이 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당시의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물 사이로 보이는 초라한 새 둥지와 떠나는 새들, 그들이 인사처럼 남긴 지저귐이 에드워드 메이슨을 사로잡았으므로. 새 소리. 그는 작고 연약한 동물들이 내는 생명의 소리에 언제나 푹 빠져들곤 했다. 작은 존재들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만의 것이 된다. 죽기 직전에 내뱉는 소리는 얼마나 강렬하고 아름다운지.

 

  빈 둥지에는 몇 개의 깃털이 흩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깃털 너머로 통과되는 손끝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젠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어도 사물에는 닿을 수는 없구나. 에드워드 메이슨은 선선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운이 없는 대신 그는 타고난 영리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만히 부유하고 있기에는 십여 년 간의 생 속에서 쌓아올린 성실함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웅성대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미끄러지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저 떠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이렇게 일어나진 않았겠지. 진화되는 불길 사이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방관 한 명의 어깨에 앉아, 에드워드 메이슨은 속삭이기도 하고 건물의 구조를 손짓으로 가리키기도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마음에 들지 않아.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는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드워드 메이슨은 곧 몸을 일으켜 건물을 떠났다. 그 후로도 건물에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묘지 주변에는 자신처럼 배회하는 존재들이 많았다. 대개는 멍하니 자신의 비석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무덤 아래로 꺼지곤 했다. 멍청이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비석 위에 앉아 에드워드 메이슨은 조소를 내뱉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솟아나는 머리통을 세어 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전혀 아름답지도, 재미있지도 않아. 통통한 볼이 이내 샐쭉해졌다.

 

  막막할 정도로 긴 자유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적었다. 도서관에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사람들 옆에 앉아 독서에 함께 열중해보기도 했지만, 원하는 책을 직접 펼쳐 볼 수 없다는 답답함이 곧 그의 독서를 중단시켰다. 취향대로 책을 진열해두었던 B4층이 문득 그리워지곤 했다. 그러나 되돌아가도 꺼내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가끔 그는 자신처럼 사방을 배회하는 존재들에게 말을 걸었다. 드물게 온전한 사고를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육체를 벗어난 자유로움에 도취되어 이내 에드워드 메이슨을 남겨두고 허공으로 솟구치곤 했다.


  정말이지, 다들 배려심이 부족해. 점점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을 무렵, 에드워드 메이슨의 머릿속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건물 안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불타는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확인한 그들은 제각기 처참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처럼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디서부터 그들을 찾아야 할지, 뾰족하게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육체가 없어진 뒤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래 전에 읽었던 오컬트 책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유령들이 종종 등장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물건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누군가의 꿈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며, 육체를 점령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페이지 너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독자처럼 그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을 뿐.

 

  -그것만으로도 멋지지 않아?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창피한 일들을 줄곧 하잖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안심하겠지. 우리가 한참 전부터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드물게 제대로 된 화법을 구사하는 남자였다. 남자는 에드워드 메이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파트의 벽을 통과해 유유히 사라졌다. 이게 멋지단 말이야? 남자의 말은 잔잔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할 일이 주어지지 않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음에도 그러하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다면 생전과 무엇이 다를까. 에드워드 메이슨은 남자의 말을 조금은 수용해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는다. 언제나 그가 원하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에드워드 메이슨은 도로의 표지판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남자처럼 무턱대고 벽을 통과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엿보고 싶진 않았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자신의 기준에 걸맞는 사람들을 골라냈다. 상냥하고, 똑똑하고, 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잠들 수 없는 그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들어줄 사람들을 찾았다. 그가 찾아낸 사람들은 때로는 십대 소녀이기도 했고, 죽음이 가까워진 고령의 노인이기도 했으며, 두 손을 모아 경건하게 기도할 줄 아는 젊은 남자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메이슨은 그들의 침대나 소파, 사무실의 한 구석에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무덤의 디자인을 생각했다. 비석의 재질과 형태, 무덤의 크기, 적당한 습도의 흙, 잘 짜여진 아름다운 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무덤의 행진은 한동안 에드워드 메이슨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나라면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오랫동안 흙과 돌을 만져온 두 팔은 단단했고 두 다리는 점차 힘이 붙어 가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편안한 쉼터로 인도할 수 있었건만, 멍청하고 난폭한 녀석 때문에 자신의 계획은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내 죽음은 최악이었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고. 더러워진 옷을 내려다보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지금쯤 감옥 안에 있을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신체 능력을 가졌지만, 머리가 텅 비어 있는 탓에 번번이 제물을 놓치면서 짜증만 부리는 남자였다. , 결국 그 녀석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잖아? 사형 판결 뉴스를 본 순간 차오르는 기쁨에 에드워드 메이슨은 말 그대로 공중을 날았다. 아아, 역시! 멍청한 녀석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야! 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는 레이첼의 존재는 건물을 떠나던 날부터 에드워드 메이슨의 기억 한 편을 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존재가 이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레이첼에 대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또다시 새장 밖을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멀어져버렸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레이첼?

 

 

 

 



 

  시설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에드워드 메이슨은 레이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레이첼의 행방을 알아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시간은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많았고 그가 통과하지 못하는 벽은 없었으며 듣지 못할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금까지 지켜보았던 사람들을 모두 외면할 정도로 레이첼의 존재는 에드워드 메이슨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한 눈에 반해버린 상대를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심장이 있었다면 지금 엄청 두근거렸을 거야. 마침내 열리는 문 사이로 레이첼의 하얀 얼굴이 드러나자 에드워드 메이슨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레이첼!

 

  흰 원피스를 입은 레이첼은 건물 안에서 만났던 그대로 아름답고 텅 비어 있는 얼굴로 천천히 서랍을 향해 다가갔다. 레이첼이 자신의 몸을 통과했을 때, 에드워드 메이슨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진 듯 온 몸이 시려오는 감각을 느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사고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사랑하는 레이첼. 아름답게 잠들게 해주고 싶었어. 벗을 수 없는 자루 너머에서 일그러지는 표정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만이 에드워드 메이슨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나이프를 쥐고 침대에 누운 레이첼의 머리맡에 웅크려 앉은 채,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달빛에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무덤 안에서 눈을 감을 때처럼, 온 몸을 둥글게 말고 싶은 기분이 지독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된다는 뜻이다. 비석 위에 앉아 에드워드 메이슨은 오래 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을 곱씹었다. 눈앞에서 레이첼이 또다시 잭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을 본 뒤로, 그는 늘 비웃었던 존재들처럼 멍하니 한 자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맴돌다 보면 언젠가는 점차 옅어지며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바람과는 달리 상심은 깊었고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 번도 멍하니 앉아 시간을 낭비한 적 없었던 그에게 넘쳐나는 시간은 너무나 버거운 존재였다. 자신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그저 구경만 하는 것도 괴로울 따름이었다.


  이 상태로는 어떤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어. 상상만 하는 건 이제 즐겁지 않아. 그의 생각은 흐르고 흘러 생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 쌓아왔던 지식에 도달했다. 왜 깨어났지? 어리석은 질문임을 알면서도 에드워드 메이슨은 답을 찾고자 했다. 마침내 한 구절을 떠올렸을 때 그는 자신을 세상에 붙들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참을성과 끈기, 성실함이 요구되는 시간이었지만 무덤을 팔 때보다 덜 수고로운 일에 불과했다. 한 인간, 하나의 수수께끼, 깨어 있음, 질문의 폭은 점점 좁아져 결국 레이첼이라는 대답을 향해서 나아간다. 왜 내가 아니었어, 레이첼? 나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 혼잣말을 되뇌이는 에드워드 메이슨을 묘비를 찾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갔다. 그의 맞은편 묘비 앞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은 다정한 목소리로 무덤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바보같긴. 그 무덤의 주인은 정 반대편에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구. 생각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피해 에드워드 메이슨은 묘지의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몇 번을 거듭 생각해봐도 자신이 아니라 잭인 이유를, 에드워드 메이슨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레이첼은 그 녀석 손에 엉망으로 죽겠지. 제대로 된 무덤에도 들어가지 못할 거야. 그러나 삽은커녕 깃털하나도 쥘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다가올 일을 막을 수 있을까. 에드워드 메이슨은 또다시 다가오는 상심의 기운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무한하고 자신에게는 잭이 가지지 못한 끈기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조금 더 열심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른다. 막연하게 떠오르는 희망을 위해 에드워드 메이슨은 생각의 바다를 헤엄쳐 나갔다.


  생은 유한하지만 죽음은 무한하다. 언젠가 이 검은 바다를 건너기 위해 레이첼이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겠지. 그 때 레이첼을 마주할 수 있어. 그건 잭같은 녀석은 할 수 없는 일이야. 이 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건, 나처럼 레이첼을 배려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인걸. 무서운 걸 참고 레이첼을 마중하러 갔던 것처럼, 나는 기다릴 수 있어. 나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멋진 일들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는걸. 레이첼이 ‘yes’라고 말해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분명 멋지게 이뤄줄 수 있을 거야. 왜냐면 여긴, 내 구역이니까.

 

  





 

[Rondo] 회선곡주제가 같은 상태로 여러 번 되풀이되는 형식의 음악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7. 7. 9. 16:57

<살육의 천사 온리전>에 나오는 회지 샘플본입니다.

(회지에는 샘플본의 내용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We Need to Talk About 

Issac Foster



 

 




#1. Alex’s Record

 


  ……아이작 포스터는 OOO일 시설 창문을 통해 침입, 보호 중이었던 레이첼 가드너를 납치하여 도주하였습니다. 사건 당일 밤 인근에서 키가 크고 수상한 차림의 남성과 흰 원피스를 입은 10대 소녀가 시 외곽 도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는 목격 증언에 따라, 경찰은 현재 고속 도로를 통제하고 아이작 포스터를 수배 중입니다. 확보된 아이작 포스터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으며, 목격 시에는 즉시 경찰에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피가 묻은 잿빛 후드 점퍼, 큰 키, 마른 체형, 얼굴 및 상반신에…….

 

  TV화면에 떠오른 아이작 포스터의 사진은 교도소에 이송 당시 찍은 것이었다. CCTV를 용케도 피해간 모양이군.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진 속의 아이작 포스터는 잿빛 후드 점퍼 대신 주황색 죄수복 차림으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알렉스는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서 뉴스를 시청할 기분이 아니었다. 사무실의 캐비닛을 뒤져 아이작 포스터의 서류를 꺼냈다. 아이작 포스터가 이송되어 온 날부터, 그의 눈앞에서 한껏 비웃음을 짓고 사라져버린 날까지의 모든 기록이 거기에 있었다.

 

  감옥 안의 일과란 회색으로 점철된 벽만큼이나 단조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알렉스는 매일 매일, 아이작 포스터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기록했다.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았다. 늘 같은 자리에서 꿈틀대고 있지만, 잠시만 눈을 떼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리는. 아이작 포스터는 그런 위험성을 품은 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작 포스터의 방은 텅 비어 있다.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사전에 계획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알려져 있는 탈옥수들은 늘 몰래 탈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은 탈옥수들이 사라진 이후에 발견되기 마련이다. 아이작 포스터의 방도 그런 이유로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알렉스도 조사에 참여했지만, 아이작 포스터의 방 안에서 단서를 찾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가능성까지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 알렉스는 늘 주의를 기울였다. 그럼, 우연일까? ……혼자서는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수 없다. 알렉스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모두 공범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던 아이작 포스터가 공범과 어떻게 연락을 취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범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국선 변호사나, 추가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경찰밖에 없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CCTV가 설치된 특수 면회실에서 두 팔을 결박당한 상태로 면회를 허락받았고, 면회자는 작은 구멍이 뚫린 유리창 너머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경찰이나 변호사가 아이작 포스터를 도왔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찰은 아이작 포스터의 혐의를 하나라도 더 추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변호사는 형량을 덜어주려는 일말의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경찰보다도 더 짙은 혐오감이 깔린 변호사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알렉스의 속이 불편할 정도였다. 그들과 아이작 포스터 사이에 어떤 협상의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면회 시간 내내 아이작 포스터는 하품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며 짜증을 내곤 했다.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레이첼 가드너 납치 혐의뿐이었지만……, 그 혐의를 벗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알렉스는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격통에 시달렸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가급적이면 피하라고 조언했지만, 아이작 포스터가 스스로 감옥에 걸어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증상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헤아렸다.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뉴스가 보도되기 이전에 경찰에서는 알렉스의 근무 기록을 참고 자료로 요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은 알렉스의 손에 되돌아왔다. 수사가 종결되지 않았는데 자료가 되돌아왔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알렉스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기엔 충분했다. 철저하게 관리하고, 기록했지만 쓸모가 없다. 애초에 아이작 포스터는 탈주가 아니라 도주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살인범에게서 눈을 떼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역시 그 날 억지로라도 동행을 요청했어야 했다. 알렉스는 밀려오는 후회에 얼굴을 쓸어 내렸다. 아침 점호를 위해 교도소 내부를 순회할 때마다 아이작 포스터의 빈 방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멍청한 형사들이라도 그 방에 채워 넣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았다. 알렉스는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쩌면 경찰이 놓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 아이작 포스터가 눈앞에 있는데도 놓친 자들이니, 글자로 된 아이작 포스터의 흔적은 그들의 시야에 닿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알렉스가 밀려오는 후회와 가슴을 찌르는 통증-어디까지나 물리적으로-을 떨쳐낼 길은 하나뿐이었다. 알렉스는 첫 번째 종이를 눈으로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글자의 한 획까지 놓치지 않을 작정이다. 몇 줄의 글자가 불씨가 되어, 그의 머릿속에 아이작 포스터의 기억을 피워 올렸다.

 

 

 


 

  아이작 포스터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부터, 알렉스는 자신이 그와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더불어 아주 잠시만 알고 지내게 되리라는 것도.

 

  법정에서 아이작 포스터는 어떠한 동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사형이 구형되었을 때도,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사의 증언 도중 뭐 임마? 알아듣게 말해!’ 라고 발언한 것이 전부였다.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의 그 태도가 구형에 힘을 실어주었으리라 생각했다. 이로써 누구도 아이작 포스터에게 연민이나 동정, 생명 윤리 따위의 기준을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알렉스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송되었던 날, 아이작 포스터는 카메라를 보더니 갑자기 작게 웃었다. 수감자들 중에서는 사물을 보고 연관된 범행을 기억해내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기념품을 만들어 간직하는 자들도 있으니, 아이작 포스터도 그런 부류 중 한 명일 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무심하게 셔터를 눌렀다.

 

  알렉스가 근무하는 교도소에는 대개 사형 집행이 확정된 중범죄자들이 이송되어 왔다. 아이작 포스터도 이곳에 들어온 자들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사형이라는 열려 있는 문을 향해 정해진 속도로 한 걸음씩 나아갈 따름이다. 특별 사면의 기회가 없는 이상, 그 외의 어떤 선택지도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이작 포스터의 방을 배정하고 교도소의 규칙을 설명하는 동안, 아이작 포스터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보고 있었다.

 

  “. 물이 나오잖아? ……감옥은 쓰레기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아이작 포스터는 병원과 구치소에서 사람들을 습격한 전과가 있다. 괜히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 있는 놈들이 다 그렇겠지만, 저 놈은 특히 제대로 돌아버렸으니까. 웃지도 반응해주지도 말아야 해. 알렉스는 교도소장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구치소에서 이송되어 왔을 때, 아이작 포스터의 두 팔이 구속 장치로 단단하게 결박되어 있었다는 점 또한.

 

  병원에서는 형사가 자신을 체포한 것이 기뻐서 웃었다는 이유로, 구치소에서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남자가 들뜬 상태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서, 경솔한 교도관이 자신을 비웃으며 자극해서, 혹은 쓸데없이 시끄럽게 울어대서, 알렉스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모종의 이유들이 아이작 포스터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극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었다.

 

  구치소에서 전달된 아이작 포스터의 서류를 읽고 나서, 알렉스는 행동 방침을 결정했다. 업무 외의 말은 최대한 삼갔고, 질서 유지 명목으로 그를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배제했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케이스는 이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아직 언론이 아이작 포스터를 주목하고 있었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아이작 포스터의 기사라도 보도된다면 곤란해지는 쪽은 자신이었다.

 

  프로그램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을 전달했을 때, 아이작 포스터는 독방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잘 됐네. 그런 놈들 사이에서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 듣고 있으면 짜증이 난다고.”

 

  글자를 못 읽는 것도 한 몫 했지만. 알렉스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는 수첩에 아이작 포스터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집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온순했던 수감자들도 예민해진다. 교도관들은 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자들에겐 어느 정도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평온하게 보내기 위한 배려나, 연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소장을 비롯한 교도관들은 자신의 업무에 어떤 소음도 끼어들지 않기를 원했다.

 

 

 

 


 

  알렉스의 업무 중 하나는 아이작 포스터의 일과를 그대로 작성하는 일이었다. 길게 적을 필요는 없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운동 시간에는 방범 철책으로 둘러싸인 운동장에 나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일광욕을 한다. 가끔은 자리에 앉아 졸기도 한다. 원래 그 자리는 다른 수감자의 자리였으나, ‘신고식이후에 아이작 포스터에게 넘어갔다.

 

  별다른 자극 없이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이곳에서, 뉴페이스의 등장은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 된다. 교도관들의 묵인 하에, 새 수감자는 기존의 수감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알렉스는 내심 인사를 계기로 아이작 포스터가 잠잠해지길 바랐다. 바깥에서 아무리 악명을 떨쳤다 한들, 이곳의 수감자들은 모두 신문 1면을 장식하고 들어온 이들이다. 그들이 무리를 지은 곳에서 고작 한 명의 살인범은 종잇장처럼 구겨지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제법 요란했던 신고식이 끝나고 나서, 아이작 포스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운동장의 제일 좋은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몇 명의 수감자들이 의료 차원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폭력 행위를 빌미로 아이작 포스터를 특수 감방으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알렉스는 주저했다. 형이 집행되고 나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조용한 교도소 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약간의 해프닝이 신고식이다. 아이작 포스터에게 조치를 취한다면 그건 아이작 포스터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장 또한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내 짤막한 한 마디가 소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옮겨. 뒤돌아 나가는 알렉스의 등을 향해 소장이 덧붙였다. 기자들에게는 새어나가게 하지 말고.

 

  특수 감방. 교도소의 가장 안쪽, 지문 인식과 출입 카드, 홍채 인식의 삼중 보안 장치가 달린 두꺼운 철문 뒤에 존재하는 격리된 공간. 기본적으로 수감자들에게는 독방이 주어지지만, 적어도 바깥을 볼 수 있도록 철창문이 달려 있다. 반면 특수 감방은 검게 칠한 철문에 손바닥 크기의 창이 하나 달린 것이 전부고, 그나마도 바깥에서만 개폐가 가능했다. 전기도, 식사도 공급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가 소음의 전부인 공간 안에서 식사도 물도 없이 이삼 일 지내고 나면, 수감자는 놀랍도록 얌전해진다. 알렉스는 자신의 손으로 몇 명을 특수 감방으로 인도했지만, 아이작 포스터를 호송하는 길이 가장 즐거웠다.’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해도 말이야,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할 말은 아니지. 우리는 저 인간들을 보호하는 게 아니야. 죽기 직전까지 얌전히 뉘우치게끔 감시하는 거라고.”

 

  소장의 말은 알렉스에게서 망설임을 지워주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일주일 정도는 필요하겠어. 알렉스는 감방의 문을 열어 어두운 내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이작 포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느낄 수 있었다. 주황색 죄수복으로 덮인 어깨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어떤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아이작 포스터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감방의 문이 닫혔다.

 

  일주일 동안 순회 시간마다, 알렉스는 문 앞에 서서 아이작 포스터의 반응을 기다렸다. 죄수번호를 호명하면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부르면 잠시 후에 안쪽에서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응답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침묵이 길어질 것이다. 창을 열어 아이작 포스터를 관찰할 수도 있었지만, 기를 꺾어 놓는 일은 지나치면 독을 키우기 마련이다. 적어도 알렉스는 수감자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있었으므로.

 

 


 

  감각이 예민한 인간일수록 특수 감방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통스럽다. 시간도 날짜도 알 수 없다. 공간에 대한 지각력이 사라지고, 찾아드는 허기와 갈증을 견뎌야 한다. 자신의 숨소리만 느껴지는 것, 오직 촉각에 의지해 변기를 찾아내고 배설해야 하는 불편함, 환기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고여 있는 공기가 점차 악취로 변해가는 것,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홀로존재해야 한다는 두려움, 보이지 않는 우주에 떨어져 돌아오지 않을 목소리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것……, 전부 아이작 포스터가 겪어야 할 일들이었다.

 

 


 

  근무일지에 생존이라는 글자만이 새겨진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알렉스는 특수 감방 앞에 서서 창을 열었다. 진동하는 악취에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환기 시설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알렉스는 문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아이작 포스터를 호명했다. 침묵.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면, 희미한 숨소리가 들린다. 대답할 기력도 없는 건가. 알렉스는 카드 키를 꺼내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나갈 시간이다.”

 

  “…….”

 

  아이작 포스터는 감방의 가장 안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접근했다. 자력으로 일어날 힘이 없다고 해도, 예민해진 상태에서 접근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 알렉스는 다시 한 번 아이작 포스터를 불렀다. 꺾여 있던 고개가 천천히 위를 향했다.

 

  갑작스러운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는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불꽃처럼,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빛이 아이작 포스터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인다. 알렉스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붕대 사이로 갈라진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 이 새끼……, 죽인다.”

 

  “말할 기운이 있다면, 일어설 수도 있겠군. 나갈 시간이다.”

 

  “……닥쳐! 뒈지는 줄 알았다고!”

 

  목소리에도 힘이 남아 있었지만, 아이작 포스터는 느릿하게 일어섰다. 구겨진 옷의 주름이 천천히 펴지는 것처럼 불안정하고 기이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자, 아이작 포스터는 벽을 짚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알렉스는 허리에 채워진 곤봉에 한쪽 손을 올리고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주어진 방으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철창 너머의 아이작 포스터가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알렉스는 수첩을 꺼내 이상 없음을 기록했다. 죽여 버린다. 작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아이작 포스터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말을 내뱉었다. 그 말 또한 기록할 지, 잠시 망설였지만 알렉스는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길게 늘어선 복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이작 포스터에게 물리적인 '교정'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적어도 그 사실은 파악했다.

 

 

 

 


 

  기록을 하기 위해 철창 너머를 들여다보면, 아이작 포스터는 운동장에서 주웠을 돌멩이로 벽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 적는 것도 아니고, 그림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알 수 없는 선들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갔다. 알렉스는 빠짐없이 선들을 옮겨 적고, 돌멩이는 압수했다.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었기에 그 선들의 정체가 알파벳이었다는 것을, 알렉스는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알파벳은……, 알렉스는 서류를 넘기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아이작 포스터가 그려놓은 선들은 경찰 측에서도 주목했을 것이다. 도주를 한 만큼, 감옥 안에서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 놓았다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 사실은 알렉스도 동의했지만, 자료는 빠짐없이 알렉스에게 되돌아왔다. 아무리 조사해도 알파벳 사이의 연계성을 찾을 수 없고, 마치 어린아이가 심심풀이로 한 글자 연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 낙서에 불과했다.

 

  경찰의 말을 알렉스가 받아들인 바에 따르면, 아이작 포스터는 감옥에 있는 내내 느긋하게 산책하고 낙서나 하며 빈둥거리다가 도주한 것이다. ……그 빌어먹을 붕대인간이! 그 낙서를 일일이 옮겨 적는 자신을 보며, 아이작 포스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에 덴 것처럼 뒷목이 화끈 달아오른다.

 

  알렉스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왔던 일은 교도관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쓸데없는 정보까지 넘겨서 수사팀의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아이작 포스터의 기록을 읽고 있다 보면 알렉스의 자부심에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알렉스는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좁혔다. ……기록에는 남겨두지 않았지만, 짐작이 가는 일이 있었다. 그 날,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 앞에서 처음으로 평정을 잃었다.

 

 


 

  특수 감방에 다녀온 이후로도, 아이작 포스터의 태도는 여전했다.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다면 이전까지는 본체 만 체 했던 알렉스를 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는 것일까. 그 반감은 알렉스를 부르는 호칭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어이에서 , ‘임마, ‘, 마침내 저 새끼로 불렸을 때,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를 면담실로 호출했다.

 

  붕대로 가려져 있어도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짜증을 알렉스는 침묵으로 견뎌냈다. 교도소의 생활이나, 편의에 대해 물으려 해도 입술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성실함과 진중함으로 쌓아올린 평정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었지만 아이작 포스터는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적당히 해. 소장은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짤막하게 말하는 것으로, 아이작 포스터의 처우를 모조리 넘겨버렸다. 이대로 말라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있고, 근무가 끝나는 시각 아이작 포스터와 인근 죄수들의 감방 문을 슬쩍 열어놓고 퇴근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집행일만을 기다리게끔, 하루하루 눈 뜨는 것이 고역일 만큼 교도소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그럴수록 적개심으로 타오르는 아이작 포스터를 보고 즐거워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알렉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고작 철창 하나로 분리된 공간 안에서, 저 쾌락살인범들과 같은 지대로 끌려 내려갈 수는 없었으므로.

 

  “혼자 있는 게 편한 모양이군.”

 

  “……하아? 네놈이 독방에 쳐 넣어놓고 무슨 소리냐?”

 

  쓸데없는 말을 했다. 아이작 포스터는 기가 막힌다는 투로 대꾸했고, 알렉스는 이내 후회했다. 저 태도에 대해 확실하게 못박아둘 필요가 있음에도, 알렉스는 화제를 빙 둘러 가고 있었다. 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지? 알렉스는 말을 고쳤다. 아이작 포스터는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적어도 알렉스의 시각에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난 이상한 놈들하고 말 섞는 취미는 없거든.”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알면 하지 말라고.”

 

  “…….”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좋지 않을까. 사형수 앞에서 말문을 잃은 교도관이라니, 웃음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알렉스는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졌다. 아이작 포스터가 알아들을 수준에서 적당히 경각심을 일깨워줄 만한 단어를 천천히 골라내려 했다. 마침내 알렉스가 경고를 하려는 순간, 아이작 포스터의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이런 건 왜 하는 거냐?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쁘다고.”

 

  “……이 곳이 감옥이고, 아이작 포스터 네가 수감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교도관이고, 네가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게 일이니까.”

 

  “……그러니까, 간수 같은 거라고?”

 

  “간수……, 오래 전의 표현이지.”

 

  “결국 같은 말이라는 거잖냐! 어렵게 말하기는.”

 

  알렉스의 눈에 비치는 아이작 포스터는 단선적인 인간이었다. 단순한 것을 좋아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짜증을 참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거침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중심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적당히 맞춰주면 제일 다루기 쉬운 타입이다. 알렉스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집행 날짜까지 내버려두면 알아서 사형장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렉스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알렉스는 최대한 단조롭게, 아이작 포스터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짐작되는 범위 내에서 용건을 전했다. 적어도 그가 아이작 포스터의 태도를 인내심만으로 버티지 않았다는 점을 슬쩍 내비치기까지 했다. 집행일까지 매일 편안하게 잠들고 싶다면. 알렉스는 그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내뱉었다.

 

  그 때, 아이작 포스터가 어떻게 앉아 있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좀처럼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의자에 기대듯이, 마르고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던가? 쏟아지는 말들이 불가해한 이국의 언어인 것처럼 의아한 얼굴을 했던가?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 속의 장면은 아이작 포스터가 던진 말로 까맣게 물들어버린다.

 

  ……기분 나쁜 것도 모자라서 재미도 없구만. 사람을 이렇게 묶어놓고 협박하는 게 네놈 취미냐? 간수란 놈들, 하나같이 취향 한 번 음침하네.”

 

 


 

  그 날 알렉스의 근무일지는 평소와 달리 문맥이 잘 맞지 않았고, 휘갈긴 글씨체로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 한 마디에 그렇게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더 무례한 수감자들도 있었고, 얼굴에 침을 뱉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날에도 알렉스의 근무일지에는 ‘45342번이 본관에게 타액을 분사함.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로, 교도소 내의 기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사료됨. 특수 독방 이동 요망.’과 같은 문장들이 기록될 뿐, 알렉스는 수감자에게 동요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아이작 포스터가, 붕대로 동여매어 표정을 알 수 없는 그 범죄자가 알렉스의 내부 어딘가를 건드린 것은 확실했다. 두 개의 눈동자가 각각 다른 빛으로 그를 비웃고 있었다. 빛의 반사에 의한 착각이거나, 계속되는 교대 근무와 면담으로 조금 지쳤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교도관으로 근무하며 세밀하게 조정해온 신경을 발로 걷어차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사형을 앞둔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대면해야 하는 것, 그들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발견하게 되는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스물스물 일어나는 연민을 억누르는 것, 사형 집행일마다 찾아오던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은 날에 소실되어버린 모종의 감각,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고압적으로 수감자를 내려다볼 때의 이상한 쾌감, 생의 끝자락에 도달해서도 회생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 알렉스의 손발을 저릿하게 하고 차마 앞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무감해지는 방향을 선택했기에, 그만큼 생각하지 않으려고 덮어두었던 것들을 아이작 포스터가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고 사라졌다.

 

 

 


  알렉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이건 내 업무다. 그리고 교도관님이라고 제대로 불러.”

 

  “무슨 상관이야, 그게. 네놈 이름도 모르는데.”

 

  알렉스는 수감자 제압용 곤봉도, 스턴건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권총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물리적인 폭력도 아이작 포스터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비웃음만 살 것이다.

 

  다만 알렉스 또한 아이작 포스터를 자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정말,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한 교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알렉스는 잠시 망설였다. 위험할 지도 모른다. 다만 눈앞에 앉아 있는 아이작 포스터는 범죄자다. 연쇄 살인범이자, 부부를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한…….

 

  “……자네가 내 이름을 외울 수나 있겠나? 교도관이라는 단어도 줄곧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

 

  아이작 포스터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어떤 말도 흥미가 없다는 듯이. 알렉스가 고심해서 내뱉는 말도,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유지해오던 평정심도 아이작 포스터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사뭇 턱이 아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알렉스는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붕대 아래에 감춰진 맨얼굴을 보기 좋게 뭉개버리는 상상은 알렉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고양시켰다.

 

  그러나 폭력을 쓰지 않아도 자신과 아이작 포스터가 놓인 위치를 감안한다면 얼마든지 아이작 포스터의 기를 꺾어놓을 수 있다는 일말의 확신이, 교도관으로서 누려왔던 알 수 없는 쾌감의 기억이 결국 알렉스의 입에서 한 이름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레이첼 가드너.”

 

  붕대로 가려진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의 눈에 잠시 떠오른 빛을 보았다.

 

  처지를 깨닫게 만들고 싶었다. 아이작 포스터에게 있어 레이첼 가드너는 단순히 놓쳐버린 타겟인지, 모종의 어떤 관계인지 알렉스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레이첼 가드너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아이작 포스터를 자극할 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아이작 포스터는 연행된 이후로 철저하게 외부의 정보와 격리되어 지내고 있다. 병원에서도, 구치소에서도 레이첼 가드너에 대해 함구했고, 이송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모범수에 한해 신문 구독이 허락되어 있지만, 아이작 포스터가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어이.”

 

  “시간이 됐군. 면담 종료다.”

 

  “내 말 안 끝났어! 갑자기 그 녀석 이름은 왜 말하는데?”

 

  미끼를 잘 무는군. 알렉스는 면담일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에 경고를 한 번 주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작 포스터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알고 싶다면, 얌전하게 지내도록.”

 

  이후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의 독방을 들여다볼 때마다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했다. 온종일 알렉스의 순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독방에 가까워지는 소리에 아이작 포스터가 철창을 향해 덤벼들었으므로. 말해. 짐승이 위협을 가하듯 낮고 으르렁대는 목소리였지만, 그럴수록 알렉스는 말을 아꼈다. 뭘 말하라는 건가. 그가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가면, 철창을 부술 듯이 내려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갈수록 통제가 안 되는군. 소장이 건넨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교정의 일환입니다. 소장은 알렉스를 비난하지도, 만류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전과 같은 태도로 알렉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아이작 포스터가 무사히 사형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일이었다. 알렉스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연락을 받고 알렉스가 급하게 도착했을 때, 아내는 병실 침대에 누운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경미한 타박상에 그쳤지만, 의사는 교통 사고의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 며칠간 입원을 권했다. 가벼운 접촉 사고였다. 신호 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뒤에서 차가 갑작스럽게 들이받았고, 차의 범퍼는 찌그러졌지만 에어백이 완충 역할을 제대로 했다며 잠에서 깬 아내가 웃어 보였다.

 

  간호를 위해 자리를 비운 며칠간, 아이작 포스터의 임시 담당은 레이첼 가드너에 대한 정보를 흘린 모양이었다. 네놈과는 관련 없는 곳에서 잘 지내는 모양이더군. 알렉스는 하마터면 그 자식을 사형대로 끌고 갈 뻔 했다. 레이첼 가드너에 대한 정보를 아주 조금 흘리는 것만으로도 아이작 포스터를 통제할 수 있었건만, 쓸데없이 너무 많은 정보를 주는 바람에 아이작 포스터를 통제하기는커녕 목줄을 풀어 준 셈이다.

 

  업무로 복귀한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동안의 밀린 업무와, 수감자들 사이의 폭행 사건이었다.

 

  신고식 때보다도 참혹했다. 아이작 포스터를 비롯한 다섯 명의 수감자와 두 명의 교도관이 큰 부상을 입었고, 제각기 수술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알렉스가 제대로 된 정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아이작 포스터를 제외한 수감자들이 호송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다만 아이작 포스터만이 응급 조치를 끝내고 감방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 소장은 알렉스에게 이대로 교도소 내에서 치료를 마칠 것인지, 다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근 병원으로 호송할 것인지 판단을 요구했다. 아내의 사고에 맞물린 교도소 내의 사고가 알렉스의 이성을 마비시켰지만, 알렉스는 침착하게 정황을 파악해나갔다.

 

  한밤중에 누군가 아이작 포스터와 인근 수감자들의 철창 잠금 장치를 해제했다. 당직 교도관들 중 누군가가 수감자들과 결탁한 모양이었지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임시 담당의 실수 이후로 아이작 포스터는 더욱 날뛰었고, 직접 나서기 싫었던 교도관들이 수감자들로 하여금 아이작 포스터를 잠잠하게 만들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이야. 알렉스는 병원까지의 호송을 요청했고, 동행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상하리만치 일의 진행 속도가 빨랐다. 알렉스는 아이작 포스터가 병원으로 호송되던 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서류에는 단 한 줄, 관할 서와 협력하여 병원으로 이송이라는 문장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기억은 좀더 세세했다. 타이밍 나쁘게 일어난 아내의 사고, 놀라울 만치 경솔한 임시 담당 교도관의 발언, 효과가 없음을 알면서도 아이작 포스터를 통제하려던 방식, 동행 요청의 거절……. 어쩌면, 어쩌면 어딘가부터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알렉스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동행을 거절한 것은 관할 서 측이었다. 인원이 많아질수록 이목이 집중된다며 아이작 포스터의 인적 서류만을 챙겨 갔다.

 

  소장은 왜 받아들인 거지? 알렉스의 의문에 소장은 변명하기 급급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으면 골치 아파져. 설마 도망갈 줄 알았겠나? 알렉스 자네도 포스터 그놈이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 않나. 젠장, 임시 담당 그놈은 해고했어.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놈을 목 졸라 버리고 싶다네.”

 

  책임을 묻고 싶어도 명확하게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관련된 수감자들을 차례로 면담했지만 모두 아이작 포스터가 입힌 부상에 대해 말하며 치를 떨 뿐,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 날 억지로라도 동행했어야 한다. 내심 아이작 포스터의 처참한 몰골에 자신도 방심했다고, 알렉스는 수없이 자신을 자책했다.

 

  그 날, 호송차에 타던 아이작 포스터는 분명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가와, 한 쪽만 올라가 있는 입매. 돌이켜보면 그건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아이작 포스터는 이미 그 때,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상을 입고도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당시의 알렉스는 불편한 속을 다스리며 넘어갔었다. 아내의 차 사고로 보험 사와 마찰을 빚고 있었던 것도 알렉스의 정신을 분산시키기에 충분했다.

 

  놓쳐버린 먹잇감을 두고두고 곱씹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찾아서 끌고 와야 한다. 언론에 보도되며 당한 수모를 되갚아주리라고, 알렉스는 이를 갈았지만 되갚아줄 당사자가 지금 눈 앞에 없다.

 

  설령 마주한다고 해도, 아이작 포스터에게서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 무례한 태도, 교도소의 질서 따윈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좋을 대로 행동하다가 마침내 빠져나갔다. 벌을 줘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타오르듯 번쩍이는 눈동자를 자신에게 향할 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지막 장에도, 답은 없었다. 알렉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남은 것은 아이작 포스터가 다녀간 흔적, 흔적뿐이었다. 흔적을 좇아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알렉스는 까칠해진 얼굴을 매만졌다. 돌아와, 돌아와라. 얼굴을 마주하고, 이번에야말로 그 기분 나쁜 태도를 고쳐 줄 테니. 그리하여 자신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

 

 

 

 

 

 

-#1. End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7. 3. 15. 00:46

색의 소유

 

 


 

 

 

 

 

  깨닫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욕실의 거울은 낡고 지저분했을 뿐더러, 잭은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보는 섬세한 일들에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으므로. 잭은 후드 사이로 번지는 낯선 색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아무렇게나 자란 검은 머리카락의 끝에 햇빛처럼 스며든 황금빛의 의미를 잭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 뭐야, 이건?

 

  까맣고 푸석한 머리칼들 사이에서 숨길 수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한 가닥을 손에 쥐어 본다. 고요한 새벽의 정경에 번지는 햇빛처럼 눈 안으로 스며들 것만 같다. 잭은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혹은 아주 잠깐 스쳐갔던-사람들을 헤아려 본다. 이제는 이목구비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 그들 중 누구도 이런 머리카락을, (잠시 간수 복장의 여성이 떠올랐지만 잭은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지워버렸다.) 염색하지 않고 가진 사람이 없었다. , 어쩌면, 그건가. 잭은 처음으로 언어를 습득한 사람처럼 혀끝으로 되뇌었다.

 

  - , 씨발, , 새새끼 말고 새, …ㅊ…새츼? 새채?새치! 그래, 새치! 뭐야, 그거구만.

 

  스스로 정답을 찾아냈다는 즐거움도 잠시, 잭은 또다시 생각의 미로에 갇힌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새치가 왜 나는 거지? 그보다 이렇게 잔뜩 나는 건가? 밀려오는 의문들에 잭의 사고는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모르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리가 없다. 그럼 보다 똑똑한 녀석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생각에 잠긴 레이첼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발끝을 향하는 시선이나, 작은 코와 입, 창백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희미한 숨소리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이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뭐라도 알겠지.

 

  어느 순간부터 레이첼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는 것쯤은, 잭도 눈치 채고 있었다. 함께 거리를 걸을 때에도,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에도 레이첼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하는 것처럼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포크가 부딪히기만 해도 서둘러 시선을 돌리는 레이첼의 사소한 변화에, 잭은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이렇게 레이첼의 행동들이 떠오를 때마다, 짜증이 날 정도로 옆구리가 뜨끔거린다.

 

  한밤중에 깨어나 물을 마시다가도,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도 불쑥 엄습하는 통증. 잠들어 있는 레이첼을 내려다보거나, 단정한 옆모습을 바라보면 이내 잠잠해지곤 하는 따뜻하고 예민한 감각. 이제껏 염두에 두지 않았던 작고 가느다란 기억들이 잭의 신경을 갉아먹을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잭은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내던졌다.

 

  - 그 녀석, 바느질이 특기라더니 제대로 꿰맨 것 맞냐고. 아직도 쑤시잖아.

 

  욕실을 나서자 작고 낡은 패브릭 소파 위로 솟아오른 조그만 뒤통수가 보인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는 레이첼의 얼굴 위로 길고 가느다란 금발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푸르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가, 아주 조금 방향을 바꾼다. , 또다. 뭔가가 울컥하고 뱃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어느 날 발견한 이 머리카락처럼 반짝이고야 말 것 같다. 잭은 다시금 병인지 새치인지 모를 머리카락으로 관심을 옮긴다. 이것의 정체라도 알아야 불편한 속이 조금은 잠잠해질 것만 같았으므로.

 

  - , 레이.

 

  - ?

 

  - 이거, 새치냐?

 

  - …….

 

  레이첼의 푸른 눈동자에 금빛이 물결치는 것도, 조그만 입술이 서로를 껴안듯 맞물리는 것도,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는 잭에게 보일 리 없었다. 평소처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는 거겠지. 어쨌든 모르는 건 이 녀석이 대답해줄 테니까. 잭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 새치 아냐, .

 

  - ? 그럼 뭔데? 병이냐?

 

  - 그냥, 머리카락이야.

 

  - 그건 나도 알아! 색깔이 다르잖냐!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 …….

 

  - 너도 모르는 거냐?

 

  다시, 침묵. 잭은 후드를 뒤집어썼다. 곤란하다는 듯이 움츠러든 눈썹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해답을 얻지 못하고 넘쳐흐르는 의문들이나, 솟구치는 짜증 때문에 빨라진 심장 박동보다도, 저런 표정이 더욱 속을 뒤집어 놓는다. , 옆으로 좀 가라. 레이첼이 만든 공간 위로 잭은 늘어지듯이 주저앉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자리가 따뜻하게 잭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뱃속이 여전히 뜨겁다. 옆구리가 따끔거린다. 시야에 금색이 끼어들어서 눈이 부셨다. 그 사이로 조용히 앉아 있는 레이첼의 옆모습이 보인다.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지 잔잔한 얼굴로 조그마한 입술을 가만히 들썩이고 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으면 뜨끔거리는 옆구리도 뱃속도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잭의 머릿속에 단어들이 떠올랐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어쩐지 혀 끝에 물고 오랫동안 굴려보고 싶은, 희미한 단어들을 붙잡으려 애쓰는 동안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왔다. 레이첼의 작은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할 무렵, 잭은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 모르겠다. 저 녀석은 알면서 왜 말을 못 하냐고. 이쪽은 몰라서 짜증나 죽겠구만. 됐다, 됐어. 나중에 생각나겠지. 나중에…….

 

 

 




  …레이첼의 시선이 잭의 발끝에서 거실 바닥에 스며든 얼룩을 향한다. 몇 번을 힘주어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 내버려둔 채였다. 가끔 눈에 들어올 때마다 닦아내고 싶어지지만, 이제는 풍경의 일부로 남아버린 얼룩 같은 것이 레이첼에게도 존재했다. 점점 커지다 못해 부정은커녕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감정이. 그러나 잭에게는 존재할 리 없고, 있다고 해도 인지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진득하고 찬란한 감정들이 레이첼의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까. 때로 어떤 색깔은 누군가의 온기로 빚어져 이토록 따뜻하게 녹아내릴 수 있다고, 단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6. 10. 27. 23:20

 색의 소유 -레이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욕실의 낡고 지저분한 거울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컸으므로. 레이첼은 가위를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낯선 색이 번지고 있었다. 길게 물결치는 금발의 끝에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검은 색의 의미를 레이첼은 너무나도 잘 안다. 이제는 숨길 수 없어. 가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리 염색으로 덧씌워도 자라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잭을 바라볼 때마다, 잭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함께 거리를 걸을 때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레이첼에게 점점 벅찬 일이 되어간다. 잭은 신경도 쓰지 않을 일들, 식사를 하다가 포크가 부딪히는 순간처럼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두고 그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가윗날을 거친 머리카락은 좀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물결치는 금빛 머리카락은 아름다웠지만, 끝이 들쑥날쑥하게 잘려 있었다. 레이첼은 거울을 보며 조금씩 가위를 움직였다. 잘려라. 잘려 나가라. 기도하듯 되뇌는 레이첼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카락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레이첼의 마음을 증명하듯 온통 검은색이다. 염색을 해도 이내 검게 물드는 머리카락을 감당할 수가 없어, 레이첼은 마침내 가위를 들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잭이 눈치 채지 않을까. 그녀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는 잭이라 해도 어쩌면, 언젠가는. 레이첼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한 마디가 다시 손을 움직이게 했다. 그 다음은? 잭이 눈치 챈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멈출 수 없는 불안함이 빠르게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맹세. 굳건한 맹세가 있지만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 맹세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도, 레이첼은 잘 알고 있었다.

 

  - , 레이! 언제까지 그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건데! 문 부숴버린다!

 

  문 너머에서 잭의 거친 목소리가 울린다. 레이첼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았다. 잠시만, . 부수지마. 잔뜩 짜증이 났는지 연신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수납장 안에 가위를 숨기고, 머리카락 뭉치를 쓰레기통 안쪽 깊숙하게 넣어두고 나서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본다. 언제나처럼 잔잔한 표정의 소녀가 서 있다. 그러나 눈동자의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쿵쿵 울리는 맥박 때문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소녀도 서 있다. 레이첼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막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는지 하얀 붕대가 감긴 손이 보인다. 내려다보는 황금색과 검은 눈동자에 레이첼은 숨이 막힐 것 같다.

 

  - 늦잖아! 뭐 하다 나오는 거야!

 

  - 욕실에서 하는 일.

 

  - 뭔 소리 하는 거야. 그보다 나가야 한다고.

 

  눌러 쓴 후드 사이로 검은 머리칼이 보인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혹은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 들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레이첼의 마음을 짓눌렀다. 버려둔 염색약 통을 발견했을 때도 잭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 때 레이첼은 언제든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분전환이라거나, 지금의 머리색이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혀 끝에 물고 있었던 말들을 내려놓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때에, 잭은 무심하게 염색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결국 헛된 노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첼은 겉옷 안쪽으로 머리칼을 감추고 잭을 따라 나섰다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6. 8. 6. 17:59

 사로야님 리퀘스트-잭X레이 AU

(주의-시대극, 잭과 레이첼의 나이 반전, 캐릭터 재해석)




그 이름을 르는 목소리










 

 

   마을에는 자주 안개가 서렸다. 오늘도 산신님이 연초를 태우는 모양이야. 사람들은 으레 그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소년은 고리타분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른 새벽 마당을 청소하다 보면 뺨에 와 닿는 거대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안개는 머리칼을 타고 내려와 얼굴을 감은 천을 간질이고, 종래에는 온 몸으로 퍼져 소년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이 빌어먹을 안개. 싸리비를 내동댕이치는 소년의 목소리에도 안개가 묻어났다.

 

  투덜거리면서도 소년은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레이첼이 먼지를 마시지 않도록 마당을 쓸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소젖과 함께 약초를 달인다. 보다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레이첼은 아침에 일어나면 거르지 않고 그 물을 마셨다. 마침내 놋그릇을 다 비우고 나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마당으로 나와 노래하듯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목을 울리다가 천천히 뱃속의 힘을 끌어 모아 내보내는 소리는 조그마한 오두막을 뒤흔들고, 안개를 타고 뻗어나가 온 마을을 뒤흔들곤 했다. 한참을 그러다보면 마을을 품은 산이 아득한 목소리로 화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부뚜막에 걸터앉아 소년은 레이첼의 가냘픈 몸 안에 있을 공동을 상상한다. 소리는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움푹 꺼진 배를 매만진다. -. 잔뜩 힘을 주어도 입에서 나오는 건 그저 목을 울리는 소리뿐. 인상을 찌푸리는 소년을 보고 레이첼이 작게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소년의 몸 구석구석을 짚어주며 소리가 나오는 요령을 설명해주지만, 이내 소년이 손을 뿌리치고 밥이나 먹어, 짧은 말을 내뱉고 돌아섰다.

 

  조촐한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한창 자랄 시기인 소년의 손이 바쁜 데에 비해, 레이첼은 느긋하게 손을 놀린다. 먼저 젓가락을 놓은 소년이 멀거니 그 광경을 지켜본다. 해 다 넘어가겠네. 시선을 느꼈는지 레이첼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 , 더 먹을래?

 

  - ···아니.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턱을 괴고 앉아 울타리 바깥을 내다보며 소년은 할 일을 헤아린다. 산에 가서 땔감도 주워야 하고, 레이첼이 먹을 약초며 나물도 캐야 한다. 찾아오는 이가 없으면 그저께 딴 열매를 다듬는 일도 할 요량이었으나, 소년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레이첼도 그것을 보았는지 천천히 손을 놓고 옷매를 가다듬었다.

 

  - 레이 아기씨, 계신가요?

 

  레이첼의 손님이다. 상을 물리며 소년은 찾아온 이의 행색을 살폈다. 나물이 든 바구니를 이고 온 아낙이었다. 그럼 그렇지. 마을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워서 돈 대신 나물이며 땔감 따위를 손에 들고 온다. 잭과 내가 굶는 일이 없으니, 괜찮아. 레이첼은 웃었지만, 소년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온전히 레이첼의 몫이기에, 소년은 군말 없이 오두막에 향을 피우고 레이첼의 목에 의료용 천을 감싸 준다. 아낙이 내심 불안한 얼굴을 하자 레이첼은 차를 권하며 차분하게 토닥였다. 곧 나을 거예요. 마을의 유일한 치료사가 하는 말에 아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약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방 한 편으로 물러선 소년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레이첼이 목을 가다듬었다. 맑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목을 울리고, 이내 폐에 모인 숨을 뱉으며 다시금 소리를 끌어올린다. 소년은 머릿속으로 레이첼의 몸속에 있을 작은 공동이 헐떡이는 광경이 그린다. 그 안에 있는 소리를 목의 힘만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낡고 어두운 오두막 안에 울려 펴지는 소리를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쩐지 뱃속이 뜨거워진다. 아낙도 그 기운을 느꼈는지 배를 움켜쥐었다. 에그머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하는 아낙의 귀로 점점 커져가는 레이첼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괜찮으니 소리를 내 보세요. 아낙이 떠듬떠듬 입을 놀린다. , , 아이고. , 아아-, -. 낮게 울리는 소리에 소년은 눈을 떴다.

 

  기이하다. 몇 번을 보면서도 소년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레이첼의 목소리는 먹물 한 방울이 고인 물에 퍼지듯, 낮고 탁한 아낙의 목소리에 스며들었다. 두 소리는 한참을 뒤엉키며 씨름을 한다. 힘에 겨워 얼굴이 벌게진 아낙을 레이첼의 목소리가 어루만졌다. 병의 근원까지 다독여 가라앉힐 것처럼, 레이첼은 평온한 얼굴로 제 몸의 생명력을 담은 소리를 낸다. 뱃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에 소년은 귀를 곤두세웠다.

 

  목소리는 생명의 근원을 담은 힘이다. 그 말에 깊이 매료된 레이첼의 조부는 연구 끝에 중국의 음공을 변형하여 소리로 사람들을 돕는 의술의 한 종류를 만들어냈다. 소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가며 이루어지는 의술. 대를 이어, 레이첼은 걸음마를 할 무렵부터 그것을 전수받았다. 서역인이었던 조부가 물려준 풍부한 성량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경외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소년이 그 치료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낫는 사람들을 보고 나니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 , 좋은 산나물을 받았어.

 

  아낙이 돌아간 후,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레이첼이 웃어 보였다. 제 목숨 깎아먹고 받는 값이 고작 말린 나물이라니. 소년은 미간을 좁혔다.

 

  - 왜 그래, ? 어디 아파?

 

  - ······.

 

  차라리 수도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산골에서 배앓이나 두통 따위를 고치고 있기엔 레이첼의 힘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수도의 온갖 부자들이 그녀를 본다면 금괴라도 내놓으며 애원을 할 텐데. 그럼 고작해야 나물이나 땔감 따위에 만족하며 사는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수도에 늘어선 화려한 저택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몸 여기저기를 짚는 레이첼의 손을 걷어냈다.

 

  - 의원 놀이 할 시간에 목이나 간수하라고.

 

  바구니를 낚아채는 소년에게 레이첼이 되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남 걱정할 시간에 몸이나 챙기면 좋을 것을. 이대로라면 레이첼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이 작은 산골에서 평생 돈도 안 되는 일만 하다가 일찍 죽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서 말을 할까,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다듬으며 소년은 한참동안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뒤로 소년이 몇 번이고 말을 꺼냈지만, 그때마다 레이첼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곳이 편해. 한결같은 대답에 소년은 울컥 올라오는 뒷말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그렇게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느냐고, 너도 네 아버지처럼 이 산골에서 썩어버릴 거냐고. 애꿎은 울타리를 걷어차는 날들만 늘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레이첼을 볼 때마다 아기씨, 아기씨 하면서 따르지만 그녀의 뒤에서 걸어가는 소년에게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곤 했다. 소년은 몇 년 전에 이 마을로 흘러 들어온 외지인이니까.


 소년이 태어난 곳은 아주 작은 어촌으로,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새벽마다 물질을 하고 그물을 던져 하루를 버티는 곳이었다. 사람들에게서는 모두 짜고 매운 바다 냄새가 났다. 신발 하나도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오두막에서, 소년은 여섯 명의 형제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부모와 함께 살았다. 서로를 이불과 베개 삼아 몸을 웅크리고 지냈던 날들, 소년은 걸핏하면 손위형제들과 주먹다툼을 했다. 배를 띄우지 못하는 날에는 아홉 명이 단칸방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었다. 소년의 입담이 거친 것도, 매일 조각배에 의지해 바다로 향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 날의 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소년도 지금쯤 아버지를 따라 조각배에서 거친 그물을 맨손으로 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채기가 나도 눈물을 보일 겨를도 없이 그물을 끌어올려야 하는 날들, 퍼덕이는 물고기보다 생기 없는 얼굴로 손을 움직여야 하는 그런 삶 속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아버지는 더 나을 것도 없이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당연한 것처럼 아이들을 낳아 고함과 주먹질로 길러냈다. 가장 마지막에 태어난 소년의 기이한 눈동자 색을 확인했을 때부터, 그들의 삶은 더욱 척박한 길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 안에서 소년의 외모는 피할 수 없는 소외를 불러왔다. 소년의 한쪽 눈은 찬란한 황금색이었고, 사람들은 소년을 멀리했다. 유년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내야 했던 것도, 자신을 피하는 형제들과 주먹다툼을 벌였던 것도, 아버지가 집어던진 화로에 맞아 몸에 불이 붙었던 것도 모두 소년이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에서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버텨야 했다. 어디서든 불어오는 습기 어린 바람이 때때로 상처를 파고들어 진물로 흘러내렸다. 깨끗한 천이나 제대로 된 간호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방치되고, 걷어차이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약을 집어삼키고 온종일 구역질을 했다. 저 놈은 이제 쓸모가 없어. 겨우 살이 아물어갈 때 즈음, 벼락처럼 내리꽂힌 그 말이 죽은 듯이 누워만 있던 소년을 일으켰다.

 

  어떻게 했더라. 소년은 치솟아 오르는 기억에 속이 뒤틀릴 것만 같다. 레이첼과 함께 지내며 점차 안정되었던 기억들은 불쑥,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소년을 덮치곤 했다. 그 때, 그 날에, 소년은 형제들이 작은 칼로 건조할 생선들을 다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비린내와 내장이 양철통 안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 그 속에서 간신히 숨을 쉬던 소년에게 상처에 소금을 비비듯이 그 말이 흩뿌려졌다.

 

  분노이거나, 슬픔이거나, 겹겹이 쌓인 증오, 파랗게 빛나는 슬픔과 절망,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막막한 감정들이 소년의 안에서 거대한 덩어리로 자라났다. 그리고 소년의 옆에는 생선 내장 찌꺼기가 달라붙은 작은 칼이있었다.

 

  …정확하게, 찔렀을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기억의 비가 내린다. 비명 소리, 고함 소리, 누군가가 소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아팠던가. 소년은 몸을 붙드는 수많은 손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뿌리치고 내달렸다. 낡은 문을 때려 부수고, 소금기로 가득해 숨이 턱턱 막히는 길을 달려 정박되어 있는 조각배를 탔다. 그 배는 소년의 아버지가 몇 십년간 바다를 누비던 배였다. 줄의 매듭을 푸는 법도, 묶는 법도 소년은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배웠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바다 한복판에서 구토하고 쓰러지고 비명을 지르기를 수차례, 소년은 마침내 깨달았다.

 

  아무도 소년을 쫓아오지 않았다.

 

  대신 견딜 수 없는 허기가 소년의 내장을 찔러왔다. 그 때 소년은 자유란 구역질이 나도록 배가 고프고, 온 몸이 쓰라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혼자서 떠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 배를 대었던 마을에서부터, 소년은 바다를 떠돌 때처럼 정처 없이 흘러 다녔다. 아무데서나 잘 수 있었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면 달려들었고, 쫓기기 전에 달아났다. 소년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자유를 만끽했다.

 

  레이첼이 살고 있는 마을에 닿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소년이 누리던 자유가 점점 커져 칼날이 되었고, 내키는 대로 움직이던 소년의 발목을 찔렀다. 운이 나빴어. 과일 몇 가지를 집었을 뿐인데, 소년은 쫓기는 몸이 되었다. 피하려다가 또 누군가를 찔렀고, 한 때의 소동으로 끝날 일이 점점 커져 소년은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산 속의 작고 외딴 마을, 그곳은 소년이 한동안 머무를 곳으로 충분해 보였다.

 

  산 속에 숨어 일주일 정도 지냈을까. 다시 우연이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술술 풀려나가 소년을 휘감았다. 레이첼은 필요한 약재를 구하러 산에 올랐고, 소년은 나무 위에서 중심을 잃었다. 커다란 새가 떨어진 줄 알았어. 정신을 잃은 소년이 깨어났을 때, 레이첼은 소년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소년은 자신이 깨끗한 이불과 푹신한 베개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달았다.

 

  - 발목은 치료했지만, 미안해. 피부는 아직 내 힘으로는…….

 

  - 봤냐?

 

  난생 처음 감아보는 깨끗한 천이었다. 낡았지만 향기로운 약초 냄새가 났다. 그러나 정갈하게 손질되어 빈틈없이 몸을 감싸고 있는 천의 감촉이 도리어 소년의 신경을 바늘처럼 뾰족하게 만들었다. 봤냐고!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목을 졸라버릴 생각이었는데, 고요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와 찬란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소년을 제지했다.

 

  색목인. 소년은 수도에서 몇 번인가 색목인을 본 적이 있었지만, 안개에 꽁꽁 감춰져 있는 마을에서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소년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레이첼의 눈동자는 소년에게 푸른 바닷물의 기억을 불러왔다. 이런 촌구석에 색목인이라니, 자신보다 더 수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레이첼은 어떤 동요도 없이 소년의 말에 대답했다.

 

  - 나는 레이첼. 이 마을의치료사 같은 거야.

 

  - …….

 

  - 왜 나무 위에 있었어?

 

  - 네 녀석이 알 바 아니잖아.

 

  품을 더듬었지만 항상 가지고 다니던 칼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찾아? 레이첼이 바느질함 속에서 소년의 칼을 들어 보였다. 경계하던 소년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레이첼은 칼날을 쥐고 소년에게 칼을 돌려주었다. 무슨 속셈이야, . 소년의 물음에 레이첼은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물건이니까.

 

  네 것. 그 말은 소년에게서 살기를 앗아갔다. 레이첼은 소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항상 깨끗한 천을 주고, 낡았지만 정갈한 옷을 주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가끔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밤에는 다시 잠들 수 있는 온기를 주었다. 소년의 마음에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안개처럼 흩어버렸다. 소년에게 이름을 준 사람도 레이첼이었다. 조부의 이름이지만, 그 울림이 좋아서 레이첼은 몇 번이고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때로는 아이작, 때로는 잭. 소년은 점차 그 이름에 익숙해졌다. 외진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이름은 매일 서로를 부르고 알아가고, 기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 사실, 아버지는 수도의 관리였어.

 

  - 그럼 넌 왜 이 촌구석에 있는 건데.

 

  - 높은 분을 치료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었나봐.

 

  - …….

 

  - 그래서 여기로 왔어.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에서 함께 살았어.

 

  각자의 이불에 누워 어색한 침묵을 맞이할 때면, 레이첼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양을 탐험하던 조부가 마침내 정착하게 된 경위나, 조부와 아버지가 수도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좌천된 이후로 이곳에 정착하면서 치료사 어르신으로 불리게 된 이야기까지, 짤막하지만 언제나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소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모든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언젠가 레이첼을 수도로 데려간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

 

 








  남자는 두 명의 수행인과 함께 찾아왔다. 수도의 귀족 자제 중 한 명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더없이 정중하게 레이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년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적어도 귀족이라면 레이첼이 앞으로 지내는 데에 부족함 없이 사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때 레이첼을 말렸어야 했다. 소년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후회는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처럼 소년의 안에서 기억을 불태우고 마음을 지져놓았다. 그 남자의 병은 레이첼이 고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 어느 때보다 버거운 상대였다. 치료는 일주일에 걸쳐 계속되었고, 남자는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혼사를 앞둔 그는 미래의 부인에게 폐가 될 수 없다며 레이첼을 몰아붙였다. 그 정중한 말투가 점점 레이첼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 그 새끼 살리다가 네가 죽을 거야? 그만 둬, 내가 말하면 되잖아.

 

  - 이제는 멈출 수가 없어, .

 

  - 왜 못 멈추는데?!

 

  그 때 레이첼이 어떻게 웃었더라. 소년이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도 레이첼의 미소를 그려낼 수가 없다. 다만 레이첼의 말만이 소년의 머릿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 꽃을 피우고 후회와 슬픔의 열매를 맺었을 뿐. 화를 내는 소년에게 레이첼은 미안해, 미안해, . 그 말만을 거듭했다. 무엇이 미안한 것일까. 왜 하필 자신에게 미안한 것일까. 소년은 차라리 화로를 뒤집어쓰고 싶었다. 하얗게 달아오른 숯이 피부를 지지며 타올랐던 것처럼, 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마음도 모두 불타 재가 되기를 바랐다그러나 안개가 호흡에 스미듯, 오랫동안 그 마음은 소년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한 계절이 지나서야 남자의 병이 나았다. 남자는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네며 소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물을 건네고 돌아갔다. 남자의 보답 중에는 레이첼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씻지 못했던 오명을 회복해내겠다는 약조도 있었지만, 그 약조가 지켜졌는지 레이첼은 알지 못할 것이다. 쇠약해진 레이첼에게 겨울의 서릿발과 건조한 공기는 치명적이었고, 소년이 아무리 노력해도 꺼져가는 생명은 되살릴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그 새끼를 내쫓아버릴 걸 그랬어. 소년의 말에 레이첼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젠가는 올 일이었다. 대를 이어 레이첼이 했던 일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남들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건강해진 사람들의 몸속에 깃들어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치료사의 일이었으니까.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삶, 소년이 겪고 싶지 않은 일을 레이첼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왔다. 마지막으로 잭을 낫게 했다면 좋을 텐데. 레이첼의 말은 소년의 마음에 박힌 가시가 되어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언저리를 찔러왔다.

 

  겨울임에도 드물게 눈이 내리지 않았던 날에, 소년은 레이첼을 산에 묻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소년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얼어붙은 땅을 팠다. 나무 관 위로 흙을 뿌릴 때 마침내 소년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관이 썩고 레이첼의 하얀 피부는 흙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 위에 자라날 꽃과 풀과 나무를 생각하면그들에게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를 입에 넣을 사람을 상상하면,  소년은 속이 뒤집어져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을 때처럼, 속이 쓰리고 구역질이 나고 아무도 없는 날들의 무게를 버텨야 하는 날들이 찾아왔다. 배에 손을 올리면 그대로 몸을 통과해버릴 것 같은 공동이 소년의 몸 안에서 자라난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것을. 소년은 레이첼이 살았던 날들처럼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불을 지피고 자잘한 일들을 하며 매일 눈을 뜨고 감았다소년을 살피러 찾아온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년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다 이내 돌아갔다. 그러는 중에도 공동이 점점 커져 소년은 그 안으로 자꾸만, 자꾸만 삼켜질 것 같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리 매일을 채워 넣어도 메워지지 않는 공동과, 문득 고개를 들면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소년은 그저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직 그 방법만이, 소년을 견디게 했다.

 

  숟가락을 한 벌 더 놓는 일이 줄어들었을 때, 소년은 다시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이 소년의 키는 한 뼘도 넘게 자랐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넣어두면서, 소년은 비로소 한 해가 지났음을 실감했다. 이제는 잠을 자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는 일은 없지만, 문득 한밤중에 눈이 떠졌을 때 떠오르는 그 이름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날들이 늘었다. 불러버리면, 소년을 지탱해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소년을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방으로 끌어들일 것만 같았다. 그 방 한 편에서 조그맣게,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를 기대할 것만 같아서 소년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자라나는 키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소년이 그 이름을 내뱉어버린 밤이 찾아왔다. 레이첼. 레이첼. 부를수록 흩어져버리는 이름. 소년의 일상을 부수고 마음을 지지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게 만드는 이름. 그 이름이 소년을 산으로 이끌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

 








 

 산 중턱에서 소년은 걸음을 멈췄다. 꼭대기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세져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눈보라 사이로 희뿌연 입김이 섞여들었다. 지팡이를 짚은 손이 덜덜 떨린다. 얼굴과 상반신에 두른 몇 겹의 천만이 겨울의 산에서 소년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인 양 나부꼈다. 소년은 얇은 무명옷을 단단히 여미고 다시 발을 내딛었다. 


  정상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오두막에 두고 온 겨울용 신발이며 옷이 생각이 난다. 챙겨오면 좋았을 것을, 후회가 스치지만 소년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도 춥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산은 한 번도 너그러운 적이 없었다. 마을을 품고 솟아오른 산은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는 언제나 안개를 흩뿌리곤 했다. 소년은 그 마을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 동안 신발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되돌아갈 여유는 없다.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소년은 맨발로 걸었다. 레이첼이 보았더라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괜히 코끝이 아려서,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정상의 공기가 온 몸으로 파고든다. 아아, 한결 낫다. 서리가 맺힌 천을 풀어내는 동안 소년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다.

 

  - 이것도 가져가라고. 빌어먹을!

 

  낡은 천이 굽이치며 날아간다. 소년의 음성이 그 뒤를 따라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떨렸다가, 이름 없는 곡조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굶주린 갓난아이의 울음처럼 애절하게 겹을 쌓아가며 산을 울렸다. 소년은 목이 터져라 외친다. 멀리서 그에게 응답하는 메아리가 돌아온다. 에에에에이이이-. 소년은 다시금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쥐어짠다. 겨울잠을 청하던 새가 날아오르고 그 기세에 나무가 파르르 떨다 못해 온 산이 진동할 때까지. 레에에이이이-레에에이이체에-레에이이체에엘-.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듯이 무너진다. 쓰러지면서도 소년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레이첼, 레이첼. 맨발로 겨울의 산을 오르게 한 그 이름. 산이 가져간 이름이니, 산꼭대기에서 애타게 부르면 들려올 것만 같았다. , 소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Posted by S.mojo
Angels of Death2016. 7. 27. 22:42




  단죄하는 천사. 내 이름은 캐서린 워드.

 


 


 

  남자는 죽어가고 있다. 방 모서리 천장에 달린 감시카메라의 렌즈가 남자의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반짝였다. 이제는 손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색한, 형체도 알 수 없는 덩어리를 내밀며 남자가 불분명한 발음을 내뱉었다. 살려줘. 모니터로 출력되는 그의 입모양을 보고 캐시는 웃었다. 아아, 아까워라.

 

  철창만이 유일한 출입구인 방 안에서 남자는 꽤나 오랫동안 버텼다. 캐시는 남자가 B3층에 도달했을 때부터, 그가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해왔다. 오래된 살점이 진득하게 눌러 붙은 의자에도 앉았고, 극약이 든 주사기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팔에 찔러 넣은 남자였다. 그 결과가 이렇게 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몸이라니. 방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저 남자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을까. 캐시는 웃음을 거두고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B3층에서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즐겁게 할 죄인은 남아 있지 않았다.

 

  드물게 B3층까지 올라오는 이들이 있었다. 다만 잭과 대니, 에디를 피해 올라올 만큼 어느 정도 신체적인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정신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여, 가스실에서 죽거나 캐시의 감옥 안에서 머무르는 쪽을 선택했다. 모니터 속의 남자는 꽤나 심지가 굳은 편이었지만, 함께 올라온 여자가 먼저 죽자 이틀을 견디지 못하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시한 결말이야. 캐시는 B4층으로 통하는 무전을 연결하고, 에디에게 남자의 이력서를 전송했다. 무덤이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캐시의 무료함도 그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 정말 참회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 거야?

 

  텅 빈 함정만이 가득한 B3층에 캐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상한 일이지만, 전면에 설치된 어떤 모니터에서도 반응이 없다. 손에 쥔 승마 채찍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B2층으로 무전을 연결한다. 웅장한 오르간 연주 소리. 이윽고 그레이 신부의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무슨 일인가, 캐시.

 

  - 신부님, 나 오늘 나가야겠어요.

 

  - 그 남자, 죽은 건가.

 

  - 그래요. 어차피 이 층에 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 거 아시잖아요.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순 없으니까, 나갔다 와야겠어요.

 

  - 고려해보도록 하지.

 

  캐시에게 있어, 언제가 될지 모르는 즐거움을 위해 언제까지나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레이 신부는 캐시의 방식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지만, 직접적으로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어딘가 소름이 돋는 것을 캐시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나는 단죄의 천사니까, 직접 움직일 수도 있는 거야. 그 말은 캐시 스스로에게 명분을 주고, 활력을 주었다. 그레이 신부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기에, 캐시는 겉옷을 챙기고 B3층의 엘리베이터 조작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바닥을 긁는 구두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그레이 신부는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별 말 없이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의 문을 열어주었다. 길게 펼쳐진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가는 동안, 캐시는 신부가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저 시선은 정말 끈질겨.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레이 신부는 캐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옅은 홍채 때문에 언뜻 보기에 백안으로 보이는 그 눈을 캐시는 똑바로 마주 보았고, 한참 후에 그레이 신부가 입을 열면서 그녀는 천사가 되는 길로 첫 발을 내딛었다.

 

  처음에는 호기심, 그 후에는 즐거우니까. 언젠가부터 일상이 되어버린 천사의 나날들. 비명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삶에 대한 집착으로 몸부림치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서 그레이 신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지금은? 미동도 하지 않는 모니터 속의 덩어리들과 부패하는 냄새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별다른 즐거움도 없이 온종일 모니터만을 바라보는 일은 캐시를 무료함의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었다.

 

  죄인들을 데려오는 건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을 접하는 대니가 주도했지만, 대부분은 캐시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처벌을 받았다. 대니가 선별한 죄인들은 약하고, 쉽게 괴로워하고, 얼마 못 가 죽었다. 좀 더 건강하고 튼튼한 죄인을 데려와. 언젠가 캐시가 던진 말에 대니는 실소하며 대답했다.

 

  - 그런 사람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네가 직접 데려오지 그래, 캐시?

 

  그 말은 캐시가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녀는 밤거리를 배회하며 적당한 장소에서 죄인을 물색한다. 적어도 자신의 층까지 도달할 만한, B6층에서 시작되는 건물의 규칙 안에서 살아남아 자신을 즐겁게 해줄 만한 인간을.

 

  웃옷 안쪽 주머니를 더듬어 주사기와 권총을 확인한 후, 캐시는 인적이 드문 거리를 향해 나아갔다. 목표를 정하면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장소까지 유인하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꼬리와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에 이끌려 그녀를 뒤따른 이들에게 망설임 없이 마취제를 투여하고 나면,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곤 했다. 대니를 부르거나, 취객을 부축하는 척 차를 타고 이동하여 건물 안으로 옮겼다.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를 하고 목표를 정하는 대니와는 달리, 그녀의 방식은 분명 즉흥적이고 위험이 따랐지만 죄인을 알아보는 눈만큼은 지금까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방식으로는 제대로 심판할 수 없어, 캐시.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지만 대니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러나 각 층의 관리자들은 서로의 방식에 간섭하지 않는다, 라는 절대적인 룰 앞에서 대니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설령 캐시의 예상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런 밤거리에서 마주하는 인간들이 백지처럼 새하얀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 때 그레이 신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캐시는 신부의 태도를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였다.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듯 허름한 술집 앞에서 캐시는 걸음을 멈췄다. 네온사인 간판의 일부는 등이 나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적당한 인간을 찾을 수 있을까. 그저 객기를 부릴 줄만 알고, 허약하기 짝이 없어 권총을 겨누는 순간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는 인간들을 적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캐시의 손은 닳아서 번들거리는 손잡이를 향했다.

 

  어차피 대부분의 죄인들은 B6층에서 잭에게 살해당하고, 그대로 B4층으로 옮겨진다. 아아, 살인마와 무덤지기만 좋은 세상이야. 캐시는 잭의 괴물 같은 회복력을 비롯한 신체 능력은 좋아하지만, 즉결심판과 같은 그 방식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끔 이런 귀여운 일탈을 저지를 수 있는 거지. 캐시는 가볍게 술집의 문을 밀었다.

 

  룰 위반. 그레이의 침묵 하에 자신처럼 성실한 간수에게 가끔씩 허락되는 일들. 오늘 그녀는 직접 B3층으로 인간을 데려가, 대니가 새로운 죄인을 데려오기 전까지 가능하면 오랫동안 천사로서의 일을 즐길 생각이었다. 한 층 한 층 번거롭게 올려 보내며 지켜볼 가치가 없는 인간들은, 천천히 깨닫게 해야 해. 쌓이고 쌓인 죄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는 그 순간을 마주해야 해. 하지만 캐시는 아직까지 진정으로 참회하는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

 

  술집 내부는 어둡고 지저분했다. 가게 안의 사람들의 검은 코트를 휘감은 캐시를 힐끗 바라보고, 이내 자신들의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느끼는 듯 음울한 음악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술에 잠겨 웅얼거리는 소리로 뭉개지고 있었다. 모니터로 지켜본 감옥 안의 이들과 무엇이 다를까. 술을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캐시는 흐물거리는 사람들을 살폈다.

 

  탈락. 가치 없음. 탈락.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음. 탈락, 바쁘게 움직이던 캐시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이는 세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보통 체격에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다. 그러나 일정한 속도로 술을 마시고,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품 한 번 하지 않는 그를 캐시는 숨을 죽이고 사냥감이 방심하기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바라보았다. 남자는 손을 들어 술을 더 시켰고, 짙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흐물거리는 덩어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남자. 캐시는 잠시 자리를 비우는 척, 남자가 앉은 테이블을 지나치며 그의 눈동자에 아직 초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

 

 



 

 

  그레이 신부는 캐시가 부축해온 남자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B3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장치를 조작했다. 캐시 또한 말을 아꼈다. 대니나 에디였다면 조금은 심각하게 따졌을 지도 모르지만, 그레이 신부는 관심을 가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무심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캐시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순간, 그레이 신부는 입을 열었다.

 

  - 너의 선택인 것을 알고 있겠지, 캐시.

 

  - 신부님, 무슨.

 

  문이 닫혔다. 캐시는 그레이 신부가 처음으로 무언의 동조를 깨트렸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너무 멀리 왔어. 낡은 기계들이 삐걱거리며 그녀와 남자를 B3층으로 데려다 주는 동안, 캐시는 신부의 말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래,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지. 천사가 된 것도, 내 안에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약기운이 가신 남자가 B3층의 입구에서 눈을 떴을 때, 캐시는 전원실의 의자에 앉아 승마 채찍을 쓰다듬고 있었다. 수면제의 농도를 조절하긴 했지만 남자는 예상보다 일찍 깨어났다. 건강하다는 건, 이럴 때 편리하구나. 캐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지 당황하던 남자가 마침내 굳게 잠긴 철창을 마구 흔들었다.

 

  - 뭐야, 여긴 어디야! 아무도 없어요?!

 

  붉은 입술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캐시는 마이크에 대고 아낌없이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고문의 길을 택하든, 사육되는 쪽을 택하든 남자는 캐시를 더욱 즐겁게 해줄 것이다. 기계를 조작해 철창을 열어주고, 남자가 선택의 기로에 서도록 이끈다. 간수의 인도에 따르는 죄수의 모습은 얼마나 어린 양처럼 처량한가. 캐시, 캐서린 워드는 언제나 사람들을 리드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녀의 가족들,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들도 어느새 자신의 목소리에 복종하듯 움직이곤 했다.

 

  평범한 가정 속에서 일원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무난한 부모와 가끔 그녀에게 대드는 친척들 사이에서, 캐시는 인간 사이의 우위를 체험했다.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둘러앉아 그 날의 이야기를 하거나 TV를 보다 잠드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캐시는 일찍 그들의 곁을 떠났다. 기숙학교에서 또래의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편이 훨씬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승마 채찍을 보기만 해도 바들바들 떨던 여자애-이름이 뭐였을까, 상관없지만-의 눈에 비친 자신은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웠던가.

 

  - 자아, 선택해. 나에게 보살핌을 받으면 오랫동안 귀여워해줄 수 있다구?

 

  모니터 너머에서 남자가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나 캐시는 남자가 곧 사육실로 들어올 것을 안다. 어쩌다 고문실에 들어가더라도, 전기의자와 관중들을 보는 순간 깨달을 것이다. 이 곳은 혼자서 버티기엔 너무 많은 장애물로 가득하다는 것을. 소리 없는 관중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공포를. 캐시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는 사육실의 철문을 열었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방 안에서 남자는 화를 내고, 흐느끼고, 애원하고, 저주를 퍼부었다가, 캐시의 자비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캐시는 모니터 너머에서 남자의 육체와 정신이 푸딩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스스로에게 약물을 주사할 무렵이 되었을 때, 캐시는 전원실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캐시는 늘 사육실은 새 구두가 더러워지니까 출입하고 싶지 않아, 라고 말했지만 이번만큼은 더러운 복도를 걸어볼 가치가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죄인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하품하고 있는 것보다는, 이제 곧 생명의 불빛이 꺼지는 죄인의 모습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과연, 어두운 방 안에서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캐시는 손전등으로 남자를 비췄다. 마치 젤리 같은걸. 시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빛의 온기를 느꼈는지 남자-혹은 형체가-캐시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 .

 

  - 후후, 아직 목소리를 낼 수 있나봐? 건강해서 좋은걸.

 

  하얗게 백탁이 온 눈동자가 천천히 캐시를 훑어 내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남자는 조금씩 몸을 흔든다. 벌어진 입에서 완성되지 못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캐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남자의 목소리는 끝을 알 수 없는 동굴 저편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기괴하게 흩어졌다. 자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캐시는 철문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남자의 몸은 이제 경련하듯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다.

 

  - 죽여.

 

  - 시시한걸. 그 말밖에 못하게 된 거야?

 

  - .

 

  완전히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캐시는 손전등을 껐다. 기왕이면 마지막 힘까지 짜내서 제대로 발악해주면 보기라도 좋을 텐데. 남자는 곧 죽을 것이다. 캐시는 구두에 묻은 살점들을 철창에 문질러 떼어냈다. 어두운 방 너머에서는 더 이상의 움직임이나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 또 끝이 나 버렸네. 캐시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녀는 무료함의 바다에 잠겨버린 듯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

 

 

 

 

 

 

  엘리베이터 개폐 장치의 경보가 작동했다. 캐시는 손을 뻗어 복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의 모니터 화면을 켰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화면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금발의 소녀와, 낫을 들고 있는 키 큰 남자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B3층에서 절대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아닌가. 잭이 담당 층을 이탈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기까지 올 줄이야. 무려 레이첼 가드너와 함께.

 


  캐시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해 줄 거야? 그녀의 시선은 맹렬한 기세로 낫을 휘둘러 문을 내리찍는 잭에게 고정되어 있다. 자아, 그럼 죄인을 맞이해 볼까. 초록색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한 기대감으로 일렁이고 있다. 부디,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해줘.

 


  어서 와, 참회의 시간이야. 나는 죄인들을 단죄하는 천사. 캐서린 워.

Posted by S.m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