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A2017. 10. 7. 14:01

미도리야 이즈쿠 X 바쿠고 카츠키

주제: "고백" 




Patience

 





 

   바쿠고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굴욕감만을 안겨준 체육 대회의 결과였다. 몇 개의 가정과 계산이 머리를 스쳤다. 오래 전부터 그려 놓은 전도유망한 미래에 닿을 수 있는 레일이 또 하나 펼쳐진다. 자신을 지명한 수많은 사무소 중 인지도가 높은 히어로를 찾아, 바쿠고의 시선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사무소를 가지 치듯 지워가는 그의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무도 지명하지 않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미도리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떠오른다. 그것이 미도리야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쿠고는 책상을 걷어차고 일어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버리고 싶다.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해빠진 인간, 고작 그 수준임에도 자꾸만 발치로 다가와 걸음을 방해하고 자신의 앞으로 굴러가려는 그 모습을 마구 흩어놓고 싶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각자 어느 사무소를 고를 지, 무엇을 얻고 돌아올지 들떠서 목소리를 높이는 중에도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내 미도리야의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같은 중학교 출신이기 때문인지, 혹은 운이 나빠서인지 앞뒤로 나란히 앉은 탓에 바쿠고는 줄곧 뒷자리의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미도리야의 공기 의자로 다시 떠들썩해진 주변은 예민한 바쿠고를 무신경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시끄러.”

 

   여러 개의 목소리에 섞여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미도리야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다. 한껏 눌린 톤에 서서히 힘이 실린다. 기본적으로 겁쟁이인 주제에,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겠지. 마침내 단언하듯이 내뱉는 단어들의 조합은 늘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그 눈, 그 시선, 바쿠고는 문득 주변을 둘러본다. 입학한 이후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은 가지각색이었지만 유독 끈끈하게 달라붙는 종류의 시선이 있었다. 발뒤꿈치에서부터 올라와 두 다리를 단단히 휘감고 훑어가다 마침내 목덜미 즈음에서 멈추고 마는. 시선은 늘 한 방향에서 온다.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 지니스트 사무소를 적어 넣었다. 썩을 너드는 발도 붙여볼 수 없는, 그리하여 어떤 시선도 닿지 못할 장소였다.

 

   직장 체험 전 날, 바쿠고는 햇살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걸었다. 따뜻한 공기 때문에 옅은 졸음이 밀려왔다. 일찍 잠들 생각으로 키리시마의 권유도 무시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바쿠고는 자신을 부르는 미도리야의 목소리를 들었다. 계단을 두어 개쯤 내려가자, 목소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 기어이 바쿠고의 발목을 붙들었다. 썩을. 바쿠고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수선하게 뻗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뛰어오는 미도리야가 보인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커지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다려, 캇쨩. 마침내 숨을 고른 미도리야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들을 마주하는 동안, 바쿠고는 현상된 사진의 피사체처럼 굳어 있었다.

 

   교활한 새끼.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바쿠고는 눈앞에 없는 미도리야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말들에는 여느 때와 달리 당혹감과 경멸이 혼재되어 있었다. 첫 대전 훈련이 끝나고 미도리야가 자신을 불러 세웠을 때도 이렇게 얼이 빠지진 않았다. 그저 깎여나간 자존심의 부스러기를 쓸어냈을 뿐, 미도리야의 말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날, 바쿠고는 침대에 누워 여러 번 뒤척였다. 바싹 말라버린 미도리야의 입술이 그리던 부드러운 곡선과, 상기된 두 뺨에 선명하게 떠오르던 작은 주근깨가 쉴 새 없이 바쿠고의 눈앞을 떠다녔다. 반응할 가치도 없어. 불 꺼진 방 안에 바쿠고의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외면. 바쿠고의 첫 대답이었다.

 




* 

 




   촘촘한 빗살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니스트의 유연한 손길은 바쿠고의 머리카락을 기어이 차분하게 눕혀 놓았다.

 

   직장 체험 이틀 만에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발언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굳어버린 바쿠고 앞에 깨끗한 거울이 놓였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보며 지니스트는 히어로가 지녀야할 인품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거울에 맺힌 바쿠고의 상이 점차 일그러진다. 잘못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웃기지도 않은 헤어스타일 따위로 지난 이틀 간 잠을 설치게 했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잊혀져 간다. 그 사실이 바쿠고를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빌런을 때려눕히는 일이나 시민 구조 작업 등 인지도가 올라갈 수 있는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바쿠고는 그럭저럭 직장 체험을 얌전히 끝마칠 수 있었다. 휴대폰에는 키리시마와 카미나리, 세로가 보낸 라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 사무소와 관련된 시답잖은 이야기였지만, 개중에는 히어로 살해자 스테인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바쿠고는 내심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화면을 내렸다. 키리시마가 보낸 사진 한 장이 섞여 있었다.

 

   [미도리야가 보낸 건데, 역시 스테인이랑 마주쳤었나봐.]

 

   울창한 나뭇가지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골목길의 지도였다. 바쿠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철 안에서 바쿠고는 스테인에 관한 뉴스 몇 가지를 찾아 읽으며 익숙한 이름을 찾아내려 했다. 미도리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대체 뭐야, 그 새끼. 머릿속에 몇 가지 가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바쿠고는 뉴스 페이지를 껐다. 주제넘게 참견하고 다니는 것 또한 미도리야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밀다니. 불쾌한 기억이 사슬처럼 엮여 떠오른다. 노란 유치원복을 입고 다닐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단에 서 있는 자신에게 쏟아지던 말들, 데쿠 주제에 자신을 내려다보며 빨간 얼굴로 겨우 겨우 내뱉던 말들


   바쿠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그런 생각을 품은 적도 없었다. 하필 처음이 데쿠라니. 바쿠고는 여전히 반듯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을 거칠게 손으로 털어냈다. 선명하게 떠올랐던 미도리야의 검은 주근깨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자 쏟아지는 키리시마의 웃음에 바쿠고는 몇 차례 폭발을 일으켰다. 진짜냐, 바쿠고!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세로와 카미나리를 쫓으면서도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늘 그렇듯, 바쿠고는 무시했다. 십여 년 간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은 바쿠고에게 있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가볍게 위협하면 겁을 먹고 사라지는 잡몹들과는 달리, 미도리야는 언제나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좇았다. 그 시선에 담긴 동경, 선망을 바쿠고는 당연하게 여겼다. 비록 이제는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리긴 하지만, 유에이는 한가롭게 연애 놀이나 즐길 정도로 여유를 주지 않는다. 미도리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쿠고는 간만에 복귀한 일상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미도리야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바쿠고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올마이트를 상대로 한 빌런 제압 훈련에서 미도리야의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졌을 때도, 분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올마이트에게 덤벼들었을 때도, 출구 게이트를 향해 달려나가는 미도리야를 대신해 올마이트의 앞에 끼어들었을 때도, 바쿠고는 그렇게 믿었다. 데쿠는 언제나 내 뒤나 좇는 녀석이라고. 양호실의 흰 천장을 바라보며 바쿠고는 떨리는 두 팔을 쓰다듬었다. 옆 침대에는 미도리야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일어났어, 캇쨩? 미도리야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바쿠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겼겠지, 썩을 너드.”

 

   “캇쨩 덕분이야.”

 

   “닥쳐.”

 

   바쿠고는 서두르고 있었다. 리커버리 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쿠고는 직접 양호실을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온갖 감정이 들끓는 와중에도, 바쿠고의 조바심에는 미도리야가 뒤쫓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껄끄러움이 있었다. 교실 안에서 무심하게 시선을 넘겨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바쿠고의 불안한 예감은 이내 적중했다.

 

   “캇쨩, 기다려. 할 말이.”

 

   “닥쳐! 있어도 닥치고 없어도 닥치고 꺼져.”

 

   “하지만.”

 

   동요하고 있다. 바쿠고는 스스로를 최대한 억누르며 걸었다. 통증을 이기지 못했는지 미도리야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시선은 계속 바쿠고의 다리를 붙들었다. 캇쨩, 내가 한 말 기억해? 캇쨩. 나는 캇쨩을. 바쿠고는 조금 더 늦게 깨어났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썩을 너드.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 경멸이 당혹스러움으로, 당혹스러움이 동요가 되어 눈앞이 아찔해진다. 어떤 방식으로든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시야를, 생각을, 일상을 침범한다. 두 번째 거절 앞에서 미도리야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바쿠고는 예감하고 있었다. 침식이 일어나고 있다.

 

   “썩을 너드.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얼쩡거리면 날려버린다!”

 

   자신과 반대편으로 향해야 할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평생 거기 서 있던가. 홀가분하면서도 어쩐지 운동화 바닥에 진득한 껌이 달라붙은 것만 같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음을 방해하고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게 만드는 종류의 무언가가, 바쿠고의 발목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뒷목을 감싸고 있었다. 바쿠고는 털어내듯 몸서리를 치며 걸었다.

 

   “그럴 수 없어, 캇쨩. 그건 안 돼.”

 

   뒤늦은 대답이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 

 




   왜 하필 캇쨩이야?

 

   미도리야는 스스로에게 한 번, 되물어본 적이 있다. 올마이트의 영상을 틀어 놓고 집중이 흐트러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미도리야는 수십 가지 이유를 즉각적으로 댈 수 있었다. 화려하고, 강한 캇쨩.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캇쨩. 닮아가고 싶은 대상,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 거칠고 두꺼운 손바닥의 감촉이 새삼 궁금해질 때면 미도리야는 스스로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올마이트와는 달라. 올마이트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새우긴 해도 잠을 설친 적은 없었다. 칠판을 바라보다가도 문득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금빛 솜털이 자잘하게 돋아 있는 바쿠고의 흰 목덜미를 처음으로 발견한 순간, 미도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뻗은 손을 다급하게 감췄다. 거칠고 단단한 바쿠고에게도, 무방비하고 부드러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미도리야의 잠을 앗아갔다.

 

   왜 캇쨩이 아니면 안 돼?

 

   미도리야는 질문을 바꿨다. 유에이에는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매력적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상냥한 우라라카, 솔직한 아스이, 침착한 토도로키, 모범적인 이이다, 언제나 명랑한 키리시마, 미도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닿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시선을 뺏기는 것은 이제 미도리야에게 불가항력의 일상이 되었고, 두 번의 거절은 미도리야에게 사소한 타격에 불과했다. 바쿠고가 선선히 받아들였다면 미도리야는 자신의 얼굴을 후려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키리시마가 내민 손을 바쿠고가 잡는 순간, 미도리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빌런에게 납치되는 순간까지 바쿠고는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럼에도 키리시마가 내민 손은 잡을 것이라고 예측한 것은 미도리야 자신이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그 말은 자신이 내뱉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바쿠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미도리야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너무 숱한 거절을 받은 탓에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거절에 익숙했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거절당하기 위해 나아갔다. 눈 내리는 산을 맨 몸으로 헤쳐 나가는 사람은 감각이 마비되어 서서히 자멸한다고 했던가. 그리하여 열기와 냉기를 착각하고 홀로 뜨거워하는지도.

 

   미도리야는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면서도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으면 바쿠고의 가지런한 눈썹과 미간의 주름이, 쏘아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흰 목덜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던 얼굴이 선명해진다. , 역시.

 

   캇쨩이 아니면 안 돼.

 

 



* 

 

 



   반창고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끈끈한 흔적이 남았다. 바쿠고는 거칠게 뺨을 문질러 닦아냈다. , 데쿠 새끼. 제대로 쳤네. 먼저 손을 올린 것은 자신이었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부딪치면 이렇게 흔적이 오래 남는 것인지. 등을 돌리고 기숙사를 청소하는 동안 미도리야는 몇 번인가 말을 붙여 왔지만, 대개는 전투 스타일이나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바쿠고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불편한 주제를 꺼내지 않은 것에 안도할 지경이 되어서야, 바쿠고는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 데쿠 주제에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하루 먼저 수업으로 복귀하면서 미도리야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바쿠고는 청소기의 전원을 켜고 등을 돌렸다. 쓰레기를 봉투에 주워 담고 먼지를 빨아들였다. 가끔 코드가 소파에 걸려 휘청거릴 때마다 바쿠고는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 씨발! 데쿠! 코드 잡으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홀로 청소하기에는 유에이의 기숙사는 무식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바쿠고는 코드를 뽑고 남은 청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보며 얼굴에 남은 반창고를 떼어 냈다.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건, 오랜만이었다. 얼룩처럼 시야에 묻어나던 미도리야가 점점 옅어져 간다. 알 바냐. 바쿠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인내심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내리 누르는 온갖 중압감과 더불어, 힐끔거리는 미도리야의 시선을 참아주는 것 또한. 그러나 정작 후자에 대해서는 바쿠고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웃는 미도리야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걷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발짝 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은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건방지게 뭘 마주 보고 웃어. 바쿠고는 작은 덤벨을 쥐었다. 전신이 땀으로 범벅될 때까지 자가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 바쿠고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씨발. 착각하지 말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모른 채, 바쿠고는 빈 방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키리시마의 손을 잡았을 때,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 머물렀다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런 와중에 또 시작이냐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아래에서는 지옥 같은 육탄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불평할 겨를이 없었다. 그 때에는 미도리야의 시선마저도 덜 거슬릴 정도로, 일상으로의 복귀가 반가웠으니까. 결코 안도한 적은 없었다. 시가라키를 앞에 두고 팽팽하게 긴장했던 몸이 빨리 풀렸을 뿐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일들은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었고, 우습게도 자신이 찾아낸 돌파구는 미도리야였다


   미친 놈. 바쿠고는 피식 웃었다. 두 번씩이나 미도리야를 세워 놓고 가버린 주제에. 한껏 경멸한 주제에. 바쿠고는 자세를 바꿔 다리를 풀어 주었다. 얼굴에 맺힌 땀이 바닥에 깔린 카펫에 후두둑 떨어졌다.

 

   왜 난데? 한 번쯤은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쿠고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데쿠니까, 데쿠 같은 이유겠지. 그런 이유에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 타월을 꺼내 땀을 닦으며 바쿠고는 문득 깨닫는다. 방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음을. 이런 씨발. 이마에서 한 줄기의 땀이 마저 흘러내렸다.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캇쨩. 있어? 바쿠고는 굳은 듯이 방 한가운데에 서 있다. 대답하지 않아도 문이 열리고 미도리야가 부스스한 머리칼 아래에서 눈을 빛내며 들어설 것만 같다. 그럼 나는 어떤 표정으로 저 새끼를 바라봐야 하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해줄 게 있는데. 캇쨩, 어디 간 걸까? 중얼거리는 목소리, 바쿠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놔두고 꺼져.”

 

   문 아래의 틈새로 반듯한 종이가 들어온다. 갈게, 캇쨩. 바쿠고는 자신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미도리야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지만, 손이 닿은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일그러지고 있었다. 바쿠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몇 가지 욕설이 낮게 흘러나왔다. 동요를 넘어서는 무언가, 지각해버린 무언가가 바쿠고의 손끝에서부터 쿵쿵 울렸다. 미도리야에게만 한정된 경멸, 미도리야를 향한 당혹감, 동요, 끝내 미도리야를 찾아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끊어진 인내심, 인내심. 사실은 무엇을 참고 있었던 것인지. 바쿠고는 종이를 내팽개치고 문을 열어젖혔다.

 

   야, 데쿠! 한참 멀어진 부스스한 뒷모습이 지워지고 미도리야의 얼굴이 나타난다. 의아해하면서도 다가오는 미도리야를 향해 바쿠고는 할 말을 고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데쿠 새끼가 했던 그런 건 아니야. 그것보다 더 우월한 거지. 방문 앞에 선 미도리야의 멱살을 쥐고, 바쿠고는 마침내 몇 마디를 내뱉었다.

 

   바쿠고는 그렇게 환한 웃음을, 이전에 본 적이 없다. 두 팔이 바쿠고를 끌어당겼다. 젖은 목덜미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씨발, 땀 냄새 난다고.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바쿠고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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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아카 전력 60분 [자유주제]

키리시마 에이지로 바쿠고 카츠키




차가운 사랑 냄새









 

 키리시마는 조금 울었다. 오후 3시의 뉴스 속보에서 도심을 습격한 빌런과 대치 중인 히어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타는 냄새가 난다. 키리시마는 소파를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집을 나가기 전 바쿠고는 냉장고의 야채들을 전부 꺼내 오랜 시간을 들여 씻고, 자르고, 다져 놓았다. 도마와 칼이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냄비를 꺼내는 소리, 불린 쌀과 물을 쏟아붓는 소리, 주걱이 냄비 바닥을 긁는 희미한 소음을 키리시마는 누워서 듣고 있었다.


  요리는 언제나 바쿠고의 몫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재료를 다듬고, 가스렌지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올리는 동안 자신은 식탁에 접시를 놓으며 하루의 일과를 유쾌하게 떠들곤 했다. 바쿠고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가끔 어, 그러냐. 시끄러워. 정도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사무소가 다른 두 사람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지명도가 올라갈수록 바쿠고의 모습은 부엌에서 차츰 지워져갔지만, 키리시마는 식탁에 팔을 올려놓고 바쿠고에게 말을 거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조금씩 옅어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천천히, 가끔은 생각에 잠겨 잊었던 것처럼 빠르게,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멎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았다.


  “먹어.”


  협탁에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바쿠고가 짧게 말했다. 키리시마는 눈을 감은 채 바쿠고의 기척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열 때문에 젖은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숨처럼 짧은 시간이었다. 백기를 든 쪽은 언제나 그랬듯, 키리시마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바쿠고는 발소리와 함께 침실을 빠져나갔다. 키리시마는 실눈을 뜨는 대신 바쿠고가 짐을 챙겨서 집을 나가는 작은 소음들에 귀를 기울였다. 공기가 천천히 식어간다. 이제 집 안에서 소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키리시마는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형편없는 연기력이야, 에이지로. 몇 차례 코를 풀고, 키리시마는 표면이 굳은 죽을 휘저어 떠 먹었다. 지독한 감기였다. 집을 나가겠다는 바쿠고를 붙들 힘도 없었다. 그러나 좋은 핑계는 아니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키리시마는 짐을 싸는 바쿠고를 가만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옷장에서 옷을 직접 꺼내주었을지도 모른다. 바쿠고가 마음에 들어 했던 자신의 옷도 내 주었을 터였다. 그렇게 차분하고 평화롭게, 바쿠고를 배웅할 수도 있었다. 관계를 마무리지을 때도 그만큼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키리시마는 알고 있었다. 바쿠고가 냄비 가득 죽을 끓여놓고 간 것처럼.


  키리시마는 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약 기운에 취해 꼬박 잠을 잤고, 다음 날은 일어나서 죽을 데워 먹었다. 냄비 뚜껑에 올려진 메모를 보며 웃기도 했다. 남기지 말고 쳐먹어. 휘갈긴 글씨였지만 힘을 주어 썼는지 약간 번져 있었다. 밤에는 거실로 나와 TV를 켜 놓고 소파에 웅크려 잤다. 삼일 째에는 카미나리와 세로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바쿠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언급만으로도 키리시마가 무너질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안부만을 물었다. 고작 삼 일만에 다 알게 된 것일까. 생각들이 밀려올 때면 키리시마는 채널을 돌려가며 바쿠고의 흔적을 좇았다.


  자신도 바쿠고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함께 살기로 한 것도, 떨어지기로 한 것도.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바쿠고가 몇 개의 가방을 들고 현관에 나타났고, 그 날 둘은 베개 하나를 함께 베고 잤다. 다음 날에는 바쿠고의 이불과 베개를 마련했다. 옷장의 절반을 비워 바쿠고의 옷가지를 채워 넣었다. 쓰지 않던 그릇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휴일에는 바쿠고와 어울려 나갔다. 어떤 겨울은 너무 추워서, 서로를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싸운 날에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이, 투박한 손끝이, 뻗친 머리카락과 고함이 너무나 아쉽고 그리워지곤 했다.


  조밀하게 채워 온 시간이 어느 날 갑자기, 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직감한 순간부터 키리시마는 외면했고, 바쿠고는 받아들였다. 어쩌면 키리시마가 받아들이고 바쿠고가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생겨난 균열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관계를 유지하려 할수록 균열이 커져갔다. 키리시마는 유에이의 체육 대회를 떠올렸다. 바쿠고, 그 때도 먼저 알았지. 옆구리에 꽂히는 주먹이 묵직했었다. 옷장 위에 올려두었던 바쿠고의 빈 가방에 짐이 채워졌다. 근성은 어디 갔냐. 바쿠고는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시간들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사무소로 복귀한 뒤 키리시마는 빌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바쿠고와 마주쳤다. 안녕, 바쿠고! 인사를 건넨 쪽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경화를 유지했을 때만 키리시마는 바쿠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쿠고의 찌푸린 얼굴과 날카로운 시선이 아주 잠깐, 자신에게 향했다가 이내 멀어져갔다.


  언제나 그렇듯,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쿠고는 현장을 떠났다. 바쿠고도 자신도, 받아들인 것처럼 짧게 스쳐가고 나면 키리시마는 비로소 경화를 해제했다. 남자답지 못하네, 에이지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늘었다. 자신과 바쿠고의 개성은 앞으로도 서로를 같은 현장에서 마주치게 만들 것이다. 그때마다 뻣뻣하게 굳어서 마주할 수는 없지. 키리시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은 바쿠고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야 했다.


  한동안 키리시마는 히어로 활동에 전념했다. 밤늦게, 때로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고, 침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휴일에는 카미나리들과 어울려 시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간혹 전광판에서 바쿠고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걸음을 멈추기도 했지만,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카미나리와 세로를 향해 웃어주었다. 바쿠고, 멋있네. 이것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키리시마는 생각했다


  바쿠고의 소식은 듣지 않으려 해도 각종 채널에서 쏟아져 나왔고,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는 키리시마는 적당히 둔감해지고 있었다. 바쿠고가 쓰던 그릇을 다시 꺼내어 쓰고, 손끝을 베이면서 스스로 요리를 했다. 들쑥날쑥한 크기의 재료를 대강 냄비에 쏟아붓고 가스렌지의 불을 켰다. 불을 중간에 맞춰 두고 키리시마는 거실로 돌아와 TV를 켰다.


  ‘, 바쿠고 코스튬이 바뀌었네.’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공격 방식 덕분인지, 화면에 클로즈업된 바쿠고의 뒷모습은 눈이 부셨다. 앵커는 바쿠고의 진압 방식에 대해 패널들과 진중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바쿠고, 이 방송 보면 화를 내겠는걸. 키리시마는 테이블을 내려치며 화를 내는 바쿠고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바쿠고가 내려쳐 일그러진 테이블 끝을 매만졌다. 새 테이블, 사야겠다. 이윽고 키리시마는 아주 조금, 울었다. 겨우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질 정도로만 울었다. 타는 냄새가 난다. 부엌에서 죽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눌어붙고 있었다. 불을 끄고 키리시마는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긁었다. 주걱 끝에 눌어붙은 덩어리가 턱턱 걸렸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 미처 익지 못한 쌀알과 뭉그러진 양파를 함께 으깨가며, 키리시마는 오랫동안 냄비 안을 휘젓고 있었다. 탄내와 함께 따스한 열기가 빠져나왔다. 다시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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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mojo